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교회가 겪는 하나의 현상 중 하나는 시즌제 성도가 늘어간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중학생부터 대학생까지의 교인 중 중간고사, 기말고사, 모의고사, 학원수업, 취업준비, 자격증 준비, 프로젝트, 졸업작품, 조별과제 등의 이유로 교회를 빠지는 것이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늘어갑니다. 그래서 시험 기간에는 교회에서 볼 수 없고 시험 기간을 마치면 교회에서 볼 수 있는 시즌제 성도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과거보다 학교에서 요구하는 것이 늘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과거보다 더 취업이 어려워진 탓일까요? 매일 해내야 하는 학업이 부담스러워서 그리고 등록금을 위해 주 중에 일을 병행해야 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남들보다 더 좋은 성적을 얻기 위해, 조건이 좋은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 시즌제로 교회에 출석하는 것이 불가피해진 환경의 탓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유가 무엇이든지 또 그것이 공감할 수 있는 이유일지라도 결과적으로 “모이는 일”은 우선순위의 가장 밑바닥으로 떨어진 것이 사실입니다. 

언제든 과제가 부담스러우면, 시험준비를 충분히 하고 싶으면, 프로젝트를 잘하고 싶으면 일 순위로 접어둘 수 있는 것이 “모임 참석”이 되었습니다.

물론 교회에 참석하지 못해서 느끼는 죄책감이나 부담감이 있지만, 그것을 “죄”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기말고사 기간에 교회를 빠지는 것이 죄인가?”라는 질문에 “그건 아니다”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단순히 모이는 날 모이는 장소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죄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중심이지 형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유가 뭐가 되었든 교회 참석 안하면 죄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 중심을 제대로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성도들을 권면합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5)

당시 교회에 습관적으로 모임에 나오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some are in the habit of doing). 히브리서 기자는 그들을 가리켜 “모이기를 폐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이들은 모임에 나오지 않는 것을 하나의 관습처럼 당연히 여기고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그런 패턴을 보였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들과 같이 “하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그것은 옳은 모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마땅히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서로 권하며 모이기에 힘써야 한다는 것이 이 구절의 핵심입니다. 여기서 “그날”은 37-38절에 언급된 것처럼 “주가 다시 오시는 날”입니다.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히 10:37-38)

히브리서는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자들이 그들이 가진 믿음 때문에 겪는 수많은 시험과 고난 중에 신앙을 버리게 될 것을 염려한 저자의 염려가 강력하게 드러나는 서신서입니다. 저자는 계속해서 기독교가 유대교보다 위대한 사실을 비교하며 설명합니다. 

“어린양의 피로 한시적으로 정결하게 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은 영원히 우리의 죄를 씻어낼 수 있다”
“우리에게 위대한 대제사장, 자기 자신을 위해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는 영원한 대제사장이 계신다”

모이기에 힘써야 한다는 권면 역시 그 “큰 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내용 중에 등장하는 권면입니다(10:19-22). 성도는 이 소망을 굳게 잡고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해야 합니다(10:23-24). 당시 그들이 모이기 위해 감당해야 하는 억압, 조롱, 핍박은 오늘날의 그것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사회적 문화적 억압과 비방이 있었고 심각한 지역에서는 육체적 핍박도 있었습니다. 특별히 유대인들은 기독교를 선택하면서 사회적으로 격리되고 모든 도움과 자원으로부터 제외되며 유대인들의 무리에서 축출당했습니다. 그래도 모이기에 힘쓰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고난이 극심하여 그들의 소망을 흔들수록 더 모이기에 힘써 소망을 붙들라는 것입니다. 서로 권하여 굳게 세워주라는 것입니다.

소망의 주가 곧 오십니다. 그분이 오시는 날에 아무도 뒤로 물러난 신앙을 갖지 않고 사랑과 선행을 나누며 주 오심을 기다리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모입니다. 우리가 가진 소망을 굳게 잡기 위해서, 서로 만나서 돌아보기 위해서, 서로의 삶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기 위해서, 주가 오시는 그 날이 다가올수록 더 모이기에 힘써야 합니다.

주 오심의 가까움은 날마다 더 드러나고 있습니다. 세상은 더 악해지고 혼란스러워집니다. 우리가 가진 소망을 지켜내기가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절대 진리의 말씀을 인정하는 것이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도덕적, 윤리적 타락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모이기를 점점 폐하고 있습니다. 습관적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과거와 달리 썩어질 세상에서의 지위와 명성을 위해 모이기를 폐합니다. 그들의 믿음이 퇴보하게 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한 두번 급한 일로 끼니를 걸러도 괜찮지만 습관적으로 끼니를 거르는 일은 결국 건강에 중대한 문제를 가져옵니다.

물론 공부하는 것도 주의 영광을 위해 하는 것입니다. 교회라는 장소에 오지 않아도 내가 있는 그곳에서 나는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찬송을 부르고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주가 허락하신 곳에서 주어진 일에 충성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습니다. 율법적으로 주일이나 토요일 집회 시간에 교회라는 장소에 있지 않은 것에 대해 지적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현재 내가 습관적으로 모이는 것을 폐하고 있지 않은지 돌아봐야 합니다. “모이기를 힘쓰라”는 성령의 계시를 들었음에도 그것보다 이것을 택하는 것으로 하나님께 더 큰 영광을 돌릴 수 있어서 그리하는 것인지 동기를 점검해봐야 합니다. 나의 지체된 성도에게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 일 대신 선택한 그것이 다시 오실 주님께서 더 칭찬하실 일인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모이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여긴 그 일이 주 안에 있는 소망을 더욱 굳게 잡는 일에 도움이 되는지 아니면 오히려 소망을 움직이게 하는 것인지 진지하게 따져봐야 합니다.

‘지금은 중간고사 기간이니까, 기말고사 기간이니까, 시험을 준비 중이니까, 취업을 준비하고 있으니까… 이것만 지나면 더 열심히 주를 섬기겠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문제는 주가 “잠시 잠깐 후”에 오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소망을 굳게 잡으십시오. 오늘 서로 돌아보는 일에 힘씁시다. 오늘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오늘 모이기에 힘쓰는 자가 됩시다.

오늘 내가 “모이기에 힘쓰라”는 주의 명령보다 다른 것을 우선순위에 두는 사람이었다면 내일의 내가 주를 더 우선순위에 두는 자가 될 것이라는 소망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계속해서 습관적으로 망가진 우선순위를 가지고 살고 있다면 대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직장인이 되었을 때부터는 올바른 우선순위를 가진 사람으로 변화될 것이라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을까요? 더 나아가 계속해서 믿음이 아닌 보이는 것을 추구하며 산다면 “뒤로 물러난 자”로 발견되어 하나님이 그 마음에 기뻐하지 않으실 수 있다는 경고의 말씀에서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우리는 뒤로 물러나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히 10:39)

당신의 삶은 이 진리를 거듭 보여주고 있습니까? 당신이 모임에 참석하는 모습은 당신이 뒤로 물러나 멸망할 자가 아니라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라는 사실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