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성도를 만났을 때, 무슨 말을 건네야 할지 막막합니다. 성경은 우는 자와 함께 울라고 말하는데, 욥의 친구들처럼 함께 울어주고 칠일 동안 함께 있어줄 수 있지만(욥 2:11-13), 막상 어려움 가운데 있는 성도가 하는 말에 어떤 대답을 해주어야 할지 모를 때가 많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어떻게 하나님 이러실 수 있나요?’ ‘내가 무얼 잘못했습니까?’라고 말하는 슬픔에 젖은 성도에게 뭐라고 말해줄 수 있을까요? 욥은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였습니다(3:1).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이런 비극을 경험하지 않았을텐데…’라고 부르짖는 것입니다. 하루 아침에 모든 자녀를 잃고 가진 모든 것을 빼앗겼으며 자기 몸도 성치 않아 쉴새 없이 고통을 겪고 있는 이에게 무슨 위로의 말을 건네줄 수 있겠습니까.

성도의 삶 가운데는 크고 작은 여러 모양의 어려움들이 있습니다. 다 멀쩡해 보여도, 어떤 집에는 경제적인 압박이 있고, 어떤 집은 관계가 틀어져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자녀가 어려움을 가져오는 집도 있고, 건강의 문제로 그늘이 진 집도 있습니다. 모두가 인생이 주는 수고와 슬픔을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죄의 저주 아래 고통받고 살아갑니다. 피조물이 이 썩어질 것에서 벗어날 것을 갈급하는 것만큼 우리도 이 세상이 주는 고통을 벗을 날을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문제는 겪고 있는 극심한 고통 중에 어떤 위로의 말을 전할 수 있냐는 것입니다. 욥의 이야기로 돌아가, 우리는 욥의 친구들이 최악의 상담가였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고통중에 있는 자에게 해서는 안될 말을 했습니다. 바로 “네 죄때문에 이런 일이 생긴거야”라는 말이었습니다.

“제 손에 죄악이 있거든 멀리 버리라 불의가 네 장막에 있지 못하게 하라”(욥 11:14)
“네 악이 크지 아니하냐 네 죄악이 끝이 없느니라”(욥 22:5)

심지어 자녀의 죽음에 대해서도 그들의 죄 때문이라 말했습니다.

“네 자녀들이 주께 득죄하였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붙이셨나니”(8:4)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 단단히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무조건 죄에 대해서는 벌을 주시고, 선에 대해서는 복을 주셔야하는 분으로 하나님을 제한한 것입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주권적으로 이루신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모든 벌어진 상황을 보응신학의 원리로 이해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극심한 고통중에 있는 친구와 칠일을 같이 울어줬으면서도 그 친구의 가슴에 비수를 꽂은 것입니다. “이런 엄청난 비극이 일어난것을 보면 너는 분명 큰 죄를 지은 것이 분명해! 니 자식들도 마찬가지야!”

그렇다면, 욥의 친구들은 마땅히 어떤 위로의 말을 건네야 했을까요? 극심한 고통 중에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는 친구에게, 자기 삶을 돌이켜 보면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의롭게 살기 위해 노력한 것들을 회상하고 “하나님 왜!?”라고 부르짖는 친구에게 어떤 위로의 말을 건네야 했을까요?

“주님의 뜻이 있을 거에요!”라는 말은 어떻게 보면 참으로 무책임해보입니다. 아무 것도 알 수 없다는 듯한 말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이라면 이 말이 비극 중에 있는 성도에게는 가장 큰 위로의 말이기도 합니다.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환경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이기도 합니다.

욥의 친구들은 욥과 함께 진심으로 울어 주었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문제는 단지 태도의 문제, 진심의 문제가 아니라 교리의 문제였습니다. 그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문제였습니다. 욥이 자기 생일을 저주하는 이유 그리고 자신의 의로움을 내세우며 자신의 결백함과 자신이 겪는 일의 부당함을 피력하는 이유 역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그들 모두 하나님을 보응신학 속에 가두어 두고, 모든 피조물 보다 위대한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에 대해서는 간과하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하나님께서 욥을 대면하셨을 때, 욥에게 계속해서 하신 말씀이 바로 그 부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때가 되서야 욥은 “주님이 뜻하신 바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모든 질문과 의문을 내려놓습니다.

