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번 주 “신앙과 섬김”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들은 말씀을 실천하기 위한 실습을 하듯 두 시간 동안 함께 교회 뒤뜰에서 비닐 작업을 하였습니다. 수고로운 일이었지만 많은 성도가 함께 나와 봉사하고 섬기는 일은 참 행복하고 유익한 일이었습니다.

오늘은 우리가 함께 듣고 실천했던 “섬김”에 대해 조금 더 알아보는 시간을 가지려 합니다. 이 칼럼을 통해 “섬김”에 대한 생각이 성경의 바른 교훈으로 올바르게 우리 마음에 심어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먼저, 섬김은 예배입니다

예배의 개념을 만찬 예배로 제한하는 경우가 종종있습니다. 물론 주께서 직접 부탁하신 성찬을 통해 주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일은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고전 11:17-34). 하지만 그것만이 예배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넓게는 우리의 삶 전체가 영적 예배입니다(롬 12:1-2). 회중이 함께 모일 때 드리는 예배의 방편에는 성찬 외에도 찬송시, 가르치는 말씀, 계시, 방언, 통역 등이 있었습니다(고전 14:26). 같은 맥락에서 성도가 각자 성령의 뜻대로 받은 은사를 가지고 서로를 섬기는 것 역시 예배입니다(고전 12-14장).

“예배”(worship)라고 번역된 원어를 살펴봐도 “섬김”이 예배라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신약성경에 “예배”를 가리키는 데 사용된 라트레오(λατρεύω)는 “섬기다”(serve)라는 뜻을 가졌습니다(빌 3:3; 히 9:9; 10:2).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worship”)…(빌 3:3)

구약성경 역시 아바드(עבד)라는 단어가 “예배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될 때가 있었는데 이 단어의 본래 뜻 중 하나가 “섬기다”입니다. 대표적인 성경구절로는 신명기 6장 13절이 있습니다(참고. 출 3:12; 12:31; 시 2:11; 사 19:21; 렘 35:15).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를 섬기며(“worship”) 그의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

 

둘째, 섬김이 예배라면 그 대상은 하나님입니다

예배의 범주가 우리의 모든 삶까지 확장 된다면, 우리의 일차적인 섬김의 대상은 참으로 다양해집니다. 불신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 안에는 정치 지도자들(롬 13:1-7), 육신의 주인들 혹은 직장 상사들(벧전 2:18-25), 믿지 않는 남편이나 아내(벧전 3:1-7)가 있습니다. 우리의 섬김의 대상이 성도일 수도 있습니다(고전 12-14; 벧전 3:8-12). 이처럼 우리가 섬기는 일차적인 대상은 다양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모든 예배는 한 대상인 하나님에게 향합니다.

우리는 각각 상황에 따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 그들을 섬겨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든 섬김의 궁극적인 목적이며 그것이 바로 예배의 최종 목적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특별히 교회 안에서 우리는 각자 받은 은사를 통해 서로를 섬길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가르치는 일로, 어떤 사람은 봉사의 일로, 어떤 사람은 권면하고 세워주는 일로 섬깁니다. 섬기는 모양은 다양하지만 그 궁극적인 목적은 같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는 것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

 

셋째, 섬기는 대상이 하나님 한 분이라면 섬기는 자는 서로 판단할 이유가 없습니다

설교하는 사람이 상이 많을까요? 아니면 애찬 준비하는 사람이 상이 많을까요? 이는 마치 밭일 하는 노예가 상이 많은지 아니면 집안일 하는 종이 상이 많은지에 대한 질문처럼 어리석게 들립니다. 모두가 주인의 종이며 주인의 유익을 위해 일하는 것뿐입니다. 둘 다 “무익한 종”이라 고백하면서 ‘나는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 뿐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당연합니다(눅 17:10).

