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고전 13:2)
마이클 리브스가 쓴 “꺼지지 않는 불길”이라는 책에서 저는 흥미로운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보았습니다. 종교개혁을 일으킨 개혁자들의 삶을 다룬 이 책은 당시 카톨릭이 정치와 결탁하여 심히 부패함으로 얼마만큼 시민들의 삶을 쥐어짜내며 억압하고 있었는지 소개합니다. 성경을 그들의 눈에서 멀어지게 하여 눈먼 신앙을 만들어냈고 결국 성경이 말하는 참된 구원의 길이 아닌 전통을 따름으로, 우상과 성인을 숭배함으로, 심지어 돈을 지불하여 구원을 얻기 위해 아무런 소용없는 헛수고를 죽을때까지 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시민들은 헌신할 수록 구원의 진리와 확실한 믿음에서 멀어졌고 그들에게서 쥐어짜낸 것으로 교회는 부와 권력을 늘려나갔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성경의 단순하고 분명한 진리는 당시에 온갖 종교적 규율과 형식에 의존하고 있던 시민들에게 충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자기 목숨을 걸고 이 진리를 외쳤던 많은 종교 개혁자들은 성경을 시민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번역하고 보급하였고 진리가 그들의 마음에 전해졌을때 “오직 믿음”의 진리는 천년동안 그들의 생각과 삶을 규정해왔던 잘못된 틀을 깨부술 정도로 파괴적인 능력을 보였습니다.
제가 흥미롭게 본 사람들은 이 놀라운 종교 개혁의 회오리 바람 속에서 또 다른 회오리를 일으킨 사람들로 “급진적인 종교개혁자들”입니다. 마이클 리브스는 그들 중 한 사람이었던 “카를쉬타르”에 대해 “성미가 급한 사람이어서, 사람들이 미처 따라올 수 없는 속도로 개혁을 밀어붙였다”고 말합니다. 또 이러한 무리들의 또 다른 특징 중 하나인 “폭력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일단 강단에서 우상 숭배를 악이라고 선포하자, 폭도들이 알코올의 힘을 빌려 성상을 때려 부수며 난동을 부려도 이를 제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성상 파괴자들의 신앙이 돈독하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다. 많은 이들이 이런 형상과 형상들이 상징하는 모든 것에 심히 반대했다. 16세기에는 이만큼 흥미진진한 오락이 그리 많지 않았다. 성상들을 때려 부수고, 유리(스테인드글라스)를 깨며, 나무로 만든 형상들을 불태우는 것은 분명 신나는 일이었다. 술이 거나하게 취하고 인생이 따분한 친구들은 종종 일부러 이런 일을 신나게 벌이곤 했다(마이클 리브스, “꺼지지 않는 불길,” 120-121pp)
마틴 루터는 이러한 급진파들이 종교개혁의 핵심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리브스는 말합니다.
나는 어떠한 사람도 힘으로 억누르고 싶지 않습니다. 믿음이란 강요 없이 자유롭게 우러나와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 자신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나는 면죄부와 모든 교황주의자에 반대했지만, 결코 힘을 쓰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저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고, 설교하고, 썼습니다. 나는 그외에 다른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의 말씀이 한 것입니다(122p)
그러나 계속된 급진파들은 무력과 반항으로 통제할 수 없는 일을 지속적으로 했고 그 중 신비주의와 은사주의를 신봉했던 뮌처와 얀 마테이스 등은 극단적인 개혁을 무력으로 감행하여 결국 종교개혁에 호의를 보였던 시민들과 권력자들이 종교개혁에 가지고 있던 호의를 사그라들도록 만들었습니다.
