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한 목사가 여고생을 성폭행한 일이 드러나 사회적으로 큰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특별히 청소년 사역에 주력하던 목사이기 때문에 더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페이스북 친구들이 그 기사를 인용하며 사건에 대한 자기 생각을 올렸습니다. 그들 역시 적잖은 실망을 한 것 같았습니다. 어떤 인터넷 기독교 신문사 기자들이 사건을 범죄로 다루지 않고 실수로 다루어 큰 분노를 자아냈습니다. 

사실 기독교 내에서 이러한 사건이 처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를 분노하게 만드는 일이 기독교 내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언론에 알려지지 않은 참혹한 죄악이 얼마나 많을까요? 과거에 언론이라는 것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을 때, 얼마나 많은 사람이 억울하게 죽고 고통받았을까요? 얼마 전 시사고발프로그램을 통해 알게 된 소록도의 충격적인 비밀은 저에게도 많은 고통을 가져다주었습니다. “하나님, 세상이 얼마나 악한지 모릅니다. 주의 공의와 정의가 하루빨리 이 땅에 온전히 세워지기를 원합니다”라는 진심 어린 기도가 흘러나왔습니다.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자와 그의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사 9:7)

주가 다시 오셔서 정의와 공의를 세우시기 전까지 우리는 죄가 세상에 관영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죄가 깊어지고 많아질수록 우리는 더 주의 오심을 간절히 소원하며 영원히 임하게 될 주의 공의가 지금 이 땅에 임하기를 간구할 수 있습니다. 죄인이 회개하고, 죄의 대가가 요구되며, 상처받고 고통받은 자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임하기를 간절히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여기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피해야 할 한가지 반응에 대해 다루기 원합니다. 죄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반응 중 오늘날 쉽게 발견되는 것으로 성경이 직접 경고하고 있는 또 다른 죄입니다. 결론적으로 분명하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죄에 대한 고발을 위해 죄를 범하는 것은 언제나 옳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공의를 선포하고 정의를 부르짖기 위한다는 명목으로 죄를 선택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아무리 바른 판단 기준을 가진 공의로운 선포라 할지라도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죄에 죄를 하나 더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 4:29)

여기서 ‘더러운 말’은 ‘해로운’, ‘악한’, ‘나쁜’의 의미가 있는 단어로 예수님께서 비유로 설명하실 때 상태가 좋지 않은 열매, 썩은 과실을 가리키며 사용하셨던 단어이기도 합니다(마 7:17; 12:33; 눅 6:43). 존 스토트는 “정직하지 않은 말, 친절하지 않은 말 혹은 저속한 비어 등 듣는 사람을 다치게 하는 말”이라고 설명합니다(존 스토트, 에베소서:Bible Speaks Today, 188p). 피터 오브라이언은 바울이 여기서 “금지한 말은 어떤 종류가 되었든 다른 이에게 상처가 되는 말로 욕설, 저속한 언어, 비방, 경멸하는 말 등이 포함된다”고 말합니다(피터 오브라이언, 에베소서: Pillar New Testament Commentary, 344p).

더러운 말은 성령을 근심하게 합니다(엡 4:30). 성령은 신자의 구원을 확증하시며 인치시는 분이신데 이 같은 말은 구원의 목적과는 거리가 멉니다. 구원받은 자가 해야 할 행동이 아닙니다. “더러운 말”은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과 함께 버려야 할 죄입니다(엡 4:31).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

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그러므로 그들과 함께하는 자가 되지 말라(엡 5:3-7)

어떤 사람은 예수님도 외식하는 종교 지도자들을 혹독하게 꾸짖으셨다고 말합니다. “독사의 자식”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말입니다. 먼저, 우리는 예수님이 아닙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은 신학적으로 충격적이며 직설적이고 강력한 표현이었지만 표현 그 자체가 저속하거나 경멸하는 욕설이 아니었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을 본받기 원하신다면 다음 구절을 참고해보십시오.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엡 5:1-2)

저는 여기서 모든 종류의 비판에 대해 제동을 거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선포되어야 합니다. 죄를 죄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마 14:4). 선지자들은 성령의 감동 하심으로 백성을 착취하고 죄악으로 인도하는 이스라엘 정치 지도자들을 강력하게 비판합니다.

