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트 챈들러는 그의 책 <예수 중심의 교회>에서 이런 사회 현상을 묘사합니다. 

근처 커피숍에 가보면 많은 사람이 한 공간에 모여 있지만, 실제로는 각자 따로 논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헤드폰을 끼고 혼자 고개를 흔들거리는 사람, 노트북을 치느라 여념이 없는 사람, 스마트폰만 만지작거리는 사람. 이것은 커피숍의 문제가 아니다. 이런 ‘함께 있되 함께 있지 않은’ 현상은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오늘날 세상은 인류 역사상 가장 촘촘히 연결된 세상인 동시에 가장 외로운 세상이다. 함께 어울리기는 하되 관계는 없고 모두가 혼자 놀고 혼자 생각하고 혼자 중요한 문제를 결정한다. 따라서 공동체 형성의 열쇠인 복임이 빠진 곳에는 언제까지고 연결성과 외로움이 공존할 수밖에 없다. 오직 복음만이 진정으로 하나 된 공동체를 이루어낼 수 있다(71 p)

이러한 사회 현상은 모든 사람의 일상 가운데 깊이 침투되어 있습니다. 저도 어느 날 아내와 함께 식사하면서 문득 두 사람 모두가 스마트폰을 하면서 각자 밥을 먹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온종일 떨어져서 각자의 일을 하다가 생각을 나눌 수 있는 시간을 겨우 가졌는데 단 30분도 친밀함을 나누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으로 하나 된 공동체인 교회에 친밀함이 사라져 갑니다. 모이기는 자주 모입니다. 수요일, 주일, 주일 오후 성경공부, 구역집회, 부서별 모임, 연령별 모임 등 수많은 만남의 기회와 교제의 장이 주어지지만 그것이 꼭 친밀감을 높여준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챈들러는 “단순히 한두 시간 소그룹으로 모여 다과를 나누다가 뿔뿔이 집으로 흩어지는 것을 형제애라고 말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런 사귐의 시간이 불필요하다는 말이 절대 아닙니다. 서로 모이고 싶어 하고 돌보기 원하며 사랑하는 것이 먼저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모여 교제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모여야 하니까 모이고 나눠야 하니까 나누는 모임이 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말입니다.

교회는 다양한 배경을 가진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모인 공동체이기 때문에 충만한 복음의 능력을 통해서만 친밀함이 증진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매트 챈들러는 소그룹, 주일학교, 성경공부반이 필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은혜의 복음이 그 모임을 주장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로마서 12장 9-13절 말씀으로 친밀한 교제를 위한 교훈을 제시합니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1. 가면을 벗으라

거짓 없고 꾸밈없는 교제가 복음이 이끄는 공동체에 필수적입니다. 우리는 서로 얼마나 더 잘하고 있는지 뽐내기 위해 만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가 악한 본성과 싸우고 있으며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가문, 명성, 재능)은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선물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우리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도 잘난 척 할 수 없습니다. 겸손과 온유로 서로를 대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에게 솔직하고 다른 지체에게 솔직할 수 있습니다. 불쾌하고 불필요한 내용까지 낱낱이 서로에게 고하는 것이 솔직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 가족으로서 서로의 삶을 공유하고 나누며 서로의 삶에 뛰어들 수 있도록 기회를 줘야 합니다. 챈들러의 말처럼 “완벽해 보이는 가면을 찢어 맨얼굴로 살아갈 자유”를 누려야 합니다.

2. 죄인은 품고, 죄에는 맞서 싸우라

두 가지 잘못된 모습이 있습니다. 하나는 죄를 미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린 모두 죄인이니까’, ‘어쩔 수 없이 죄를 질 수밖에 없으니까…’라는 생각으로 죄를 가볍게 보는 것입니다. 아무런 죄가 없는 하나님의 독생자가 피를 흘려 죽기까지 죄의 대가를 치러야 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죄는 아무리 보잘것없어 보여도 겉으로 크게 드러나지 않아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두 번째 잘못된 모습은 죄인을 정죄하는 행위입니다. 사실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 죄인이었고 여전히 죄와 싸우고 있습니다. 성도가 범죄한 다른 성도를 정죄하는 것은 무서운 판단의 행위이며 하나님 고유의 권리를 차지하려는 행위입니다. 물론 성도의 죄에 대해 기도하고 돌이키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겸손과 온유로 형제자매의 회복을 위한 목적을 위해 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의 교제 가운데 이 부분이 거꾸로 되어 있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가령 불평불만이 많은 성도가 있으면 마음속으로 그 성도를 정죄하고 멀리하면서 그 성도를 얽매고 있는 불평의 죄에 대해서는 가볍게 대하고 넘어가려는 것입니다. 반대로 성도를 넘어뜨리고 있는 죄를 미워하며 그 죄에서 돌이키도록 겸손과 온유로 권면하고 그 성도에 대해서는 죄에 넘어지는 나와 같은 연약한 지체라는 사실에 긍휼과 동정을 보이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3. 사랑과 존경으로 대하라

챈들러는 사랑에 대해 이와 같이 말합니다.

