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히브리서 2:17-18)
이제 열흘 후면 성탄절입니다. 이천 년 전 베들레헴에 나신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천군천사들이 큰 소리로 찬양했던 것처럼 이 아기 예수님은 백성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나셨으며 하늘에서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영광이며, 땅 위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백성들에게는 평화였습니다(눅 2:14).
아기 예수님은 그 출생의 순간부터 오랜 세월동안 계시된 구약의 수많은 예언을 성취하신 특별한 분이셨습니다. 그분의 나심 이전에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이 있었고, 천사들을 통해 계시가 분명하게 전달되었으며, 가깝고 먼 사람들에게도 이 놀라운 소식이 전파되었습니다.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사람들의 입술을 열어 나실 아기 예수님에 대해 찬송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으로서 아기 예수님은 세상을 밝힐 빛으로 영광스럽게 이 땅에 오셨습니다.
동시에 그분의 탄생이 놀라운 이유는 그 평범함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여느 아기와 같은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혹시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 낳은지 얼마 되지 않은 갓난아기가 있습니까? 그 아기가 바로 이 땅에서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 그 모습이라고 보셔도 좋습니다. 이마에 광채가 나거나, 날때부터 서거나, 입이 열려 찬송이 흘러나오거나, 그 손으로 권능을 보이시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아주 평범한 아기였습니다. 늘 부모의 도움에 온전히 의존하여 살아가는 아무런 힘이 없는 갓난아기 말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된 아기가 바로 이 아기 예수님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선지자의 예언의 말씀을 주목하여 살펴봅시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 9:6)
상상조차 되지 않습니다. 부모의 도움이 없이는 생존이 불가능한 이 아기가 정사와 권세를 양손에 움켜쥐고 왕권을 펼치며 영원한 정의와 공의로 그 나라를 세우실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 말입니다! 하나님은 왜 성인의 모습으로 오지 않으셨을까요? 건장한 청년의 모습으로 모든 지혜와 총명을 갖추고서 공생애를 시작하지 않으셨을까요? 왜 지혜와 키가 자라나는 과정을 겪으셔야 했을까요? 왜 부모의 도움에 의존하며 살아가는 힘없는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을까요? 왜 지극히 평범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을뿐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인간의 출생과 성장, 그리고 죽음의 과정을 삼십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하루하루 꼬박꼬박 살아가신 걸까요?
히브리서 말씀에서 우리는 한 가지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피조물인 인간의 모습이 되신 그 이유를 말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처럼 태어나셔서 우리처럼 삶의 과정을 밟아가신 이유를 말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우리는 하나님이 기본적으로 자비하시고 신실하시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의 연약함과 불성실함을 절실히 맛볼때마다 하나님이 가지신 그 성품과의 간극에 압도되어 그분의 자비와 신실하심에 대해 의구심을 갖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시지만, 우리의 고통과 실패, 낙심과 절망에 대해 온전히 이해하시지는 못한다는 생각을 갖습니다. “하나님이니까 덮어주시는 것이겠지”, “하나님이니까 사랑으로 이해해주시는 거야…”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우리와 같은 형상으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같은 과정을 그대로 밟으셨다는 사실은, 물론 그분에게 죄가 없었다는 점이 분명하지만, 우리가 겪는 모든 것을 온전히 체험적으로 아신다는 것을 확증합니다. 부모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하던 갓난아기의 시절이 그분에게도 있었고, 지혜와 키가 자라나는 성장의 시기가 있었습니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하나님은 하루하루 우리의 평범한 일상을 동일하게 경험하셨습니다. 인생의 수고와 슬픔을 모두 겪으셨습니다. 죄의 유혹과 마귀의 시험에 노출되셨습니다. 우정과 사랑을 나누셨고, 갈등을 겪기도 하셨으며, 배신을 당하기도 하셨습니다. 쉽게 말해서 오늘 하루를 당신이 살아가는 것처럼,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하루를 사셨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대제사장으로서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속량하시는 장면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라고만 하지 않으시고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라고 동정심을 보여주십니다. “너희가 한 시도 나와 깨어 기도할 수 없더냐?”고 책망하시지만 “마음은 원이지만 육체가 연약하다”고 이해해주십니다. 의심하는 제자에게는 확신을, 부인한 제자에게는 회복을, 믿음이 부족한 제자에게는 확실한 증거를 주십니다. 그분이 누구보다도 우리의 처지와 상황을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이 안개와 같은 존재라는 것을 창조주의 지각으로 아시는 것뿐만 아니라 직접 안개와 같은 인생이 되시어 온전히 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이 신실하게 대제사장으로서 우리의 죄를 속량하신다는 것은 큰 위로가 됩니다.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우리처럼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으니, 시험받는 우리를 능히 도우실 수 있습니다. 그 상황에 계셨기 때문에 시험 가운데 있는 우리를 누구보다 더 잘 아십니다. 어떤 마음일지,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너무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모든 시험을 이겨내셨기에 우리로 능히 이기게 하실 수 있습니다. 범사에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을 의지하여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승리하는 법을 그분은 알고 계십니다.
크신 하나님께서 천하고 천한 마굿간에 나셨다는 것, 절대적으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절대적으로 의존적인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다는 것, 특별함과 평범함이 놀라울만큼 완벽하게 공존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결국 우리의 구원의 시작과 영원한 결말에 대한 평화로운 소식의 선포일뿐만 아니라 그가 기뻐하시는 백성인 우리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과정속에서 누릴 수 있는 진정한 평화의 동력이 됩니다. 구원의 종착점에서야 비로소 우리에게 위안과 기쁨이 되는것이 아니라 구원을 이루어가는 길 매 순간마다 낙심과 절망에서 우리를 건져내는 힘과 격려가 됩니다.
연약하여 넘어졌습니까? 아기 예수님을 보십시오. 아무 힘없고 연약한 그 모습으로 그분이 오셨습니다. 방황하고 있습니까? 믿음이 부족하여 흔들리고 있습니까? 주께서 아십니다. 주께서 당신이 처한 상황을 정확히 알고 계십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라 여겨질때, 마귀의 비방과 참소가 당신의 귓가에 맴돌 때, 하나님 앞에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로 초라한 삶을 살고 있을 때, 영적 위기와 빈곤을 맞이하고 있을 때, 낙심하지 마십시오. 주께서 당신을 잘 아십니다. 범사에 당신과 같이 되셨습니다. 당신의 죄의 빚을, 당신의 방황과 연약함의 허물을 신실하게 대신 속량하실 당신의 대제사장이신 주님은 당신의 그 자리 그 곳을 먼저 지나가셨던 분이십니다. 그리고 당신을 능히 도우실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5-16)
성탄절 갓난아기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분의 지극히 낮아지심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힘과 위로가 됩니다.
은혜의 보좌앞에 날마다 담대히 나아갈 수 있음은
그가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셨기에 우리의 연약함을 진실로 불쌍히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에게서 쏟아져 내리는 풍성한 긍휼하심을 받으십시오.
때마다 당신에게 부어지는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를 누리십시오.
그리고 능히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하나님으로부터 오늘 나에게 주어진 평화를 흡족하게 맛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