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믿음’은 실제 그들의 삶에 얼마나 영향을 줄까요?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고전 5:7)
만약 보이는 것이 전부라면 사도 바울의 삶은 참으로 안타까운 삶입니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좋은 교육을 받고 자란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예수’를 만났다고 하며 그 나머지 삶을 예수를 전하는 데 모두 바쳤습니다. 그것으로 많은 부를 누린 것도 아니고 명예를 얻은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들에게 핍박을 받고 결국에는 예수님을 전했다는 이유로 삶을 일찍 마감해야만 했습니다. ‘보이는 것’, 즉 이 세상이 전부라면 사도 바울의 삶은 안타깝고 비참하고 한편으로는 어리석은 삶이라는 평가를 받아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 자신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전 15:19)
그것을 잘 아는 바울이 그런 삶을 살았던 것은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믿었고 그 믿음에 따라 살았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위를 바라보았고 위에 있는 것을 추구했습니다. 짧은 시간을 보내게 될 이 땅이 아니라 영원을 보내게 될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런 그의 삶은 전과 같을 수 없었습니다. 그의 믿음이 그의 삶을 완전히 바꾼 것입니다.
바울의 믿음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수많은 사람들의 삶이 그들의 ‘믿음’ 때문에 완전히 뒤바뀐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믿음 때문에 고향과 친척을 떠난 사람, 믿음 때문에 자기 아들을 하나님께 바친 사람, 믿음 때문에 부귀영화를 포기하고 고난받기를 선택한 사람, 믿음 때문에 작은 군대로 큰 군대와 싸운 사람, 믿음 때문에 고난받고 죽음을 선택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상의 기준에서 볼 때는 어리석은 선택을 한 이 사람들의 공통점은 ‘믿음을 따라 살다가 믿음을 따라 죽었다’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바라는 것을 지금 있는 것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 믿음입니다(히 11:1). 실제로는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 믿음은 아닙니다. 그것은 그저 긍정적인 생각일 뿐입니다. 믿음은 ‘실재하지만 지금 내 눈에는 실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실재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더 나은 본향을 믿음으로 바라봤습니다. 비록 지금 내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그것이 실재하기에 실재하는 것으로 여기고 그들의 오늘을 살았습니다.
우리는 모두 오늘의 ‘현실’을 살아갑니다. 누군가는 눈으로 보는 그것을 현실이라고 말하고, 누군가는 믿음으로 보는 그것을 현실이라고 말합니다. 같은 상황에 있어도 다른 현실을 보고 있고 그것이 우리가 그 상황 속에서 어떤 생각과 태도를 갖는지 또 어떻게 말하고 행동하는지를 다르게 만듭니다. 특별히 ‘고난’이라는 특수한 상황은 우리가 어떤 현실을 보고 있는지, 다르게 말하면 어떤 믿음을 가지고 살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랜디 알콘은 <하나님을 보는 즐거움>이란 책에서 그리스도인의 하늘나라에 대한 믿음이 그들이 겪는 현재의 고난을 어떻게 다르게 바라보고 다르게 행하게 하는지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말합니다.
우리가 지닌 낙관주의에 대한 진정하고 유일한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뿐이다. 다른 근거는 모래일 뿐, 바위가 아니다. 영원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삶을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위에 세운다면, 우리는 낙관주의자가 될 수 있다. 왜 그럴까? 우리 삶의 가장 아픈 경험조차도 일시적인 시련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 땅에서의 아픔과 고통은 없어질 수도 있고 그대로일 수도 있지만, 천국에서는 반드시 없어질 것이다. 더 이상 죽음도 고통도 없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의 약속이다. 그분은 우리의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이다(계 21:4). 그것이 우리의 낙관주의에 대한 성경적인 근거다.
그리스도인은 결코 비관주의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주권자이시며 자비로운 하나님을 섬긴다는 사실에 입각한 현실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구속적 희생과 그분의 약속이 확실하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즐거워할 수밖에 없다.
우리의 낙관주의는 하나님이 지금 이 땅에서 우리를 모든 고통으로부터 면제시켜 주신다는 “건강과 부의 복음”에 의한 것이 아니다. 베드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3)
우리가 미래에 얻게 될 그리스도의 영광이 지금 이 땅에서 우리가 고통 중에서도 즐거워해야 할 큰 이유가 된다.