각자의 형제자매를 떠올려보라. 형제자매는 같은 곳에 있지 않아도 늘 서로를 생각한다. 서로가 어디에 있고 어떤 어려움에 처해 있으며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누구보다도 잘 안다. 저녁 식탁에 한 사람이라도 나타나지 않으면 전화를 걸어 밥을 먹었는지 꼭 물어본다. 왜 그럴까? 그만큼 사랑하기 때문이다. 신자들도 이런 가족의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해야 한다(85p)

과거 학생회와 청년회 시절을 떠올리면 지금보다 많이 가족적이었던 교회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꼭 교회만 그랬던 것이 아닙니다. 최근에 인기를 많이 얻었던 ‘응답하라’ 시리즈의 드라마를 보면서 ‘맞아, 저땐 저랬지’라고 공감했던 장면이 많았습니다. 사회가 지금보다 더 친밀했고 정이 많았습니다. 가족적이었습니다.

지금의 현상은 한 식탁에서 식사하는 가족들 안에서도 친밀함이 고갈되는 모습입니다. 철저하게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삶의 행태가 뚜렷이 보입니다. 복음으로 하나 된 교회는 달라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개인교제’를 위해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백성’으로 공동체로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둔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고 한 건물을 이루고 있는 각각의 부분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남을 생각할 수 있고 다른 지체를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한 마디로 서로 뜨겁게 사랑해야 합니다. 챈들러는 다음과 같은 마음을 가지라고 말합니다.

* 이 사람을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까?

* 우리 교회 식구들을 위해 내가 엘리베이터에서 가장 먼 곳에 주차를 해야겠어(유평교회는 잔디밭^^)

*예배 시간에 내가 기둥이 시야를 가리는 곳에 앉아야겠어

*이 사람이 이기도록 내가 져줘야겠어

*이 사람이 조금이라도 편해진다면 얼마든지 불편을 감수할 수 있어

*어떤 삶이 남을 나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삶일까?

4. 진리를 상기시켜주라

성도는 진리를 말하는 것과 진리를 살아내는 것으로 서로를 격려하고 서로를 위로할 수 있습니다. 복음이 우리의 삶 가운데 능력으로 드러날 때 그것이 다른 지체에게 미치는 영향은 막강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집니다(요일 4:12). 

저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얻지만 성도를 통해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실현되는 곳은 성도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진리를 아는 일에 함께 힘써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막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진리로 무장해야 합니다. 그렇게 살기 위해 서로 독려해야 합니다. 

5.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라

초대교회는 성도의 필요를 서로 채워주기 위해 자신의 재물을 팔고 자신의 물건을 자기의 것으로 주장하지 않으면서 물건을 함께 사용하였습니다. 사회주의적인 사고를 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내것 네것의 구분을 분명하게 세워두고 엄격하게 적용하기보다는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기꺼이 주고받았다는 말입니다.

교회는 가난한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을 채워줄 뿐만 아니라 영적 필요를 채울 수 있어야 합니다. 건강의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에게 찾아가 위로와 격려를 할 수 있어야 하고 지혜가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지혜를 나눠줄 수 있어야 합니다. 말과 혀로만 사랑하는 성도가 늘어갈수록 교회는 외로움을 겪게 될 것입니다. 교회 안에 다양한 은사와 재능, 물질과 지위를 가진 성도가 함께 한 몸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로 서로를 섬기도록, 서로의 필요한 부분을 채우도록 함께 부르셨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해줍니다.

우리는 내가 가진 것으로 어떤 사람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지 생각해야 합니다. 주가 이 교회에서 나를 어떻게 쓰기 원하시는지 물어야 합니다. 서로를 채워주고 섬기는 자로 역할을 담당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가 속한 사회의 현상은 교회가 본래의 부르심에 충성하기 어려운 현상입니다. 하나 되어 서로 사랑하고 필요를 채우며 죄와 함께 싸우고 삶을 공유하는 교회가 참으로 건강하고 살아있는 교회입니다. 영원히 교회는 그런 사랑의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현상에 휩쓸리지 말고 점점 더 이기적이고 개인적으로 변해가는 세상 속에서, 함께 있지만 함께 있지 않은 현상 속에서 교회는 복음의 능력으로 다른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깊고 뜨거운 사랑으로 서로 친밀한 교제를 나누기를 소망합니다. 우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분께서, 성령으로 우리를 하나 되게 하신 분께서 우리가 그렇게 사랑하며 살 수 있게 하는 모든 지혜와 능력을 충만하게 내려 주실 것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