Five Solas 다섯 솔라

Sola Scriptura 오직 성경
Solus Christus 오직 그리스도
Sola Gratia 오직 은혜
Sola Fide 오직 믿음
Soli Deo Gloria 오직 하나님께 영광

지난 시간에 이어 ‘오직 그리스도’가 오늘날 교회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오직 그리스도’는 그리스도 만이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라는 의미입니다. 이 단순하고도 분명한 성경의 진리가 오늘날에는 두 가지 면에서 무너져가고 있습니다. 첫째는 ‘오직 그리스도’는 아니다는 생각입니다. 그리스도 외의 중보자가 있음을 많은 교회가 직간접적으로 때로는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그리스도 자체보다는 그리스도의 사역과 역할에 대한 오해와 공격입니다.

‘오직 그리스도’가 말하는 예수님의 역할은 ‘중보자’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게 하십니다. 예수님을 통해서만 죄로 깨졌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과 원수인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롬 5:10-11 [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11]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보자가 되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막는 죄의 문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습니다. 의롭다고 선포되는 칭의 때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그 후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매일의 삶에서 범하는 죄는 여전히 하나님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 관계가 끊어지지는 않지만, 관계의 친밀함, 다른 말로 하면 교제에는 문제가 생깁니다. 그때도 역시 중보자는 그리스도이십니다.

요일 2:1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예수님이 우리의 유일한 중보자시다는 말은 이런 의미입니다. 구원의 시작에서 끝까지 예수님은 중보자가 되십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런 예수님의 역할에 대한 오해가 있고 그 오해가 실제 삶에도 큰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을 그저 내가 죽으면 좋은 곳(천국)으로 갈 수 있게 해주시는 분으로만 이해하는 경우입니다.

예수님을 죄인과 하나님 사이의 중보자가 아니라 죽음 이후에 만나는 천국의 문지기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믿는’ 이유는 마치 파스칼의 내기이론에 따르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믿어서 손해 볼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진짜 계신다면 지금 예수님을 믿어 두면 나중에 죽어서 천국에 갈 테니 좋습니다. 혹시 하나님이 없더라도 지금 내가 크게 손해 볼 것은 없습니다. 그러니 그냥 믿는다고 말합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예수님의 역할에 대한 이런 오해는 실제 삶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주일에 교회에 가고 헌금을 하고 하는 것으로 내 할 일은 끝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이 세상에 대한 내 가치관을 근본적으로 바꾸거나 할 이유는 없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나 추구하는 것 중에 죄와 관련된 것이 있더라도 큰 문제는 아닙니다. 그것을 예수님이 대신 담당하셔서 천국에 갈 수 있게 해주신 것이고 난 그 예수님을 믿고 있으니까요.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역할을 이렇게 제한해 두고 “내가 당신을 믿고 죽음 이후의 삶을 맡겼으니, 지금 내 삶에는 관여하지 마시오. 혹시 내가 힘들면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은 괜찮지만,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고는 하지 마시오.”라고 말합니다. 영원한 삶과 이 땅에서의 삶, 영적이 일과 육적인 일, 신앙과 삶이 철저히 분리됩니다.

구원과 믿음에 대한 심각한 오해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저 예수님이 존재함을 인정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단지 존재에 대한 인정이라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믿음은 관계에 있어서의 신뢰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그 믿음은 삶을 바꿉니다. 야고보가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말한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닙니다(약 2:17). 행함이 없는, 즉 삶을 달라지게 하지 않는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다는 것도 그가 단지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믿었다거나 하나님에 대해서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분에게 자신의 삶을 맡겼습니다. 단지 죽고 나서의 삶이 아니라 이 땅에서의 삶도 맡겼습니다. 그 확실한 증거로 아브라함은 자신의 아들까지도 믿음으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약 2:21; 히 11:17~19).

