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심판에 대한 이야기는 사람들이 환영할 만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다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사람들이 민감해할 수 있는 이야기는 하지 않고, 예민한 부분은 건드리지 않는 것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어려움 없이 지내는 처세술의 기본으로 받아들여집니다. 불편한 것들은 피하고, 되도록 사람들이 듣기 좋아하는 소리만 하는 것, 다른 사람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는 것이 최고의 가치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바울은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말하라고 권면합니다(엡 4:15). 우리는 상대방을 사랑하기 때문에 진실을 말하고,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을 볼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특별히 죄와 심판에 대한 이야기가 그러합니다. 상대방의 죄를 스스로 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 그리고 그 죄에 대해서 심판이 있다는 이야기는 사람들이 환영할만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좋은 것들만 말해도 시간이 넉넉하지 않은데, 왜 굳이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는가’ ‘왜 사람들이 싫어하는 이야기를 꺼내서 쓸데없는 문제를 일으키려고 하는가’ 또는,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어서 자신이 믿는 것을 강요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냐’ 어떤 사람은 ‘지금 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든데 왜 그런 이야기로 자신을 괴롭게 하느냐’고 불평을 합니다. 오늘날의 사회풍조가 그러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불편한 이야기는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쉽게 말하면, 싫은 소리를 듣고 소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잃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 밖에서는 물론, 교회 안에서도 그러합니다. 교회가 갈수록 이 주제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불편해합니다. 사람들의 기분을 나쁘게 만들까, 사람들이 싫어하면 어떻게 할까, 걱정합니다. 그래서 긍정의 힘을 말하고, 이 땅에서의 축복과 안녕을 우선시하며, 그것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에게 어려움을 줄 수 있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랑에 대해서 생각하기를, 어떻게 해서든 상대방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지 않는 것으로 오해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상대방이 듣기에 좋은 것만 말하는 것이 사랑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구약의 거짓 선지자들이 그렇게 했습니다. 그들은 왕이 듣고 싶어 하는 거짓을 예언했습니다. 진짜 사랑은 상대방에게 진실을 말할 수 있는 것이고, 때로는 그 진실을 말하는 것에 대한 불편함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실은 언제나 사랑을 담아서 말해야 합니다. 사랑 안에서 전달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내가 하고 싶은 말이기 때문에, 내 마음이 답답해서, 내 유익을 위해서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정말 필요한 말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상대방에게 유익이 되는 말을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진실이 때로는 가슴 아픈 이야기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의사가 환자를 진단했는데, 심각한 병에 걸렸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이 진실이 환자에게 안 좋은 소리이기 때문에, 부정적인 이야기이기 때문에 사실대로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어떨까요? 병에 대해서 숨기고 그냥 괜찮다고 긍정적인 이야기만 하는 것이 사랑의 행동일까요? 과연 어떤 사람이 이런 의사에 대해서 사랑이 많은 의사라고 칭찬하며 진찰을 받으려고 하겠습니까?

또 다른 예로, 깊은 밤에 당신이 단잠에 빠져있는데 바깥에서 어떤 사람이 소리를 지르면서 당신의 잠을 깨운다면 그 소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당연히 불쾌한 생각이 들 것이고, 그리고 한 밤중에 시끄럽게 떠드는 그 사람에 대해서 안 좋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 소리를 환영할 만한 소리는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시끄러운 소리가 불이 났음을 알리는 소리라면 어떻겠습니까? 그 소리를 지른 사람은 소방대원이고, 당신이 그대로 있으면 지금 번지고 있는 불에 의해서 당신의 생명이 위태로울 수 있는 그런 위급한 상황이었다면 어떻겠습니까? 그 소리에 대해서 당신은 짜증을 내면서 그래도 그렇게 밤중에 시끄럽게 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하겠습니까? 사랑이 없는 무례한 행동이라고 하겠습니까?

물론, 상대방이 듣든지 안 듣든지 관계없이 시끄럽게 진실을 말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길거리에 나가서 확성기를 들고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쳐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상대방이 들을 수 있도록 지혜롭게 ‘진실’을 전해야 합니다. 이 진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아직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 그들의 결국이 어떻게 될지, 그리고 그 심판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를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을 정말 사랑하기 때문에 이러한 진실을 말하고 있음을, 그들이 오해 없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한 사랑이 충분히 전달되도록 합당한 태도로 전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심판은 분명히 불편한 이야기이고, 사람들은 지옥에 대해서 생각하기를 싫어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지옥이 존재한다는 것이고,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지옥에 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토록 형벌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사실에 대해서 경고하는 것은 사랑이 없는 행동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에서 나오는 행동입니다. 정말 사람이 가서는 안 되는 곳이 지옥입니다. 그곳은 영원한 슬픔과 괴로움만이 있는 곳입니다. 그곳은 하나님의 은혜를 조금도 경험할 수 없는 곳입니다. 영원한 형벌만이 있는 곳입니다. 끝이 없는 시간을 후회하며 보내야 하는 곳입니다. 영원한 형벌의 장소입니다.

우리가 이 영원한 심판에 대해서, 사람들이 불편해할 수 있는 이 진실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을 때, 우리는 다른 사람에 대해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아직 믿지 않는 자들에 대해서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며, 그들을 위해 수고하며 기도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이 사실을 분명히 기억한다면 믿는 자로서 내가 받은 은혜에 대해서 감사할 것입니다. 영원한 멸망으로 달려가던 나를 주님께서 불쌍히 여기셔서 그 길에서 돌이키게 하셨습니다. 영원한 심판에서 건지심으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자격 없는 자에게 베풀어진 은혜에 대해서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 영원한 멸망에서 건짐을 받은 사실에 대해서 참으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에 대한 감사의 동기가 되며 우리가 가지고 있는 소망의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 누구보다도 많이 이 불편한 진실에 대해서 말씀하시며 경고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이 진실을 아는 자로서, 나 자신을 돌아보며, 내 주위에 있는 믿지 않는 자들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그 심판의 무서움을 기억한다면 그곳에서 우리를 건지신 그리스도께 감사하게 될 것이며, 죄에 대해서 더 민감하게 경계하며 조심할 것입니다. 그리고 아직 믿지 않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