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오해하지 마십시오. 교회에 성실하게 출석하지 않으면 징계할 것이라는 경고의 글이 아닙니다. 저도 조나단 리먼의 책 “교회의 권징”(부흥과 개혁사)을 읽다가 그가 출교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특별히 다룬 10장의 제목 “출석하지 않는 교인”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이것이 과연 ‘교회의 권징’이라는 책에서 다룰 수 있는 죄목(?)인가?”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보통 우리는 교회에서 행해지는 권징이 죄에 대한 형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간음이나 중독, 이단 사상에 빠지는 일 등 중대 범죄로 여겨지는 일이 권징의 대상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것을 징계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너무하다고 생각합니다.

리먼의 설명을 더 들어봅시다. 왜 그는 상대적으로 별일 아닌 것 같은 일을 한 장을 할애하면서까지 다루었을까요?

먼저 그가 정의하는 “징계”(혹은 “권징”)의 개념이 조금 다릅니다.

교회의 권징은 단지 죄를 바로잡거나 휘슬을 부는 게 아니다. 교회의 권징은 교회의 교인들이 정말로 예수님을 옳게 대변하는지 분명히 할 목적으로 죄를 바로잡는 일에 대한 것이다. 교회의 권징은 교회의 교인들에게 자신들이 주장하는 그 존재가 되라고 요구하는 일이다…교회의 권징은 그 신빙성이 의문시될 때 작동하게 된다. 교회의 권징을 움직이는 것은 단 하나의 질문이다. 여전히 교회는 잘못을 저지른 교인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정말로 믿는가? 그래서 기꺼이 계속 공개적으로 선언할 것인가? 짧게 말해서 교회의 권징은 전적으로 땅에서의 예수님의 명성에 대한 것이다. 여기에 달려 있는 게 너무 많다(59-60pp).

리먼의 말에 따르면 권징의 마지막 수단인 “출교”는 단순히 ‘큰 죄를 지었으니 여기서 나가!’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더는 당신을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주의 제자라고 공적으로 선포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권징은 죄를 드러내고, 죄에 대해 경고하며, 죄인을 죄로부터 돌이키도록 구원하는 목적을 갖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지체들이 그 죄에 동참하지 않도록 보호하려는 목적이 있습니다. 출교는 죄인의 죄를 드러내고 그 죄에 대해 경고하며 돌이키도록 많은 노력을 했음에도 죄인이 끝까지 회개하지 않을 때, 그가 더는 다른 지체들과 같은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적으로 인정할 수 없음을 공표하는 것입니다. 

죄인을 돌이키도록 권면하는 일에 소수로 시작하여 교회가 함께 노력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마 18). 그 과정이 요구됩니다. 하지만 끝내 회개하지 않는 자에 대해 ‘이방인과 세리’ 즉 ‘비그리스도인’으로 공표하는 것이 권징의 마지막 단계인 ‘출교’입니다(마 18:17).

자, 이 관점을 가지고 다시 질문에 접근해 봅시다. 계속해서 출석을 거부하는 성도가 있다면 교회는 그를 비그리스도인이라 선포할 수 있을까요?

리먼은 다음과 같은 상황을 예시로 듭니다.

조는 1월에 교회에 등록했는데, 6개월 동안은 들쑥날쑥하게 출석했고 그다음에는 아예 나오기를 중단했다. 출석하는 동안에 그는 교회에 늦게 도착해서 일찍 떠났고, 아무런 관계도 맺지 않았다. 장로 하나가 가까스로 2월에 조와 점심을 먹을 수 있었고, 한 번 더 식사 약속을 잡으려 했다. 그러나 조는 매번 마지막 순간에 약속을 취소했는데, 보통 “직장에 무슨 일이 갑자기 생겼어요. 미안해요!”라는 게 이유였다. 교회에서 조를 아는 사람은 더 이상 없는 것 같았다.

9월에 이르러 그 장로는 6월 이후로 조를 교회에서 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래서 조에게 다시 전화를 걸기로 결심했다. 장로는 음성 메시지를 남겼다. 몇 주 후에 장로는 다른 음성 메시지를 남기면서 이메일도 함께 보냈다. 장로의 메시지에 아무런 답장도 없었다. 조의 모습도 보지 못하고, 목소리도 듣지 못한 채 몇 달이 지났다. 메시지를 한두 번 더 남겼다. 이제 장로는 다른 장로들에게 상황을 설명했고, 장로들 가운데 둘이 조에게 전화하거나 이메일을 보냈다. 몇 번의 장로회의가 있은 후에 조의 이름이 다시 나왔고, 모든 사람이 8개월 동안 조를 보거나 소식을 듣지 못했다는 것에 동의했다. 조는 출교되어야 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그의 죄는 무엇인가?

실화를 바탕으로 제시한 이 예시에서 장로들은 조를 여러 번 만났습니다. 한두 사람, 장로들이 조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조는 끝까지 회개하고 있다는 증거를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구체적으로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4-25)고 명령합니다. 하지만 조는 이를 가볍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가 다른 어떤 문제가 있어서 교회 출석을 꺼리는 것인지도 모릅니다(예로 형제자매와의 문제). 또한, 조의 문제가 간음이나 살인처럼 눈에 보이는 죄는 아닙니다. 하지만 그는 장로들의 끊임없는 노력에도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를 전혀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이 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해야 합니다. 과연 교회는 계속해서 모이기를 폐하고 있는 조가 주를 따르고 있는 그리스도인, 즉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공적으로 선포할 수 있을까요? 

장로들이 조의 이름을 교회 회중 앞에서 꺼내고 아무것도 변하지 않으면 2개월 후에 출교를 제안할 것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그리고 조와 관계를 맺고 있는 성도는 누구라도 조에게 전화하거나 이메일을 보내라고 권하였습니다. 그리고 장로들을 성도들에게 교회의 출석이 왜 그렇게 중요한지 설명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리먼은 이 같은 조치가 적어도 5가지 이유로 유익했다고 설명합니다. 먼저, 여러 단계를 통해 조의 회개를 시험할 시간을 더 주었고(마 18), 조의 친구들이 조의 회개를 돕는 일에 참여하도록 기회를 주었으며, 즉각적으로 출교했을 때 충격이 있을 수 있었는데 그것을 방지했고, 길 잃은 양을 찾기 위해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조치였으며, 마지막으로 회중이 조를 위해 함께 기도할 기회를 주었다는 것입니다.

“교회 오래 출석하지 않는다고 출교할 수 있나요?”라는 질문을 처음 떠올렸을 때 약간의 불쾌함 혹은 불편함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리먼의 설명을 들으면서 우리가 모이기를 힘쓰라는 주의 명령을 이렇게 실질적으로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교회의 장로가 성도를 겸손과 본으로 인도할 때 그들이 모이기를 힘쓰는 신실한 주의 제자가 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힘쓰고 있는지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모든 성도가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지체를 돕기 위해 노력할 기회를 제공하는지, 함께 기도할 수 있도록 권면하는지 상고하게 되었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권징을 형벌이라는 제약적인 개념에 묶어두고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것은 권징하기에 너무 미약한 잘못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교회가 공적으로 선포하는 ‘그리스도인’이 드러내는 그리스도의 명성은 한없이 초라하게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소금이 그 맛을 잃어가는 것이고 차지도 덥지도 않은 미지근한 회중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권징이 사랑의 반대 측면에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이의 반복되는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눈물로 매를 대는 부모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그것을 사랑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주께서 친히 사랑하는 자녀를 채찍질하십니다. 친자식이기 때문에 징계하십니다(히 12:6-10). 그 누가 주를 사랑이 없다고 손가락질할 수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