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안 성도”라는 말은 “안 나가”를 거꾸로 한 조어로 ”교회에 나가지 않는 그리스도인”을 가리킨다고 한다.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의 10%가 ”가나안 성도”에 해당한다고 하니 결코 적은 수가 아니다.
청어람아카데미 양희송 대표는 “가나안 성도 교회 밖 신앙”이라는 책에서 리기 맥닐의 말을 인용하며 그들은 “신앙을 잃었기 때문이 아니라 신앙을 유지하기 위해 교회를 떠난다”고 말했다. 2013년 4월 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의 조성돈, 정재영 교수팀이 300여 명의 가나안 성도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그들은 평균 14.2년 교회를 다녔고, 평균 6개월의 고민 후 교회를 떠났다고 한다. 한 마디로 교회 다닐 만큼 다녀본 사람들이고, 오랜 고민 끝에 그와 같은 결정을 내렸다는 것이다. 그들이 교회를 떠난 이유는 첫째,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고 싶어서였고(30%), 그 다음으로는 목회자에 대한 불만(24.3%)과 교인들에 대한 불만(19.1%)이 뒤를 이었다. 교회라는 틀과 그것을 구성하는 구성원들에 대한 불만이라는 말이다.
사실 교회 밖으로 나가지 않았을 뿐이지, 교회 안 아웃사이더들도 있다. 그들은 교회에 “안 나가”라고 선포하진 않았지만, 교회에서 일반적으로 인정받는(?) “신실한 성도”가 되고 싶지 않다고 선포한다. 굳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혹은 강단에서 목사의 설교를 통해 요구되는 이상적인 그리스도인의 모습에 따라 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조금은 그 중심에서 벗어나 조금은 겉도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기본적인 교회생활을 유지하면서 다른 사람은 인정하든 안 하든 나와 하나님 사이의 신앙에만 문제가 없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거듭나지 않은 목사와 거듭나지 않은 교인들이 빚어낸 탐욕과 외식이 가득한 교회들이 언론의 도마 위에 오르고, 거듭난 자들이 모인 교회 안에서도 여전히 죄와 치열하게 싸워야 하는 말세를 살아가는 성도들이 자신의 죄로 혹은 다른 성도의 죄로 서로에게 불만이 생기고 등을 돌린다. 다양한 목회철학과 그것을 실현하는 구체적인 방법들에 대한 이견으로 리더들 사이에 금이 가고 성도들 사이에도 균열이 생긴다. 때론 인격이 문제다. 목사의 인격, 성도의 인격. 때로는 교리적인 분별의 차이가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예배의 형식에서 오는 어려움도 있다. 이 모든 것들이 조금 더 많은 성도로 하여금 “안 나가”를 외치게 만든다.
교회 없이도 신앙은 가능하지 않은가? 다니엘을 보라. 혼자서도 얼마나 훌륭한 신앙을 보여주었는가? 대학생 시절 매일 새벽같이 이른 아침에 학생회관 식당에서 성경을 펼치고 기도하던 대학선교회 친구들을 기억해보자. 그들의 신앙이 보다 살아있고 생동감 있는 것이 아닐까? 혹은 직장 내에 존재하는 그리스도인끼리 모여 매일 성경을 읽고 찬양하는 모임은 어떠한가? 일주일에 단 하루만 참석하는 교회보다 더 실질적이지 않은가? 예배시간에 시끄럽게 우는 아기도 없고, 지루한 설교를 한 시간 동안 들을 필요가 없다. 최고의 강해설교가의 설교는 언제 어디서든 클릭 한 번으로 들을 수 있다. 고집스러운 성도, 목소리 큰 성도, 여기 저기 소문을 잘 내는 성도, 이유 없이 내 흉을 보는 성도도 없다. 오직 하나님과 나 사이에 이루어지는 이 완벽한 예배를 버리고 그 문제 많은 교회에 나갈 필요가 있는가? 내 신앙을 위태롭게 만드는 그곳에?