예수님을 믿는 것은 지금의 문제 없는 내 삶에 ‘플러스알파’로서 혹은 보험으로서 예수님을 두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내 삶에 내가 해결할 수 없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고 그에 대한 유일한 해결이 예수님이심을 인정하고 겸손히 그분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 치명적인 문제는 우리가 죽으면 지옥에 가게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것도 문제이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의 문제입니다. 창조주이며 주권자, 심판자이신 하나님을 우리가 배반했습니다. 반역했습니다. 등을 돌렸습니다. 그에 대한 결과로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중보자가 되신 것입니다. 단지 지옥 갈 사람을 천국으로 갈 수 있게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수를 자녀가 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사망의 권세 아래 있던 자들을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되게 하셨고 예배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은 좋은 것이고 이 땅을 사는 우리에게 소망이 됩니다. 하지만 그것이 좋은 이유는 그곳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볼 것이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면서 의도하신 아름다운 관계 속에 거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리스도’께서 이런 일을 하셨다고 믿는다면, 우리 오늘의 삶을 하나님과 관계없이 살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을 그저 내가 이 땅에서 살 때 나에게 도움을 주는 분으로 이해합니다. 첫 번째와는 전혀 다른 쪽의 극단입니다. 지금 나의 삶과 예수님을 매우 밀접한 관계에 놓지만 어떤 식으로 관계가 있는지에 대해서 오해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예수님을 나에게 복을 주거나 화를 면하게 해주는 존재로만 생각합니다. 마치 우리 조상들이 이미 죽은 조상들을 잘 모시면 복을 받고 화를 면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지극 정성으로 조상들을 모셨던 것과 비슷합니다. 혹은 어떤 자연의 신이 노해서 내가 화를 입지 않도록 하거나 이미 당하고 있는 화를 멈추기 위해 신을 달래주는 일을 했던 것과도 비슷합니다. 단지 그런 대상이 ‘예수님’ 혹은 ‘하나님’으로만 바뀐 것 뿐입니다.

예수님을 이런 분으로 이해하면 중요한 것은 얼마나 내가 하는 일이 잘 풀리고 자녀가 성공하고 부모님이 건강할 것이냐는 것입니다. 내가 잘 되는 것이 곧 내가 예수님을 ‘잘’ 믿고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혹시 잘 안 풀리는 일이 있다면 뭔가 내 공적이 부족하다는 의미입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내가 얼마나 열심히 예수님을 섬기느냐는 것입니다. 뭔가를 열심히 해서 신에게 좋은 ‘점수’를 얻는 것이 중요한 일이 됩니다. 혹은 신의 심기를 건들지 않아서 내가 무슨 해를 입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좀 더 현대적으로, 요즘에는 세상에서 말하는 심리학에 예수님을 슬쩍 끼워 넣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통해 자존감을 높이고 과거의 트라우마를 극복합니다. 가정 문제, 직장 문제, 학교 문제 등에도 심리학이 제시하는 해법에 예수님이 살짝 얹혀 있습니다.

물론 이런 일들이 전혀 의미가 없고 예수님이 하시는 일도 아니라는 말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이런 것을 원하시지 않는다는 말도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이런 복을 누릴 수 있고 궁극적으로 이런 문제의 유일한 해결도 예수님이십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우리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되면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보자가 아니라 우리가 원하는 것들과 우리 사이의 중보자가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끌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우리 삶을 통해서 이루시게 하시는 것이지, 단지 내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게 하는 (실존하지도 않는) 램프의 요정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보자이십니다. 그것이 ‘오직 그리스도’의 의미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역할을 제한하거나 혹은 역할을 바꾸는 것은 우리가 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내가 원하는 예수님을 섬길 수는 없습니다. 다 그렇지는 않을지 몰라도 조금씩은 우리에게 이런 모습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알게 모르게 우리는 세상의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에 예수님을 상관없는 분으로 여기고 있는 곳은 없는지, 혹 잘못된 목적으로 예수님을 ‘이용’하고 있는 부분은 없는지 우리 삶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