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한 성도님이 제게 물었던 질문입니다. 사실 이런 종류의 질문을 종종 받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영화를 봐도 좋은가요? 이 소설을 읽어도 괜찮은가요?

그리스도인이 이런 사상을 가진 뮤지션의 음악을 들어도 되나요?

그리스도인이 불교재단에서 만든 음료나 과자를 먹어도 되나요?

저 스스로도 이런 고민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떠올리는 말씀이 있는데 바로 고린도전서 10장 23절의 말씀입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1. 모든 것이 가하다(Everything is permissible)

“모든 것이 가하다”는 것은 이런 종류의 질문에 극단적으로 답하는 것을 피하게 해주는 원리입니다. 락음악은 사탄의 음악이니 피해야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CCM은 교회를 병들게 하고 망치는 마귀의 음악이라고 말합니다. 특정 음악 장르가 하나님의 특별한 속성을 제대로 담아내기에 무리가 있어 신중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은 이해할 수 있지만 그 음악 장르 자체가 악하고 더러운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만일 혜민스님의 책이 절대 읽지 말아야 할 악한 책이라면, 불교는 아니지만 불신자로서 하나님을 거절하고 자기 소욕대로 살면서 글을 쓰는 유명한 문호들의 책들도 악한 책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모든 종교를 수용하였던 생텍쥐베리의 “어린왕자”도 금서가 되며 기독교 배경이 조금도 없는 한국 고전 문학들 역시 읽지 말아야 할 책에 포함되야 할 것입니다.

만일 이단을 지지하는 회사에서 만든 음식을 먹지 말아야 한다면, 동성연애를 지지하는 CEO와 그 기업이 만든 스마트폰은 어떤가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가 만든 TV나 냉장고, 자동차는 어떤가요? 모든 드라마, 영화가 악한 것이라면 기독교 영화는 어떻습니까? 만일 기독교 영화나 드라마가 잘못된 메시지를 선포한다면 어떨까요?

우리는 스스로 만들어낸 극단적인 규율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합니다. “모든 것이 가하다”는 원리는 불필요한 판단과 정죄로 부터 우리 자신을 보호해줍니다. 나 스스로의 양심을 과도하게 누르거나 다른 이의 삶을 억압하지 않게 만들어줍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금하신 것에 대해서는 이 원리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예외가 있지만 대부분 이런 종류의 질문들에 먼저 우리는 “모든 것이 가하다”는 원리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바로 뒤 이어 다음의 원리를 생각해야 합니다.

 

#2.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다(but not everything is beneficial)

어떤 사람은 영화는 영화이고 음악은 음악일뿐이라고 말합니다. 예술은 객관적으로 그 가치를 평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개인의 선호도와 취향에 따라 주관적으로 분별되는 것일뿐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유익에 대해 평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유익에 대해 반드시 평가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먹는 음식이 몸에 좋은 것인지 신중하게 살피는 것처럼 내 영혼이 섭취하는 문화에 대해 진지하게 고려해야 합니다. 해롭다면 먹지 않는 것이 더 유익합니다.

빈약한 진리나 잘못된 내용을 담고 있는 음악이 있다면 주의해야 합니다. 아름다운 사랑노래 전부를 듣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사랑이 인생의 전부이며 그 사랑이 채워지지 않으면 죽는 것이 낫다고 말하는 노래가 유익하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사랑하기만 한다면 내 모든 것을 내어주고 성적 욕망도 채워주겠다고 말하는 노래를 유익한 것으로 평하기는 어렵습니다.