십 수년을 다니던 교회를 떠나기 위해 가나안 성도들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을까? 그들의 고뇌와 고통을 다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교회 안에서 아웃사이더가 되기로 자처한 사람들도 그간 받았던 상처가 가슴 깊이 박혀 있을 것이다. 이유가 무엇이었든 간에 성도를 실족하게 만든 그 무언가가 가나안 성도들에게는 각각 있을 것이다. 참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때로 교회는 인간이 만든 조직에 불과한가?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학원처럼 회원관리를 잘 안 하면 회원이 떨어져 나가고, 원생끼리 싸워서 그 중 한 사람이 학원을 그만 두거나, 때론 교사와 트러블이 생겨서 그만 둔다. 학원이 가르치는 방식이나 때론 학원의 문화 혹은 수준(?) 때문에 관두는 경우도 있다. 학원 없이도 공부는 할 수 있다. 그렇지 않은가?
만약 교회가 인간이 만든 조직에 불과하다면, 좀 더 나은 서비스를 제공하겠다고 말할 수 있다. 당신이 만족할 수 있도록 더 나은 환경을 만들어 내겠다고, 문제를 일으킨 학생을 훈계하겠다고 말할 수 있다. 당신이 불만인 부분을 말해준다면 조치 하겠다고 할 수 있다. 다시 와 달라고 부탁할 수 있다.
하지만, 교회는 인간이 만든 조직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이 필요에 의해 만든 동아리나 공동체가 아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성자 하나님께서 그분의 생명으로 빚어내신 그리고 성령 하나님께서 역사하고 계신 모임이다. 때문에 실족한 가나안 성도들에게 당연히 해야 할 위로와 격려, 기도와 간구 외에도 실족에서 돌이킬 것에 대한 촉구를 해야 한다. 궁극적으로 교회는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며 교회에 두신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나는 가나안 성도와 교회 안 아웃사이더들에게 다음과 같은 촉구를 하기 원한다. 보다 분명하게 말하면, 그들이 무엇으로부터 탈출하고 있는지 자문해보기를 원한다.
첫 째, 당신은 교회로 부르심을 받았다.
베드로는 소아시아 교회들을 네 가지 형태(복수의 조합을 강조하는 집합명사)로 부른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택하심을 받은 족속이며, 하나님만 섬기는 제사장이요, 하나님이 따로 구별하신 거룩한 나라, 하나님이 아들의 피로 사신 바 된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이다(벧전 2:9). 하나님이 택하신 구별된 무리인 교회는 신약성경 전반에 걸쳐 복수형으로 언급되었다. 우주적인 교회로서 복수가 아니냐고 묻는 사람도 있겠으나, 지역교회로서도 교회는 항상 복수로 불렸다. 하나의 모임으로 불렸다. 그 구성원들인 성도는 그 교회를 이루는 각각의 지체다. 어떤 사람은 마태복음 18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에…”라는 말씀으로 두 세 사람도(확장하여 각 개인도) 교회라고 주장하나, 그것은 문맥을 벗어난 해석이다. 예수님은 교회의 최소 구성원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에베소서 5장에 에베소 교회에게 주어진 명령을 보면 복수로 이루어진 모임 안에서 각 성도가 어떻게 해야 할지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너희도(복수),” “너희 중에서,” “너희를,” “빛의 자녀들,” “너희는…” 바울은 로마서 12장 5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하나의 유기적인 연합체로서 “교회”는 항상 바울이 가진 교회론의 기본 전제였다(참고. 고린도전서 12장). 사도행전 2장에 등장하는 초대교회의 매일같이 함께 모였던 습관이나 히브리서 기자가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자”(히 10:25)고 권면한 이유는 모두 이 본질적인 교회의 부르심에 대한 마땅한 반응이었다.