많은 통치자들이 뮌처와 루터를 구분하지 못한채 이제는 종교개혁 운동 전체에 대해 무자비하고 강경한 태도를 갖게 되었다. 종교개혁이 반란이라면, 이를 분쇄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결심이었다. 뮌처와 루터를 구분할 수 있었던 통치자들 역시 모든 형태의 급진주의에 분노와 의심을 집중하게 되었다. 급진주의는 더이상 관용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125p)
마이클 리브스의 책에서 저는 각 나라별로 이루어진 종교개혁의 흐름 가운데 이와 같은 두 가지 회오리 바람이 계속해서 불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말씀과 바른 교리로 시민들의 마음에 개혁을 일으키려고 노력하려는 자들이 있었던 반면, 강압과 폭력으로 급진적인 개혁을 빨리 가져오려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때로는 급진주의자들의 교리가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적 교리에 더 가까운 것이 있었습니다(예로 유아세례에 대한 교리나 만찬 떡과 잔에 대한 교리). 하지만 그들이 고수하려는 진리가 더 성경적일지라도 그것을 이루려고 그들이 택한 수단은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모든 비밀과 지식을 알고 있어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역사는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오히려 참 사랑의 메시지인 성경의 비밀과 진리가 어그러져 보이고 잔인하게 보이도록 하는 폐해를 낳습니다.
“오직 예수”를 말하는 기독교는 진리 자체가 배타성을 갖습니다. 진실로 성경이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면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길이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진리와 다른 것을 말하는 것에 대하여 그것도 옳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성경이 참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진지하게 믿는 사람에게 영생에 대한 유일한 진리는 오직 성경뿐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바른 진리를 말한다 해도 사랑 없는 태도는 진리를 어그러져 보이게 만듭니다. 교만하고 무례하며 성내고 악한 말은 진리를 담지 못할 그릇입니다. 온유함 없는 진리는 빛을 잃어버린 등불과 같습니다. 맛을 잃은 소금입니다. 진리에 호의를 가졌던 자들로 하여금 오히려 진리와 담을 쌓도록 만듭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런 경우를 많이 발견합니다. 다른 종교의 예배 장소를 찾아가 땅밟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상숭배의 장소 심장에 십자가를 세우겠다고 선포합니다. 성경에서 금하고 있는 동성연애자들이 모인 곳으로 가서 행패를 부리기도 합니다.
기독교 인터넷 신문 사이트에 들어가서 논쟁이 되는 기사의 댓글을 읽어보십시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 볼까 두려울 정도로 원색적인 비난과 욕설, 무례한 표현과 태도가 넘쳐납니다. 온유함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종교지도자들에 대한 개인적인 의견과 사회에 대한 비판을 표현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에게 표현의 자유가 있지만 때로 저는 그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그들은 진리를 선포했습니다. 진리를 말했습니다. 문제는 그들에게 사랑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진리를 말한다 해도 온유하고 겸손한 태도에 담겨있지 않다면 진리가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처럼 아무 것도 아니고 아무 유익도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처럼 개인의 의견을 주변 사람과 불특정 다수에게 표현하는 것이 쉽고 간편한 적이 없었을 정도로, 우리는 많은 의사표현의 기회를 갖습니다. 종교적 논쟁이나 정치적 견해를 밝힐 수 있는 곳도 충분히 존재하며, 표현의 자유가 있다는 것으로 우리는 아주 쉽게 그리고 거침 없이 우리의 의사를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영광과 사랑을 세상에 드러내기 원하십니다. 당신의 진리를 세상에 선포하기 원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진리를 말하지만 반드시 사랑으로 진리를 말해야 합니다. 후에 내가 그런 말들을 했다는 것을 세상 모든 사람이 안다 할지라도 부끄럽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실질적으로 생각해봅시다. 주님은 다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익명성에 숨어서 몰래 내 감정을 다 쏟아놓는 댓글을 남겼지만 아무도 모른다 할지라도 주님은 아시지 않습니까?
주님은 베드로를 통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벧전 4:11)
당신은 진리를 말하고 있습니까? 당신은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있습니까?
당신의 손가락으로 적고 있는 글들을 통해 하나님이 영광을 받고 계십니까?
그분께 영광과 권능을 돌려 드리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