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가르침은 그 의미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사실 매우 단순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을 처음 들어본 분은 없을 것입니다. 혹은 ‘원수를 선대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는 분도 없을 것입니다(눅 6:27). 문제는 ‘그것을 지킬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입니다. 누군가 나의 자녀를 의도적으로 해쳤을 때 그를 위해 오히려 기도하고 선대할 수 있습니까? 이 명령은 진지하게 생각해볼 수록 지키기 힘든 명령입니다. ‘너무 이상적이지 않습니까?’ ‘이것이 순종가능한 명령입니까?’ 이러한 의문이 우리 마음 속에 가득 채워집니다.

설교를 준비하는 저에게 있어 아주 큰 과제가 있는데, 그것은 ‘주님의 명령에 대한 사람들의 극단적인 반응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입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계명에 대한 말씀을 들으면서 가슴을 칩니다.

“주님, 저는 그렇게 못합니다. 저는 정말 연약한 믿음을 겨우겨우 이끌고 이 곳에 앉아있습니다. 저에게 이 과도한 짐을 지우시면 저는 무너집니다. 저는 저에게 조금이라도 못되게 구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조금도 없습니다.”

그런 분들에게 예수님의 계명은 물에 흠뻑 젖은 모래자루처럼 무거운 짐처럼 여겨질 것입니다. 절대로 이룰 수 없는 지극히 높은 기준처럼 여겨질 것입니다. 그래서 자포자기 하고 낙심하게 만들지도 모릅니다.

또 다른 극단에 있는 사람은 이러한 말씀을 들으면서 콧방귀를 뀝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 누가 몰라? 다 아는 얘기지. 어차피 하나님이 제시하신 명령 완벽하게 지키는 사람은 없어. 그러니 내가 할 수 있을 만큼 아는 대로 살면 그만이지”

그런 분들에게 말씀은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말씀은 그 사람의 생각도, 삶도 전혀 움직이지 못합니다. 그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에 겸손히 반응하기 보다는 완강하게 말씀에 대항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분들만 고려한다면 ‘말씀에 대한 당신의 태도가 그렇다면 당신의 영적 상태는 심히 위태로운 상태입니다!’라고 강력하게 경고해야합니다. 하지만 또 다른 극단에서 겨우 믿음을 붙들고 있는 연약한 성도를 고려한다면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이 양극단에 있는 성도들은 주님의 계명, “원수를 사랑하라”를 순종할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강단에서 아무리 강력하게 주의 계명이 선포되어도 각자가 가지고 있는 생각의 틀에서 벗어나기 힘듭니다. 마치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진 씨나 가시 떨기 위헤 떨어진 씨처럼 말씀은 싹을 틔우는데 성공할지 모르지만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마 13:5-7).

하지만 감사하게도 두 부류의 극단에 있는 성도님을 위한 극약처방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닌 복음에 담겨있는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깊이 깨닫는 것입니다.

순종하지 못하는 나 자신에 대한 불안감과 두려움에 휩싸여 있는 성도가 계시다면 잘 들어보십시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여러분께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롬 8:1).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셔서 하나님을 위해 살고자 하는 당신을 위해 율법의 모든 요구를 이루셨습니다(롬 8:3-4).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통해서 말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부르셨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롬 8:30).

그러니 여러분의 연약함을 바라보며 실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강력한 능력과 사랑을 힘입어 순종의 길을 걸으시기 바랍니다.

이상적인 명령이라고 생각하며 어차피 순종불가능한 명령이라고 생각하여 한 발 물러서 계신 분이 있다면 여러분 역시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묵상해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왜 죽으신 것입니까? 왜 부활하신 것입니까? 다시는 우리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우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주를 위해 살게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까?(고후 5:15).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셔서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 곧 성령을 주시고, 그 능력 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의를 이루기 위해 주가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바울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롬 7:24)라고 고백하지 않았냐고 물으실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바울이 로마서를 거기까지 쓰고 말았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바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결코 정죄함이 없다”(롬 8:1)는 사실을 말하면서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명령합니다(롬 12:1).

그러므로 이상적인 명령이고 어차피 다 아는 것이니 아는 만큼 알아서 지키면 그만이라고 생각하신다면 “그리스도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경고한 바울의 말을 기억해야 합니다(고후 6:1). 그리스도는 그정도의 목적을 위해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리신 것이 아닙니다. 그가 창조한 새 피조물인 우리는 그리스도가 명령하고 있는 그 이상적인 목표를 향해 하나님의 강력한 주권과 능력으로 계속해서 달려가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겠다고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충분하십니다. 우리가 누구이길래 결코 그럴 수 없다고 먼저 선을 그어버리고 말씀이 내 삶을 전혀 변화시키지 않도록 담을 세우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누구이길래 복음의 능력이 우리 가운데 드러나게 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열심을 꺾어버릴 수 있겠습니까? 우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이 그것을 온전히 이루시고자 할 때 반대의사를 표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형상대로 빚어가시겠다고 하는 그분께 이대로 살다 죽겠다고 불평하겠습니까?

물론 우리는 연약합니다. 우리는 넘어집니다. 이 무거운 명령에 완벽하게 순종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를 만들어 가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땅에서 주님의 명령을 완벽하게 지킬 수 없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완벽함을 하늘에서 이미 완벽하게 이루셨고, 이 땅에서 살아갈 때 이루어가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의 선택은 하나입니다. 그 약속을 믿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의지하고 순종하는 길은 예수 안에 즐겁고 복된 길입니다”(Trust & Obey there is no other way).