하지만 빛과 어둠이 함께 사귈 수 없는 것처럼 진리를 선포하기 위해 죄를 범할 수는 없습니다. 죄를 밝히 드러내고 그것에 대한 정의로운 판결을 내리며 주의 공의를 선포하기 위해 죄를 택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성령이 근심하는 일이며 신자의 구원을 인치신 성령께서 감동하심으로 기록하신 말씀으로 금하신 일입니다. 그것은 죄인이 좋아하는 일이며 분노와 악독과 비방의 죄와 동일 선상에 있는 죄입니다. 불순종의 아들들의 언어로 진리를 담아낼 수 없다는 말입니다.

죄에 대한 공분이라고 말하지만 “더러운 말”은 남이 범한 죄에 나의 죄를 추가할 뿐입니다. 

우리가 죽기까지 따르기 원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부정과 부패로 멸망했다고 말하는 로마정부 아래서 사셨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고 황제의 교만하고 이기적인 정치로 백성들이 말로 할 수 없는 고난을 겪었습니다. 특히 속국인 이스라엘은 극심한 고통 가운데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예수님은 창조주의 권세와 전능자의 주권을 가지신 거룩한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분은 이 땅에서 공의와 정의를 외치셨습니다. 그러나 악독과 분냄과 노함과 비방과 떠드는 것으로 선포하지 않으시고 자기의 생명을 버리시는 사랑으로 십자가 위에서 최고의 사랑과 공의를 동시에 이루셨습니다. 그분의 입에서는 단 한마디도 거짓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더러운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벧전 2:22).

세상은 참 악합니다. 듣는 순간 공분을 격렬하게 일으키는 뉴스가 하루에도 몇 번씩 올라옵니다. 주가 오셔서 완전한 공의를 세우시는 날까지 인간에 대한 실망은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죄에 대한 신자의 반응은 중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빛과 소금된 자로 이 땅에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많은 핍박과 손가락질을 감수하면서 동성애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담대하게 외치는 이유입니다. 더 많은 영역에서 죄에 대한 하나님의 기준이 선포되어야 합니다.

진리를 선포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리고 진리를 어떻게 선포하는가도 중요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드러내야 할 빛은 진리 되신 하나님의 빛이며 동시에 아름다운 덕을 지니신 하나님의 빛이기 때문입니다. 더러운 세상에 진리의 빛을 비출 수 있지만 더러운 말로 비출 수는 없습니다.

욕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더 자극적이고 저속한 단어로 속 시원하게 내뱉는 말은 세상 사람들도 누구나 쉽게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속한 곳에서 그들이 살아온 방식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난 분들에게 권면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옛사람이 분노와 성냄과 악독으로 우리를 미혹하여 자연스럽게 더러운 말을 우리 입 밖으로 꺼내려 해도 우리의 구원을 확증하고 계신 성령의 소욕에 우리 마음을 드려야 합니다. 그분의 통제를 받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역사하시는 그분은 절대로 그리스도의 본을 벗어난 말을 우리 입 밖으로 내는 것을 원치 않으실 것이라 확신합니다. 그래서 그분의 영감으로 쓰여진 바울의 서신으로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진리의 영이신 그분이 우리를 통해 진리를 세상에 선포하십니다. 하지만 거룩한 영이신 그분은 절대로 더러운 말을 통해 역사하지 않으십니다. 

페이스북 종교란에 기독교라고 쓰는 것을 포기하든지 아니면 포스팅하는 글에 더러운 말을 적지 않든지 둘 중 하나만 하십시오. 두 가지를 함께 하면서 이 땅에 참사랑과 공의를 선포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증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