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텔레비젼 광고에서 도저히 볼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하고 비참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봅니다. 날 때부터 점점 머리가 폭발할 것처럼 커지면서 고통에 울부짖는 갓난아기도 있고, 사지가 썩어들어가면서 절단해야 하는 어린 아이도 있습니다. 소아암을 앓고 있어서 그 어린 나이에 어른들에게도 힘겨운 항암치료를 수개월 받아내고 있는 모습도 봅니다. 원인도 모르는 희귀병을 앓는 아이도 적지 않습니다. 부모는 그 아이의 건강이 회복되는 것에 최고의 관심을 갖습니다. 아버지들은 하루하루 막노동을 해서라도 필요한 치료비를 벌기위해 밤낮 수고하고, 어머니는 고통에 울부짖는 아이를 돌보느라 하루종일 눈물과 땀으로 씨름합니다. 병만 고칠 수 있다면, 건강만 되찾을 수 있다면, 생명을 조금만 더 연장할 수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전에 그런 영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죽을 병에 걸린 어떤 사람을 위해 그 사람과 동일한 유전자로 복제인간을 만든 뒤, 그 복제 인간에게서 필요한 장기를 빼내어 죽을 병을 고치는 내용이었습니다. 나중에 복제된 인간들이 자기들의 삶과 생명의 가치에 대해 요구하면서 윤리적 도덕적 문제를 일깨우는 그런 영화였습니다.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스스로 버리는 일은 성경의 말씀대로 혹 있습니다. 우리는 물에 빠진 친구를 구하다 죽은 용감한 학생이나 불타는 집에 들어가 목숨을 바치면서 생명을 구한 소방관의 이야기를 종종 듣습니다. 그러나 그 목적을 위해 태어난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생명을 바치기 위해 태어난 영화 속 복제인간같은 존재는 없을 것입니다. 희생자 본인의 인권과 생명의 가치에 대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이천 년 전 베들레헴이라는 땅에 한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천사는 그 아기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고 하라고 하였습니다. 구약시대의 “여호수아”와 같은 의미인 “예수”는 “구원자”라는 뜻을 가졌으며 천사는 그 의미를 더 풀어서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라고 하였습니다(마 1:21). 태어난 아기를 보고 기쁨으로 노래했던 시므온은 아기 어머니에게 “칼이 당신을 찌를 듯 할 것입니다”(눅 2:35)라고 말했습니다. 그 아기가 나중에 비참하게 죽임을 당할 것이며 그로인해 어머니의 가슴에 커다란 슬픔을 안겨줄 것에 대해 미리 말해준 것입니다. 이 아기가 자라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다시 그의 곁으로 지날 때 요한은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말하였습니다(요 1:29). 어린양! 백성의 죄 대신 죽어야 하는 제물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 내려가면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의 손에 의해 이방인들에게 넘겨지고 많이 고통을 당한 후에 죽게 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곳으로 향하여 올라가셨습니다(마 20:17-19). 그 목적을 위해 이 땅에 오셨다고 하시면서 말입니다(마 20:28).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몸값으로 치러 주려고 왔다.” (마20:28, 새번역)

처음에 저는 인간의 육체적 고통과 질병에 대해 말씀 드렸습니다. 얼마나 비참하고 고통스러운지, 그것을 지켜보는 가족들의 삶을 피폐하게 하고 괴롭게 만드는지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이토록 강렬하고 지독한 고통의 근원이 죄라는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사실입니다. 죄의 열매로 수고와 슬픔이, 질병과 고통이 이 땅에 주어졌습니다. 죄가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입니다. 죄가 무서운 것은 단지 이 땅에서의 고통만 주는 것이 아니라 죽음 그 이후에도 영원한 고통을 준다는데 있습니다. 성경은 죄가 결국 사람을 영원히 불타는 불못으로 인도한다고 말합니다. 슬피 울며 이를 가는 고통이 영원토록 지속되는 곳,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단 한방울도 맛볼 수 없는 그 곳이 모든 사람에게 예비되어 있습니다. 죄라는 지독한 암덩어리가 제거되지 않는한 인간은 참된 안식과 평안을 누릴 수 없습니다. 이 땅에서는 건강상 아무 문제 없이 건강하게 사는 것처럼 보여도 증상이 전혀 나타나지 않다가 사람을 병들게 만드는 무서운 불치병처럼 죄는 결국 그 영혼에게 지독한 대가를 치르게 만듭니다. 영원토록 말입니다.