맡겨진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뿐입니다(고전 4:2). 설교자는 설교자로서 주가 주신 은사를 가지고 최선을 다해 말씀을 가르칩니다. 그것이 성도를 섬기는 일이며 궁극적으로 주인되신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는 일입니다. 애찬을 준비하는 사람 역시 그 일을 통해 성도를 섬깁니다. 그들의 땀과 수고로 성도가 따뜻한 밥을 먹고 교제를 나눌 수 있습니다. 그들의 봉사는 결국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시설관리를 위해 충성을 다하는 분이 계시고, 교회 차 운행으로 수고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노인사역에 힘쓰는 분이 계시고, 구제와 선교에 힘을 모으고 기도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누가 더 가치 있는 일을 하고 누가 덜 가치 있는 일을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충성스럽게 일하는가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섬기는 일에 있어서 우리는 그 대상이 하나님이라는 분명한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슨 일로 섬기는가에 대해서는 우리 스스로의 기준을 갖지 않아야 합니다. 서로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구체적으로 두 가지 우리가 피해야 할 자세가 있습니다. 먼저는 내가 하는 일에 대한 교만이고 다음으로는 다른 사람이 하는 일에 대한 괄시입니다. 예를 들어 설교자가 ‘나는 저 초라한 화장실 청소따윈 할 수 없다’라고 말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하는 일에 대한 무시이며 자기 자신이 맡은 일에 대한 교만입니다. 반대로 화장실을 청소하는 성도가 ‘저 설교자는 맨날 설교만 하려고 하고 화장실은 청소하려고 하지 않아’라고 비방한다면 그 역시 동일한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고 있는 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었다면, 그리고 그 일에 충성스러운 종이 되어 하나님의 칭찬을 얻는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 아닙니까? 진실로 그는 자기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하찮다고 여긴 것이며, 실제로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성도가 설교하는 일에 충성을 다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자기 일을 하찮게 여기고 있다고 간주하고 비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 가운데 하찮은 것은 없습니다. 모든 섬김의 대상이 가장 고귀하고 존엄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섬긴 일에 대해 칭찬을 받게 될 것입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말을 듣게 될 것입니다(마 25:21). 우리는 선하고 충성된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일들에 충성하고, 선한 마음으로 서로를 섬기는 자가 되야 합니다. 각자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 비교하고 판단하는 것은 악한 종이 하는 일입니다. 그는 다른 이들의 달란트를 보고 비교하며 분노하면서 정작 자기에게 맡겨진 것에 충성을 다하지 않았습니다.

 

넷째, 한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그들이 받은 은사들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성령의 뜻대로 받은 은사로 그들은 서로를 섬겼고 그것이 곧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보통 “섬김”이라고 할 때 손과 발로 하는 봉사만을 생각합니다. 쓸고 닦고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는 것만 “섬김”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고린도전서 12-14장 말씀은 수많은 섬김의 방편들이 나옵니다. 가르치는 말씀과 지혜의 말씀도 포함됩니다. 봉사도 포함됩니다. 심지어 “서로 돕는 것”도 포함됩니다(고전 12:28).

그러니 주일학교 교사로 섬기는 것도 섬기는 것이요, 차를 운행하는 것도, 주차요원으로 일하는 것도 섬기는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악기를 가르치는 것도 섬기는 것이며, 누가 보지 않아도 교회 여기 저기를 청소하고 정리하는 것도 섬기는 것입니다. 또 성도의 연약함을 위로하고 권면하는 것도 섬기는 것입니다. 주일에 어떤 성도가 괴로워하는데 그 이야기를 들어주고 함께 기도하며 주님의 말씀으로 권면해준다면 그것 역시 섬김입니다. 상을 닦는 것도 섬김이고 성경을 가르치는 것도 섬김입니다. 모이기에 힘쓰는 것 역시 서로에게 격려가 되고 힘이 되는 섬김입니다. 도서관 책을 정리하는 것도 섬김이고, 읽은 책의 내용으로 성도에게 유익을 주는 것도 섬김입니다. 애찬을 준비하는 것도 섬김이고 설거지 하는 것도 섬김이며 밥을 맛있게 먹으면서 함께 유익한 교제를 나누는 것도 섬김입니다. 식사를 준비하신 분들을 격려하고 감사를 표하는 것도 섬김입니다. 서로 오래 참고 견디는 것도 섬김이고 서로 죄를 고백하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것도 섬김입니다. 징계하고 훈계하는 것도 섬김이고, 예배에 참여하는 것도 섬김이고, 떡과 잔을 만들고, 떡과 잔을 돌리는 것도 섬김입니다. 예배시간 아이를 조용하게 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섬김이고, 그 과정을 참고 인내해주는 사람들도 섬기는 중입니다. 설교하는 것도 섬기는 것이고 설교자를 위해 물을 떠 놓는 것도 섬김입니다. 설교에 귀를 기울이는 것도 섬김입니다.