브라이언 채플은 “그리스도 중심적 예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395p).

하나님이 베푸시는 압도적이고 무조건적인 자비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에게 더 이상의 정죄가 없음으로 보증한다(롬 8:1). 그렇지만 하나님의 이런 인자하시는 방종을 조장하기 보다 오히려 회개를 유발한다(롬 2:4). 우리는 자신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슬프시게 하는 죄에서 돌아서기를 원한다(엡 4:30).

우리에게는 균형잡힌 자세가 필요합니다. 양 극단에 있는 생각이 균형을 잡는 지점이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복음의 위대한 가치와 능력을 아는 사람은 진리를 온전히 순종할 수 있는 힘을 얻습니다. 마이클 윌킨스는 “제자도 신학”이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이미’와 ‘아직’이라는 복음의 두 가지 요소 가운데 균형을 잡을 것을 제시합니다(54p).

우리 중 어떤 사람은 완전주의 방식으로 ‘아직 아니’에 집중한 나머지, 우리 사역에서 소수의 사람만이 도달할 수 있는 기준을 세우기도 한다. 이렇게 되면 지나치게 무거운 짐을 지워서 패배주의나 독단주의로 흐르게 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미’에 초점을 맞춘 나머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은혜에 심히 편안함을 느끼면서, 계속 전진하여 제자로 성장하라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일단 예수님을 따르라는 부르심에 응답했다면 우리는 그분의 제자가 된 것이다. 우리는 그 확신에 거할 수 있다. 이 확신에 더하면서 동시에 우리는 일어나 이 생애 동안 예수님이 이끄시는 제자도의 길을 따라 걸어야 한다. 우리는 제자도의 ‘이미’와 ‘아직’ 사이의 균형을 맞춰야 한다.

주님은 자기를 따르는 것에 대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문이 좁아서 찾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그 문을 열고 들어가면 좁고 험한 길이 나옵니다. 그것이 바로 주께서 요구하신 길입니다. 쉽지 않습니다. 어려움이 많이 있습니다.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좁고 험한 길을 먼저 가신 그리스도를 따라 우리의 삶을 살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도를 세상에 선포하게 됩니다. 세상에서 볼 수 없는 사랑, 세상에서볼 수 없는 평안, 세상에서 절대 맛볼 수 없는 기쁨을 세상에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 길을 가는데 있어서 양극단의 생각을 피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에 도달한 사람처럼 안주해서도 안되며, 동시에 ‘아직’만 강조해서 항상 낙심하거나 행위에 의존하는 외식주의자가 되서도 안됩니다. 이 길이 그래서 좁은 것입니다. 양 팔을 벌려서 양쪽 극단의 낭떨어지로 떨어지지 않도록 균형을 잘 잡아야 합니다. 그 균형을 잡아주는 힘은 바로 그 길을 먼저 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를 풍성히 경험하는 것입니다. 채플은 이렇게 말합니다(410p).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우리의 감정을 지배할 때, 죄는 그 매력을 상실하며 결국 자신의 권세를 잃게 된다. 예수님을 향한 사랑은 순종의 능력이다. 듣는 사람의 마음에 예수님을 향한 애정으로 가득 채우는 설교는 그와 동시에 우리 마음을 장악하고 있는 거짓된 우상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죄가 발산하는 매력을 저지하며 거룩함을 향한 소망을 키우며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려는 열망을 불러 일으킨다. 예수님께 대한 사랑이 현저하게 나타날 때, 예수님의 뜻을 행하는 일은 우리에게 가장 큰 욕망인 동시에 기쁨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은 우리의 힘이며(느 8:10), 이런 기쁨이 생겨나도록 돕는 일은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에 부여된 커다란 특권이다.

C. S. 루이스는 예수님의 관점에서 이 좁은 길로의 초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순전한 기독교,홍성사, 2001,  307p).

당신이 내가 하도록 허락한다면 내가 당신을 완성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조금도 의심하지 마라. 당신이 자신을 내 손에 맡기는 순간, 당신은 바로 그 길로 들어선 것이다. 그 이하도, 그 외의 다른 어떤 것도 아니다. 당신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으며, 당신이 원하면 나를 밀어낼 수 있다. 그러나 당신이 나를 밀어내지 않는다면 내가 이 일을 끝까지 이루고야 말 것임을 알라. 당신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어떤 고난을 대가로 지불하던지, 죽음 이후에 어떤 상상할 수 없는 정화를 당신이 지불해야 하든지, 그것이 나에게 어떤 비용을 요구하든지, 당신이 말 그대로 완전하게 될 때까지 나는 결코 쉬지 않으며 당신 또한 쉬지 못하게 할 것이다. 나의 아버지가 조금도 주저함 없이 나를 기뻐했듯이, 당신을 기뻐한다고 말하게 될 때까지 나는 이 일을 할 수 있고, 잘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이하의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낙심하지 마십시오. 당신을 거룩한 시온성까지 인도하실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과 은혜를 신뢰하십시오. 또한 밀어내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당신을 거룩하게 하시고 영화롭게 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은혜를 밀어내지 마십시오. 아버지께서 아들 예수님을 온전히 기뻐하셔서 영화롭게 하신 것처럼, 당신을 영화롭게 하셨으며 또한 영화롭게 하실 것입니다. 그 좁은 길을 걸어가며 오직 믿음으로, 오직 순종으로 그 계명을 따라 아버지의 사랑안에 거하시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