얼마전 친구가 이제 갓난아기인 아들이 주사를 맞는 동영상을 보여준 적이 있습니다. 아이는 순진무구하게 보였습니다. 싱글싱글 웃는 그 아이의 작은 허벅지에 갑자기 바늘이 쿡 들어옵니다. 아이는 갑자기 찾아온 고통에 “응애~”하고 울어버렸습니다. 영상 속에서 아이의 아버지인 친구는 어떻게 했을까요? “아이고, 아들아, 아프지? 이건 주사라고 하는거야. 이 속에 있는 백신이 네 몸속에 들어가서 면역체계를 만들어, 병균이 혹시 들어오더라도 너를 병들지 않게 하려고 미리 맞는 거야”라고 설명했을까요? 아닙니다. 친구는 심지어 웃음을 지었습니다. 그리고는 “아이고~아프지! 괜찮아! 괜찮아!”라고 아이를 토닥여주었습니다. 아이는 금방 울음을 그치고 토닥여주는 부드러운 아버지의 손길과 품 속에서 다시 웃음을 되찾았습니다. 그리고 아주 건강한 면역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짧았지만 갓난아기가 경험할 수 없었던 강렬한 고통은 자기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아버지에 대한 확실한 믿음만 있다면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사랑의 아버지를 신뢰한다면 이유를 다 알지 못한다 해도 상관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나에게 해로운 것을 주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가 만일 욥의 친구라면 욥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줄 수 있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욥에게 필요했던 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마음이었습니다. “주님의 뜻이 있을 것이라”는 분명한 믿음이 필요했습니다.

어쩌면 그에게 필요했던 조언은 “그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것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들 일곱과 딸 셋을 허락하신 하나님, 그리고 칠천 마리의 양과 삼천 마리의 소, 오백 겨리의 소와 오백 마리의 암나귀를 풍성하게 허락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을 잃었음에도 하나님을 신뢰했던 그 믿음을 끝까지 지키라고 말해주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위대하시고 큰 권능이 있으셔서 욥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다시 주실 수도 있는 분이라고, 우리는 다 알 수 없지만 그분에게는 크신 뜻이 있으실 것이며 그 뜻 안에는 욥을 향한 사랑이 풍성하게 자리 잡고 있을 것이라고 말해줄 것입니다.

현재 내 상황에 따라 하나님을 제한적으로 편협적으로 오해하는 것이 아니라, 환경과 관계 없이 위대하고 인자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 그대로를 바라볼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이 있을 거에요! 그러니 그 사랑의 아버지를 우리 신뢰합시다!”라고 말해주는 것입니다.

폴 밀러는 자폐증를 앓고 있는 딸 킴을 종종 캠프에 데리고 가는데, 가는 과정이 지옥과 같다고 말합니다. 항상 킴을 돌보는 아내는 이 캠프 기간동안 자기 시간을 누릴 수 있는데 15분에 한 번씩 “어떻게 이렇게 조용할 수 있을까?”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매일이 전쟁과 같은 삶이었기 때문이었겠지요. “주님의 뜻이 있을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 가운데 밀러는 이렇게 위로를 얻습니다.

세월이 흘러 킴이 스무 살쯤 되었을 때, 나는 식탁에 앉아 우리 소그룹에서 사용할 시편 121편의 성경공부를 쓰고 있었다. 아내의 시편 121편 기도를 나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내가 식탁에서 고개를 들고 말했다.

“여보, 그러고 보니 하나님이 하셨어요.
시편 121편 말씀대로 우리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셨던 것 같아요.”

우리는 장애인 딸이 환난인 줄 알았지만, 그것은 교만하고 고집 센 부모의 위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킴이 말을 못하기 때문에 아내와 나는 듣는 법을 배웠다. 딸의 무력함이 우리를 가르쳐 우리도 무력해지게 했다.

킴이 우리 집에 예수님을 모셔왔다. 아내와 나는 더 이상 스스로 인생을 살아갈 수 없었다. 하루의 시작부터 끝까지 예수님이 필요했다. 우리가 빵 한 덩이를 구했을 때 아버지께서는 돌을 주시기는 커녕 광야에서 우리 앞에 잔치를 차려 주셨다.

“예수님, 킴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 폴 밀러, <일상기도>, 245-6pp

우리에게도 이런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이 폴 밀러의 하나님이시며, 욥의 하나님이시고,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며,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낌없이 내어주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가진 환경으로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그 환경을 초월하여 사랑의 아버지 하나님을 끝까지 믿고 신뢰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극심한 어려움 가운데 “주님의 뜻이 있을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제서야 우리 마음에 아버지 하나님이 허락하신 감사와 찬양이 들어서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처럼 모든 환경 속에서 자족하는 법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다윗처럼 하나님으로 온전히 만족하여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염려하지 마십시오. 슬퍼하지 마십시오. 울지 마십시오.
주께서 다 알고 계십니다. 주님의 선하고 인자하고 사랑이 풍성하신 뜻이 이 환경 속에 분명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그분을 신뢰하고 의지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