물론 언젠가 고통이 사라질 것을 안다고 해서 현실의 고통을 쉽게 견딜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고통을 견딜 만한 힘은 된다. 소망은 고통 가운데서라도 기뻐할 수 있게 한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골 1:24). 야고보는 이렇게 말한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약 1:2). 사도들은 자신의 괴로움을 즐긴 것은 아니지만, 고통 중에도 즐거워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을 신뢰했기 때문이다.
천국을 고대하는 것이 고통을 없애 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고통을 줄여 주며, 고통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해준다. 천국을 묵상하는 것은 고통을 크게 덜어 주는 좋은 방법이다. 고통과 죽음은 일시적인 것이며, 끝없는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영원한 삶을 살기 위한 관문이다.
천국에 대한 성경의 교리는 미래에 관한 것이지만 지금 이 땅에서의 삶에서도 상당히 유익함을 준다. 우리가 이 진리를 깨닫는다면 삶의 무게 중심이 바뀔 것이며, 삶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근본적이며 급진적으로 바꿔 놓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로마서 8장 20~25절에서 여섯 번이나 나오는 성경이 말하는 ‘소망’이다. 모든 피조물도 우리의 부활과 세상의 구속을 기다리고 있다.
지속되지 않으며 지속될 수도 없는, ‘좋은 환경’에 여러분의 소망을 두지 마라. 그리스도와 그의 ‘약속’에 소망을 두라. 그분은 다시 오실 것이다. 우리는 새 땅에서 부활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될 것이며, 영원히 그분을 즐겁게 섬기게 될 것이다. 우리는 진정 영원히 행복하게 살게 될 것이다. 이것은 동화가 아니다. 피로 값 주고 사신 전능하신 하나님의 약속이다.
개인적으로 그리스도인이 진정한 낙관주의자이자 동시에 현실주의자라는 말에 크게 동의합니다. 세상의 기준에서 볼 때 낙관주의와 현실주의는 서로 충돌하는 개념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이고 이 땅에서의 삶이 전부라고 생각한다면, 고통스러운 현실은 말 그대로 고통스러운 현실일 뿐입니다. 낙관주의는 그저 현실을 조금 외면하고, “상황이 달라지면 좋아지겠지.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겠지.”라는 막연한 소망을 품을 수 있게 할 뿐입니다.
하지만 믿는 자는 낙관적인 현실주의자(혹은, 현실적인 낙관주의자)가 될 수 있습니다. 믿음은 막연한 소망을 확실한 것으로 바꾸고 고통스러운 현실을 견디며 이겨낼 수 있는 강한 힘을 주기 때문입니다. 고난은 우리의 고개를 떨구고 이 땅을 바라보게 만듭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믿게 만듭니다. 그것이 너무 커서 다른 어떤 것도 지금 나의 상태를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하게 합니다. 그럴 때 ‘믿음을 가지세요.’라고 말하는 공허한 외침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마주하고 있는 현실이 정말 무엇인지 바로 보아야 합니다. 고통스럽습니다. 슬픕니다. 하지만 소망 없는 자같이 고통스럽고 슬프지는 않습니다(살전 4:13). 내가 믿고 있는 것이 정녕 무엇인지 더욱 깊게 생각해 보아야 할 때가 바로 인생의 폭풍 중에 있을 때입니다. 우리의 믿음 안에 참된 위로와 평안과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믿는 자의 삶을 완전히 바꿉니다.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의 삶이 그러했듯이 오늘을 사는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은 그저 주일에 교회에 가서만 듣고 말하는 단어가 아니라 우리 매일의 삶에 함께하는 단어입니다. 우리 매일의 삶에 함께하며 우리의 삶을 바꾸는 것이 바로 우리의 믿음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이 정말 어떤 분이신지, 그분이 어떤 약속을 하셨는지 우리는 부지런히 배워서 정말 그런 하나님을 내가 섬기고 있음에 감사하며 그 약속을 붙들고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보는 것이 아닌 믿음으로 사는 ‘믿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