사람들은 사실 이 문제를 알고 있습니다. 속에서 끓는 미움과 시기, 분노 때문에 괴로워합니다. 아무리 채워도 만족할 줄 모르는 마음으로 늘 굶주려 있습니다. 행복을 찾아 허공을 휘저어도 아무것도 잡을 수 없어 낙심합니다. 평안을 누리기도 하고 기쁨이 주어지기도 하지만 그것을 빼앗아갈 것들은 허다합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어떻게 사는 것이 남는 삶인가?’ 여러 좋은 제안들을 내놓지만 ‘왜 사는가?’에 대해 답하지 못해 후회와 슬픔만 남게 됩니다. 모든 사람이 추구하는 것을 모두 누렸던 이 세상 가장 위대한 지혜자 솔로몬의 결론이 죄인의 유일한 고백입니다. “헛되고 헛되고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모든 사람이 가지고 태어나는 불치병, 죄! 사람은 크게 울면서 탄생을 알리고 계속해서 살아내기 위해 발버둥치지만, 결국은 영원한 죽음을 맞이할 수 밖에 없는 불치병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병을 치료하기 위해 그 어떤 노력을 한다해도 이 병은 치료가 불가능합니다. 죄는 인간의 삶을 갉아먹다가 죽고 나면 영혼을 송두리째 멸망시킵니다. 영원토록 말입니다.

죽기 위해 태어난 한 아기, 예수. 날 때부터 죽을 것이라 예언되었고, 사역을 시작할 때 희생제물인 어린양이라 불렸으며, 스스로 죽기 위해 왔다고 밝히신 예수님. 그분은 인류의 불치병 곧 죄를 해결해주기 위해 태어난 구원자이십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정해진 일이요, 그 뒤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시려고,

단 한 번 자기 몸을 제물로 바치셨고,
두 번째로는 죄와는 상관없이,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나타나셔서 구원하실 것입니다(히9:27-28, 새번역)

우리는 복제인간이 병든 사람을 위해 희생되는 것에 분노를 느낍니다. 그의 장기가 아무 허락 없이 적출되어 병든 자에게 옮겨지고 복제인간은 장기 없이 겨우 숨을 몰아쉬다가 곧 죽어버립니다. 그의 인권과 생명의 가치는 벌레처럼 하찮게 여겨집니다. 아무리 어떤 이의 병을 고칠 수 있다해도 그것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되는 일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천 년 전 태어난 한 아기는 단지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한 인격체의 인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만물이 그로 인해 창조되었고 그를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 죽기 위해 우리처럼 되신 것입니다. 그분이 나신 목적은 죽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의 병든 영혼과 마음을 그분의 의로움으로 옷입혀 주시기 위해서, 그분은 우리의 죄를 대신 가져가셨습니다. 우리 대신 죄 값을 치르셨습니다. 우리의 질병을 대신 지신 것입니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한 인간이 또 다른 인간을 위해 희생되는 것을 반인륜적이라고 생각하는 우리가 지금 모든 만물을 지으신 분이 하신 동일한 일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인간을 위해 죽임을 당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어찌 인간을 치료하기 위한 희생물로 태어나실 수 있습니까?

이해할 수 없는 이 놀라운 사건으로 확증된 것이 하나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6-8)

크리스마스에 우리가 기념하는 한 아기, “예수”

그는 죽기 위해 태어난 아기였고, 모든 인간이 앓고 있는 무서운 불치병, 죄를 대신 가지고 죽기 위해 태어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이렇게 하신 이유는 하나입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이 놀라운 사건은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에 대한 분명한 확증이 되었습니다. 만일 당신이 성탄절에 이 놀라운 사랑을 잊어버리고 지나간다면, 혹은 별로 생각하지 않기 원한다면, 무감각하게 여긴다면,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놀랍고 위대한 사랑의 가치를 져버리는 것입니다. 세상 그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바로 당신을 위한 희생의 가치를 가볍게 여기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당신을 위해 죽었습니다. 누군가가 당신을 위해 죽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누군가가 당신의 가장 심각하고 치명적인 질병을 대신 안고 죽었습니다. 당신에게 최고의 사랑을 선사했습니다. 그 이름의 뜻대로 당신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천 년 전 그 날 천사들이 외쳤던 것처럼 당신은 오늘 이렇게 노래하지 않으시렵니까?

지극히 높으신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