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에게 이 질문은 그 자체로 당혹감을 줄 수 있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이 ‘당연히 교회의 주권은 교회의 주인으로서 권리를 가지고 계신 주님께 있는게 아닌가?’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 누가 감히 교회의 주권이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있다고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내 교회”를 세우겠다고 말씀하셨고(마 16:18), 사도 바울은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씀합니다(엡 1:22; 5:23; 골 1:18). 

그러나 이 질문을 하는 이유는 교회의 머리로서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교회가 교회로서 기능할 때 필요한 모든 의사결정의 과정에서 ‘누가 결정권을 갖는가’를 알기 위함입니다. 한마디로 교회의 정치에 대한 질문입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교황으로부터 내려오는 분명한 수직구조를 갖지만, 장로교회나 침례교회는 장로와 집사로 구성된 일꾼들이 교회를 인도합니다. 반면 회중교회는 장로를 두지 않고 집사만 두면서 교인 중 민주적 방식으로 선출된 교인들이 구성한 평의회를 가지고 교회를 운영해나갑니다. 이렇게 다양한 교회의 정치 형태가 존재합니다. 각각의 형태가 강조하는 본질적 가치가 있습니다. 가톨릭은 권위와 질서를 강조하고 회중교회는 평등과 자유를 강조합니다.

사람마다 각자의 취향이나 성향에 따라 선호하는 교회의 정치 형태가 있을 것입니다. 가끔 저는 교회에 다닌 배경이 적거나 성경의 가르침에 익숙하지 않은 분들이 교회와 국가를 비교하며 말씀하실 때 놀랄 때가 있습니다. 가령 ‘국가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듯 교회의 주권은 교인에게 있다.’ ‘대통령이나 왕이 집권하는 체제보다 민주주의가 더 합리적이고 이상적인 것처럼 교회도 이제 민주주의가 되어야 한다.’라고 말할 때 어떻게 답해야 할지 막막할 때가 있습니다.

어떤 분들의 생각 속에서 장로와 집사는 기득권이고 성도는 비기득권입니다. 장로와 집사는 회사의 사장과 이사 등 중요 직책으로 보고 교인은 평사원, 노동자로 구분합니다. 심지어 노조처럼 교회의 “기득권”을 견제하는 세력을 교회 안에 세워야 한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세상의 정치와 사회의 다양한 개념이 교회의 정치 안으로 밀려 들어옵니다. 이렇게 혼란스럽게 뒤섞여 있는 개념들은 각각 자유, 평등이라는 본질적인 가치를 앞세워 모두 그럴듯하게 들립니다. 하지만 그럴듯하다고 해서 반드시 옳은 것만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의 주권을 가지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교회의 정치에 대해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교회의 주인으로 권리를 가지고 계시고 그분이 제정한 교회의 정치가 우리가 따라야 할 교회의 정치입니다.

1. 장로와 집사: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본을 보여야 할 인도자

사도 바울은 선교여행 중에 세운 각 교회에 “장로들”을 세웠습니다(행 14:23). 예루살렘에 세워진 교회 역시 “장로들”이 있었습니다(행 15:2, 4, 6). 바울은 또한 디모데와 디도에게 각각 그들이 있는 곳에서 합당한 장로를 세울 것을 명하면서 장로와 집사의 자격에 대한 엄격한 기준을 제시합니다(딤전 3:1-13; 딛 1:5-9).

장로와 집사가 하는 일은 크게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성경의 진리대로 교회를 인도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진리대로 살아서 따라갈 수 있는 본을 보이는 것입니다.

먼저 장로는 성경의 진리대로 교회를 인도해야 합니다. 목자로서 하나님의 양들을 먹이고 돌보고 보호할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자신을 장로라고 소개한 베드로(벧전 5:1)에게 주님이 친히 부탁하신 것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요 21:15-17).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으로 가르치고 권면하고 거짓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 장로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성도가 주 안에서 거룩하게 자라나도록 돕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반드시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잘 알아야 하고 그것을 분명하게 가르칠 수 있어야 합니다. 또 그 진리대로 교회를 인도하고 다스릴 수 있어야 합니다.