더하려면 수도 없이 많을 것입니다. 섬김의 영역은 이처럼 다양합니다. 누가 이 섬김의 영역을 제한하거나 규정지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면, 성도에게 유익을 주는 것이라면 섬김입니다. 예배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저는 유평교회에 섬김이 풍성하다고 생각합니다. 더 많은 성도들이 더 많은 영역에서 기쁨과 즐거움으로 하나님을 마음껏 예배할 수 있고 섬길 수 있게 되기를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마지막으로, 모든 예배는 신령과 진리로 드려집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4)

사도들이 말씀과 기도에 전념했던 이유가 있습니다(행 6: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맡겨주신 사명이 곧 “내가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20)였기 때문이었고, 결국 그리스도인이 하는 모든 것은 주께서 가르치신 것을 지키는 것과 동일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윌리암 에임스는 신학을 “하나님의 존전에서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지식”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성경에 대한 지식, 말씀이 가르치시는 바, 하나님에 대한 지식,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대한 지식이 필요한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살아가야 할 마땅한 바를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섬김이 예배이며, 그 예배의 대상이 하나님이시고, 성령께서 주신 은사에 따라 그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과 모양이 다양하다면, 우리는 이제 한 가지 분명한 원리 안에서 그 다양한 섬김을 시행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진리”입니다.

이 세상에 어려운 사람을 돕는 봉사기관이 참 많이 있습니다. 공동체로서 서로를 섬기고 사랑하는 아름다운 조직도 많이 있습니다. 이단 중에서도 사회봉사와 단체 내의 섬김이 특출난 곳이 종종 있습니다. 그들의 헌신적 이타적 섬김과 참 그리스도인의 섬김이 다른 점이 있다면 그 섬김의 대상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이라는 분명한 사실과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지고 섬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해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아버지가 아들을 너무나 사랑해서 아주 소중한 것까지 아낌 없이 줄 정도인데, 아들은 그 사랑을 대충 깨닫고 그 아버지께 헌신합니다. 아버지를 위해 이것 저것 열심히 뭔가 하는데, 아버지에 대한 참 사랑은 그 안에 없습니다.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알고 싶어 하지도 않고 그분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가기를 원치 않습니다. 다만 그분이 요구한 몇가지 일에만 열심히 합니다.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요? 에베소 교회처럼 행위와 수고와 인내와 견딤과 열심이 있었지만 처음 사랑을 버린 것처럼 발견될 수도 있습니다. 섬기더라도 바른 자세와 태도로 섬겨야 합니다. 섬김의 대상이 어떤 분인지 알고 섬겨야 합니다. 섬기는 이유와 동기 자체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그분이 하신 일에 대한 경외심, 감사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을 제대로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의 섬김은 예배입니다. 모든 예배는 진리로 드려져야 합니다. 그래서 배우는 것이고 그래서 말씀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기 위해, 더 알기 위해, 더 바른 마음과 태도로 드리기 위해,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섬기기 위해 진리를 배우는 것입니다. 배우지 않는 섬김은 방향을 잃어버린 섬김이고, 섬기지 않는 배움은 유익이 없는 배움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는 몸을 내어주는 헌신도 필요하지만 진리와 함께하는 참 사랑의 특징도 들어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가 섬기는 대상인 하나님을 드러내고 우리에게 보여주기 때문에 우리는 말씀을 사모합니다. 말씀을 배웁니다. 우리가 섬기는 분이 어떤 분인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배자로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그렇게 긴 시를 가지고 하나님을 노래했던 것입니다(시 119).

결론적으로 우리는 모두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섬김은 하나님을 향한 예배입니다. 우리는 다양한 방법과 모양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한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 우리의 모든 섬김의 최종 목적이라면 우리는 우리가 섬기는 모양을 가지고 서로를 비난하거나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교만하거나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우리에게 구하시는 것은 충성이며, 진리 안에서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는 그것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우리를 섬기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는 예배자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분은 창조주로서 피조물인 우리를 섬기셨습니다. 그것이 궁극적으로 아버지께 영광이 되기 때문입니다(요 17:1-5). 예수님은 무엇으로 섬기는지에 대해 불평하거나 판단하지 않으셨습니다. 가장 낮은 곳까지 내려가셨습니다. ‘내가 주와 선생인데 너희가 발을 씻기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냐!’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맨날 나만 봉사하고 너희는 나에게 배우기만 하냐’고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항상 섬기는 자로 가장 낮은 곳에서 그들의 필요를 돌보시고 그들을 섬기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항상 진리 안에서 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은혜와 진리가 풍성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를 아는 지식에 넘쳐 주야로 아버지와 기도로 교제하며 말씀 안에서 풍성한 지혜로 제자들을 섬기셨습니다.

우리의 섬김의 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당신은 그분의 섬김을 본 받고 있습니까? 죽기까지 충성하신 그리스도의 섬김의 본을 당신은 따르기 원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