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종’ 혹은 ‘복종’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좋아하는 단어는 아닙니다. 그 말 자체가 (나보다 더 권위나 힘이 있는) 다른 사람에 의해 나의 행동이 달라진다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은 이것인데 나보다 더 힘 있는 누군가가 다른 것을 하라고 하고 나는 어쩔 수 없이 그 사람의 말에 따르게 됩니다. 그런 것을 우리는 순종 혹은 복종이라고 생각하고, 일반적으로 그렇게 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이런 일반적인 순종의 개념을 성경을 읽을 때도 그대로 적용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순종에 대해서 말할 때 언제나 ‘하기 어려운 것’, ‘싫지만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것’, ‘싸움’ 등으로 인식합니다. 더 나아가서는 “순종하라”는 성경의 명령에 대한 근본적인 반감을 품는 경우도 있습니다. 혹은 “순종하라”는 명령을 상황에 따라서 적용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것으로 축소하기도 합니다. 사실 성경에서 말하는 순종이 위에서 말한 의미라면 이런 반응들은 어떤 면에서 자연스럽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반응하기에 앞서 성경이 말하는 순종이 정말 그런 것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순종에 대한 오해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는 항상 두 가지가 함께 작용합니다. 그 일을 하게 하는 동기와 실제로 그 일을 하는 행위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밥을 먹는 것은 ‘배고픔’이란 동기가 있고 실제로 밥을 먹는 행위가 있습니다. 동기와 행위는 서로 구분되지만 분리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이 둘은 때로 서로 바꿔서 사용되기도 합니다. “배고파?”라고 묻는 것이 “밥 먹을래?”라는 의미가 되기도 하고, “밥 먹자”라는 말에 배가 고프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기도 합니다.
순종도 마찬가지입니다. 순종을 행위라고 한다면 그 행위를 하게 하는 동기가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주로 생각하는 순종의 동기는 앞서 잠시 언급했던 ‘의무’ 입니다. 내가 권위 아래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순종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세금이 그렇습니다. 누구도 세금내는 것을 즐거워 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세금을 낼까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더 큰 해를 당하게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혹은 그것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함께 살기 위해 합리적이고 필요한 것으로 생각해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아마 대부분은 그냥 ‘의무니까.’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사실 정부의 입장에서는 무엇이 동기가 되든 관계없이 세금을 내기만 하면 됩니다.
이런 측면에서 순종을 생각할 때 떠오르는 또 다른 흔한 예는 군대의 상명하복 시스템입니다. 군대에서는 상급자가 명령하면 하급자는 그 명령을 따라야 합니다. 항명은 용납되지 않습니다. 왕정 시대의 왕과 신하의 관계도 비슷합니다. 왕은 명령하고 신하는 복종합니다. 여기서 하급자나 신하의 마음이 어떤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가 명령받은 그 일을 했느냐가 중요합니다. 순종을 의무에 측면에서 보면 그것이 당연합니다.
이런 순종의 개념을 성경에 그대로 적용하면 많은 오해가 생깁니다. 구약의 율법은 그저 절대 군주가 백성에게 내린 무거운 법에 불과합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고 괴롭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신약으로 오면 많은 명령이 주어져 있는데, 이들도 구약의 율법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부르시며 그들을 ‘쉬게 하겠다’고 말씀하셨는데(마 11:28), 실제로 그분이 하신 일은 그저 옛 짐을 벗기고 새로운 짐을 지운 것 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또한, 순종의 동기를 의무로만 생각할 경우, 중요한 것은 결과, 즉 무엇을 했느냐는 것입니다. 어쨌든 법을 지키기만 하면 된다고 말할 근거가 생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특히 우리가 잘 아는 바리새인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기 위해 여러 조항을 만들고 그것을 지키면 율법을 지킨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어쨌든 십일조는 했고, 어쨌든 부모님은 공경했고, 어쨌든 하나님은 섬기니까 하나님께 순종하고 있는 것이고 따라서 좋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에 추가해서, 순종이 의무감에 따르는 행위라고 규정하면 그 행위는 언제나 최소한으로 제한됩니다. 굳이 그 이상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찾아 왔던 율법 교사에게서 이런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제가 사랑해야 할) 내 이웃은 누구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눅 10:29). 순종의 범위를 제한하는 질문입니다. 실제로 당시 랍비들은 사랑해야 할 이웃이 있고 미워해야 할 이웃이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정말 성경에서 말하는 순종이 이런 것일까요?
성경에서 말하는 순종에 대한 이해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순종이나 복종의 동기는 당연히 의무감이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순종의 주된 동기는 그런 의무감이나 ‘어쩔 수 없다’는 마음이 아닙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시면서 그들에게 율법을 주시고 그것에 순종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율법을 전달해 준 모세의 말을 주의 깊게 보시기 바랍니다.
신 6:5-6 [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6]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신 10:12-13 [12]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13]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신 11:1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그가 주신 책무와 법도와 규례와 명령을 항상 지키라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것, 즉 순종하는 것과 계속해서 함께 언급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것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모세는 반복해서 강조합니다. 너희가 힘들겠지만 어쩔 수 없이 이런 의무는 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혹은 사회의 안녕과 질서를 위해서 이런 법을 잘 지켜야 한다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너희를 긍휼히 여기시고 사랑하셨으니, 너희도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라고 말합니다. 동기는 사랑이고 그에 따르는 행위가 순종입니다. 어쩔 수 없이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기꺼이 즐겁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 14:15, 21, 23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사도 요한도 아주 분명하게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요일 5:3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앞서 말씀 드린 것처럼 동기와 그에 따르는 행위는 분리될 수 없어서 서로 바꿔서 사용되기도 합니다. 때로는 사랑하라는 명령만 있고 순종하라는 명령만 있을 때도 있습니다. 강조하는 부분은 다르지만 내포된 의미는 동일합니다. 사랑하라는 말에는 그에 따르는 순종이 내포되어 있고, 순종하라는 말에는 사랑 때문에 그렇게 하라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순종입니다.
순종하라는 성경의 명령
성경은 순종하라고 말합니다.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께 순종하라고 합니다. 앞서 생각해 본 순종의 정의를 생각해 본다면 이 명령은 무슨 의미일까요?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이고 그 사랑이 동기가 되어 하나님의 뜻에 기꺼이 따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고민할 것이 이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더 사랑할 수 있을까?”입니다. 둘째는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것인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은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사랑에도 노력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사랑할 만하지 않아서 노력을 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그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해서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에 노력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아야 합니다. 창조의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교회의 역사 속에서, 지금 나의 삶 속에서 드러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바라봐야 합니다. 그분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말씀을 통해 더 깊이 알고 묵상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소아시아 성도들에 대해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라고 말합니다(벧전 1:8). 우리도 그런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먼저 나타났고, 이제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더욱 사랑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삶의 동력이 됩니다.
동력만 있다고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 동력을 잘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만 있다고 해서 자동으로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자신과 자신의 뜻을 드러내셨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드러난 일반적인 원리들이 내 삶에 실제로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지 고민해야 합니다. 그리고 실천해야 합니다.
이 두 가지 노력 사이에서 균형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 사랑하면 순종은 저절로 된다’거나 ‘사랑만 하면 뭐하냐 순종을 해야지’라는 식의 이분법은 성경에서 말하는 순종에 대한 올바른 접근이 아닙니다. 성경은 두 가지를 함께 말합니다. ‘이 전 보다 더’ 하나님을 사랑하여 ‘이 전 보다 더’ 하나님께 순종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