장로와 집사는 진리대로 살아서 따를 수 있는 본을 보여야 합니다. 장로와 집사는 단 하나의 기준인 “가르치기를 잘하는 것”만 제외하고 대부분 기준이 동일합니다. 그리고 그 기준은 모두 인격과 성품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제자를 삼는 것”과 그 제자들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을 명령하셨습니다(마 28:19-20). 가르치는 일이 장로가 해야 할 주된 일이며 그들의 삶과 인격은 가르친 것과 역행하는 것이 아니라 가르친 바를 지키도록 돕는 훌륭한 본이 되어야 합니다(벧전 5:3). 집사 역시 삶과 인격으로 모든 성도에게 본이 되는 사람입니다. 장로와 구분되는 것은 역할인데 집사는 보다 실질적인 구제와 섬김의 영역에서 맡은 역할이 있습니다(행 6:1-7).

다른 모든 성도와 마찬가지로 장로와 집사 모두 연약한 인간입니다. 그들에게도 주님의 은혜와 사랑이 필요하고 그들에게도 자라야 할 부분이 있고 주님이 일하셔야 하는 삶의 영역이 있습니다. 싸워야 하는 죄가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성도 가운데 말씀과 기도에 전념하는 역할을 맡은 자로서 그 말씀에 따라 성도를 다스리고 권하고 가르치는 일을 합니다(살전 5:12). 그리고 스스로 그 말씀에 따라 사는 본을 삶의 각 영역과 인격과 성품 가운데 보여주는 일을 하는 사람이 장로와 집사입니다. 그들의 가르침과 삶을 통해 성도를 인도해야 한다는 막중한 책임감을 가져야 하며 그에 따라 평가를 받게 될 것입니다(히 13:17).

그래서 장로와 집사는 진리대로 교회를 인도해야 합니다. 민주주의 법칙에 따라 모든 성도의 의견을 듣고 다수가 원하는 대로 교회를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설령 다수가 원치 않는다 해도 성도를 격려하고 권하여 진리의 말씀대로 인도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가령 주일에 설교를 들으니 수요일이나 교회학교에서는 말씀 시간이 없어도 된다고 많은 성도가 생각한다 해도 장로는 그들을 만족하게 하려고 그것을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왜 필요한지 설명하고 설득하여 더 말씀을 사모하고 갈급할 수 있도록 돕는 방향으로 교회를 인도해야 합니다.

물론 성도의 생각과 견해를 듣고 수렴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장로와 집사가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는 것을 말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소통하는 것과 성도의 의견에 따라서 결정하는 것은 다릅니다. 의견을 충분히 듣고 수렴하고 필요한 경우 설득하고 권하면서 장로는 진리의 말씀에 따라 교회를 인도해야 합니다. 목자장 앞에 섰을 때 교회를 왜 이렇게 인도했냐고 물으실 때, “성도들이 그렇게 해달라고 했으니까요”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목자장 되신 예수님은 장로가 따라야 할 매뉴얼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장로와 집사는 기득권이 아닙니다. 그들이 기득권이 되려고 하는 순간 자격을 상실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처럼 낮아지려고 하고 섬기려고 하며 진리를 가르치면서 그 진리에 먼저 앞장 서야 하는 사람이 그 권리를 남용하기 시작한다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 세워진 장로와 집사로 합당치 않습니다. 성경은 더러운 이득을 위해 일하거나 억지로 하지 말고 주장하는 자세(권위주의)로 하지 말라고 명령합니다(벧전 5:2-3). 목자장의 본을 따라 일하는 자가 참 목자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장로와 집사를 교회의 인도자로 명시합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교회에 장로와 집사가 세워졌으며 그들은 교회를 그리스도가 가르치신 말씀대로 인도하고 다스리고 가르치기 위해 삶을 헌신하였습니다. 그들의 인격과 삶과 성품이 그들의 가르침의 예시가 되고 성도가 따라야 할 본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정치 역시 이와 같아야 합니다. 

 2. 성도: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보여야 할 제자들

성경은 교회 정치에 있어서 성도의 역할도 강조합니다. 보통 현대인이 싫어하는 단어인 ‘순종’과 ‘복종’이 등장합니다. 하지만 교회에 성령께서 세우신 은사로서 장로를 생각해보면 순종과 복종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의무입니다. 장로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본을 보인다면 그것을 따르는 순종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벧전 5:5).