하나님을 절대 부인하는 내용이 담긴 영화나 성경의 메시지를 왜곡하는 드라마를 유익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혜민스님이 들려주는 지혜로운 명언들을 즐거워할지라도 그 메시지 안에 담겨진 비성경적인 철학과 사상까지 다 유익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반성경적인 사상에 대해 틀렸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비그리스도인이 만든 제품이나 식품을 구입하는 것 그 자체가 죄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직접적으로 이단사상을 퍼뜨리는데 필요한 자금을 모으기 위해 판매하는 상품을 사는 것도 “가하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우리는 신중하게 고려해야 합니다. 보고 듣고 접하는 모든 것들이 영적으로 참된 것인지, 유익한 것인지, 선하고 거룩한 것인지 판단해야 합니다(빌 4:8-9). 그것에 유익이 있더라도 과하게 섭취할 때 부작용이 생기는 것을 알고 먹는 것처럼, 우리가 유익을 얻기 위해 접하는 것들에 대해서도 그것이 담고 있는 해로운 점들을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대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계속해서 비성경적, 반성경적 사상을 함께 받아들이게 된다면 혜민스님의 지혜로운 명언들도 결국 독이 될 것입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고전 6:12)고 말합니다. 무엇이든 얽매이고 있다면, 즉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다면 대부분 유익하지 못한 것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성경을 기준으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온전하게 하는 일에 유익이 되는지 고려해야 합니다. 모든 선한 일을 행하는데 있어서 내가 접하는 것들이 어떤 유익을 주는지 또 어떤 해를 주는지 잘 알아야 합니다. 베드로는 소아시아 교회가 진리에서 멀어지게 하는 모든 것에 미혹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굳센 데서 떨어질까 주의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게 하는 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벧후 3:18)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지식, 성경이 말하는 진리, 그것이 우리가 접하는 모든 것이 우리의 굳센 믿음에 주는 유익을 판단할 수 있도록 도울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봅시다.

이 영화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에 어떤 유익을 주는가?

이 소설은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이해하는 데 어떤 유익을 주는가?

이것은 내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는 일에 어떤 유익을 주는가?

 

#3.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다(but not everything is constructive)

교회가 불러낸 “무리”라는 사실은 중요합니다. 우리는 개인적인 삶을 살아가지만 교회의 지체로 한 몸을 이루어 살아갑니다. 그래서 세번째 원리를 고려해야 합니다. 그것은 “나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가?”의 질문을 넘어선 “내 형제에게 유익이 되는가?”입니다.

락 음악을 듣는데 전혀 양심의 가책이 없고 담고 있는 내용에 해롭거나 비성경적인 요소가 없고 나 자신에게 유익을 준다고 생각하여 즐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다른 형제를 실족시킨다면 어떨까요?

바울은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 말합니다(고전 10:24)

더 나아가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고 말합니다(고전 8:13)

이 말은 누군가 나의 취미생활을 불편해할지도 모르니 그들에게 다 물어본 뒤에 모두가 허용할때만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내가 어떤 책을 읽는 것을 혹시 누군가가 불편해할지도 모르니 웬만하면 성경 말고는 아무것도 읽지 말라는 말도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10장의 말씀을 통해 어떤 상황에서 주어진 명령인지 알 수 있습니다.

불신자 중 누가 너희를 청할 때에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 놓은 것은 무엇이든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거든 알게 한 자와 그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 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고전 10:27-29)

예를 들면 혜민스님의 책을 읽는 것의 장점과 단점을 충분히 고려하고 유익을 위해 읽고 있는 형제가 있는데 누군가가 그것을 불편해 한다는 것을 알면 그 사람 앞에서 그것을 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 앞에서 그 책의 내용을 인용하여 말하거나 그 책을 추천하거나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른 형제 자매의 양심을 충분히 고려하여 행동하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자들은 더 주의가 필요합니다. 공적인 곳에서 가르칠 때 특정 영화나 드라마, 소설이나 유명인의 말들을 사용하는 것은 불특정 다수의 양심과 연결된 문제를 낳기 때문입니다. 세상 드라마와 영화를 멀리하는 형제에게는 그것을 인용했다는 것자체가 유혹이 되거나 판단거리가 될 수 있습니다. 설교자는 예수님과 사도들이 그러했듯 일반적인 예시나 성경의 예시를 사용하여 진리를 전달하는 것이 이부분에 있어서 덕을 세울 수 있는 지혜로운 방법입니다.

지금까지 원리를 정리하면 모든 것이 가하지만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며 또 모든 것이 내 형제 자매에게 유익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한 가지 중요한 원리가 남았습니다.

 

#4.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Do it all for the glory of God)

세 가지 원리를 생각해보면 혜민스님의 책을 읽는 것은 첫째로 가한 일입니다. 둘째로 유익한 부분이 있지만 동시에 해로운 부분도 있습니다. 셋째로 양심에 어려움이 되는 형제 자매들 앞에서 주의해야 할 일입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왜 기독교 안에 수많은 현자와 신실한 성도의 간증과 저서가 있는데 혜민스님의 책을 읽어야 하는가?”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사람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추구하면 할 수록 세상의 지혜와 유익에서 멀어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영화를 보는 것이 죄는 아닙니다. 유익한 영화를 통해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음악을 듣는 것도 죄가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에 사로잡힐수록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 외의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여기게 될 것입니다. 우선순위가 바뀝니다. 추구하는것이 점점 달라집니다. 유익을 평하는 기준이 점점 그리스도를 닮아갑니다.