순종은 장로에 대한 존경심(살전 5:12)과 사랑으로 드러납니다. 또한, 물질적인 후원을 통해서도 나타납니다(딤전 5:17). 어떤 사람은 ‘회사는 돈을 받으면서 다니지만, 교회는 돈을 내면서 다닌다’고 말합니다. 이 말에는 교회에 내가 지급한 것만큼 영적 사회적 정신적 유익을 얻어낼 권리가 있다는 생각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은 참 충격적입니다. 왜냐하면, 헌금은 주를 사랑하는 마음과 주께 헌신하고 싶은 진심이 담겨있는 예배이지 세금이나 회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순종은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에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성경적인 순종은 무조건적인 맹종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혹은 내 의견을 말할 수 없고 생각을 나눌 수 없다는 말도 아닙니다. 질서에 순응한다는 말은 나의 의견과 생각을 나누는 태도와 방법을 결정합니다. 가령 직접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뒤에서 수군수군하지 않습니다. 견해를 말할 때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키려는 태도를 버립니다.

또한, 질서에 순종하는 것은 최종결정권을 질서 위에 있는 사람에게 둡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충분히 자신의 의사를 전달했지만, 남편을 머리로 삼아 최종결정권을 주는 것처럼 말입니다. 질서 위에 세워진 자들은 모든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 앞에서 무엇이 올바른 결정인지 끊임없이 연구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질서 아래서 교회의 역할을 담당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올바른 결정을 할 수 있도록 자신의 의사를 충분히 정직하게 알리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동시에 무엇을 결정하든지 그것에 순종하려는 태도를 갖는 것입니다.

성도의 입장에서 우려되는 부분은 장로의 잘못된 판단이나 부패입니다. 권력을 남용한다든지 교회를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견제의 필요성을 느끼는 것도 이해가 됩니다(물론 이런 생각은 스스로 집을 무너뜨리는 잘못된 생각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교회는 주인 되신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세워져 갑니다. 그래서 그 역할에 합당치 못한 일을 한 경우 주의 말씀에 따라 징계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가령 장로가 더러운 이득을 위해 일하거나 그 자격에 합당치 못한 일이 드러난 경우 두 세 사람의 증인에 따라 고발하게 되어 있습니다(딤전 5:19). 성도 역시 주의 말씀에 역행하는 일을 하는 경우(범죄한 것이 드러나거든-갈 6:1) 신령한 자들을 통하여 바로 잡게 하라는 주의 명령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주 안에 한 형제자매입니다. 교회를 한 몸을 이루는 각각의 지체이며 거룩한 부르심을 받은 동일한 성도입니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산 고귀한 가치를 가진 자들입니다. 다만 서로가 교회 안에서 받은 은사와 역할이 다를 뿐입니다. 그러니 우리 스스로 기득권과 비기득권으로 나누려는 반성경적인 생각의 싹을 잘라 버려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말씀과 기도에 전념하여 모든 성도를 주의 말씀으로 가르치고 권하고 다스리는 일을 합니다. 누구보다 먼저 그 말씀에 따라 사는 본으로 삶과 인격과 성품을 빚어가면서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성도로 자신의 은사를 활용하면서 말씀으로 인도하는 자들을 잘 따라가는 일에 충성합니다. 그들의 결정과 선택을 존중하면서 순종합니다. 모두가 한 주님을 섬깁니다. 교회의 머리 되신 예수님을 위해 일합니다. 그분을 예배합니다. 동일한 목적을 위해 모이기에 힘쓰고 하나가 됩니다. 서로 돌아보고 사랑으로 섬깁니다.

때론 서로의 부족한 면을 발견합니다. 실수를 봅니다. 잘못된 결정과 그 결과를 모두 맛보게 됩니다. 죄로 넘어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서로 비방하지 않습니다. 견제하지 않습니다. 죄로부터 돌이킬 수 있도록 돕습니다. 때론 서로 죄를 고백하기도 하고 죄를 깨닫도록 책망하기도 합니다. 지혜로운 결정을 할 수 있도록 생각을 나눕니다. 사랑으로 이해하고 용서합니다.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은혜와 자비를 누리면서 그분의 영광을 구합니다. 

교회의 주권은 누구에게 있는가?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오직 그분께만 있습니다. 그분은 몸 된 교회의 각 지체에게 은사를 성령의 뜻대로 나눠주십니다. 그리고 그 은사대로 교회가 세워지기를 원하십니다. 장로와 집사는 주권자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본이 되어야 할 인도자로서 성도는 주권자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보여야 할 제자로서 충성을 다합니다.

우리가 주권자의 뜻대로 교회를 함께 세워나갈 때 우리 머리 되신 그리스도의 영광이 그의 몸 된 교회와 온 세상에 밝히 드러날 것이라 확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