영화를 보는 것보다 말씀을 읽는 것을 사모하게 될 것입니다. 세상 음악을 듣는 것보다는 찬송을 듣고 부르는 것을 추구하게 될 것입니다. 혜민스님의 책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사모하게 될 것입니다. 다른 것들이 무가치하거나 전혀 유익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더욱 더 추구할수록 우리는 그분과 관련된 순수한 가치와 아름다움을 담고 있는 것을 찾게 될 것입니다.

천국에 영화가 있을까요? 천국에 남녀간의 사랑을 노래하는 음악이 있을까요? 천국이 노래하는 대상은 오직 하나님 한분일겁니다. 천국에서 영원히 나눌 이야기는 하나님의 사랑이야기(구속이야기)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관계를 친밀하게 만들기 위해 데이트를 할 때가 있습니다. 영화를 볼때도 있고 책을 함께 읽을 때도 있으며 음악을 들으며 보드게임을 하기도 합니다. 다른 모든 것은 수단이며 도구에 불과합니다. 그 모든 것을 통해 저는 아내를 더욱 사랑하기 원합니다. 아내가 싫어하는 영화를 고르지 않습니다. 영화를 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함께 그것을 보는 것으로 유익을 누리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아내가 힘들어하는 음악을 듣지 않습니다.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추구하는 것은 더 재미있는 영화, 더 유쾌하고 세련된 음악, 나의 상상력과 감성을 만족시키는 책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더 짜릿한 오락을 찾는 것도 아닙니다. 그 모든 수단을 통해 아내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올바른 질문은 “어떤 영화를 볼까? 어떤 음악을 들어도 될까? 어떤 책은 읽어도 되는 것일까?”가 아니라 “이 영화가, 음악이, 책이 아내를 사랑하는 것에 어떻게 유익이 될까?”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은 날마다 하나님의 영광을 더욱 더 추구해야 합니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주 우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접하는 것들이 우리 주님을 더 사랑하고 그 영광을 더 추구하는 일에 어떤 유익을 주는지 잘 고려해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그래서 혜민스님의 책을 읽지 않습니다. 오랜 묵상과 특별한 지혜가 담긴 어록들이 무가치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유익한 교훈을 제시할 때도 있습니다. 성경의 원리와 동일한 목소리를 내는 명언들도 있습니다. 반대로 불교사상이 담긴 내용과 비기독교, 반성경적 사상을 담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말씀의 진리로 분별해서 받을 것은 받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다른 형제 자매님들을 실족시키지 않도록 조심하면서요. 하지만 저는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기 원합니다. 그리스도를 더욱 사랑하기 원합니다. 그래서 동일하게 주의 영광을 위해 헌신하며 삶을 바쳐온 사람들의 간증을 듣기 원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무런 왜곡 없이 그대로 보여주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기 원합니다. 성경을 연구하고 묵상한 사람들의 지혜로운 책과 글들을 읽기 원합니다.

오렌지가 있는데 오렌지 향이 첨가된 탄산음료를 먹을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와 동일한 향을 내는 부분만 골라 읽어야 하는 책보다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게 하는 항상 있고 살아있는 진리의 말씀을 읽는 것이 더 유익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아름다운 영광을 흉내낸 음악이나 영화보다 그분의 영광 자체를 노래하고 비추는 진리를 맛보는 것이 더 유익하지 않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은 날마다 더 그분의 영광을 사모해야 합니다. 날마다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살아야 합니다. 천국은 그분을 마침내 소유하게 되는 우리 인생의 최종 목적지입니다.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는 삶은 날마다 지속되야합니다. 신령한 젖처럼 말씀을 사모하여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야 합니다.

그러니 이와 유사한 질문이 떠오를때마다 생각합시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이것들을 할 수 있는가?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길에 이것이 필요한가? 유익한가? 덕이 되는가? 모든 것이 가하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들을 그분을 향한 감사와 찬양으로 누리는데 있어 이것이 도움이 되는가? 어떤 유익을 주는가? 주를 닮아가는 삶에 어떻게 유익을 주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