가나안 성도들이 교회를 떠나는 가장 큰 이유는 “자유로운 신앙생활”이라고 한다.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인가? 혹시 그것은 “불러낸 무리”로부터의 자유가 아닌가? 건강한 신앙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하신 그 길을 따라 가는 정도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하나님이 계획하신 부르심에서 뛰쳐나오는 것이 신앙을 건강하게 유지하는 길이라 말할 수 있을까? 물론 잘못된 가르침에서 돌이키지 않는 교회나 도덕적 윤리적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에서 멀어진 교회를 부득이하게 떠날 수 있다. 혹은 비성경적인 교회 정책에 동의할 수 없어서 나올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신이 말하는 자유가 하나님이 계획하신 “교회”에서 벗어난 신앙생활이라면 당신이 탈출한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 참된 교회를 찾아 뛰쳐나올 수는 있어도 “교회”를 뛰쳐나올 수는 없다.
둘 째, 당신은 섬기는 자로 부르심을 받았다.
신약교회들에게 주어진 명령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내 교회를 세우겠다”고 선포하신 그리스도께서 직접 말씀하셨듯 “섬기는 것”이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게 편지하면서 “너희가 부르심을 받을 일에 합당하게 행하라”고 명하면서(엡 4:1),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4:3)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이어 그리스도께서 교회 안에 각 은사들을 주신 이유에 대해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4:12)고 분명하게 언급한다. 바울은 5장 21절에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주와 선생으로 본을 보이신 것은 섬김의 모습이었다. 바울은 또한 빌립보서 2장에서 성도가 마땅히 품어야 할 “그리스도의 마음”을 이야기 하고 있다. 서신서에는 교회에게 주어진 수많은 “섬김”과 “봉사”에 대한 명령을 찾아볼 수 있다. 고린도전서 12장에 바울이 표현한 한 몸의 원리는 각 은사를 성령께서 그분의 뜻대로 부여하시고, 그 은사를 받은 성도들이 어떻게 서로 섬기고 도와야 할지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특별히 바울은 한 몸으로서 서로 개별적으로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돕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분명히 말한다. 은사의 목적 자체가 섬기기 위한 것이다. 베드로는 그의 첫 번째 서신서에서 교회를 가리켜 “신령한 집”(2:5)이라고 말한다. 바울도 유사한 표현으로 “함께 지어져 간다”(엡 2:22)라고 말한다. 이 비유가 제시하는 핵심원리는 각 성도가 한 목적을 위해 서로 섬기는 것이다. 벽돌과 벽돌이 서로 맞대어 쌓아져 올라가듯 성도는 각자의 짐을 지는 것뿐 아니라 서로의 짐을 지도록 명령 받았다(갈 6:2). 그것이 교회를 세우신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길이다.
“목사와 교인들에 대한 불만”이 가나안 성도가 교회를 떠나는 중대한 이유 중 하나였다. 그들이 받은 상처나 고통이 어떠한 것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함부로 말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것이 무엇이든 관계 없이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섬김의 부르심과 각 성도가 마땅히 품어야 하는 그리스도의 겸손의 마음은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유효하다. 이단의 가르침을 전하거나 인격적으로 감정적으로 큰 문제가 일어나 부득이하게 떠날 수 밖에 없는 이유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지만, 교회는 죄와 계속해서 싸우는 과정을 겪는 사람들의 모임으로서 문제가 없을 수 없다. 숙명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교회의 부르심이다. 각각 서로 다른 성품과 인격, 견해와 생각을 가진 자들이지만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고 서로가 서로의 부족함을 보완한다. 연약한자를 돕고 서로를 섬기는 모임이 교회다. 허다한 죄를 덮으며(벧전 4:8) 서로 죄를 고백하고(약 5:16) 또 경건한 자들이 각 성도들의 죄를 돌아보며 회개하도록 도와주는(갈 6:1) 모임이 교회다. 교회 밖으로 나가면 이러한 섬김의 부르심으로부터 자유를 누릴 수 있다. 보기 싫은 사람은 안보면 되고,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과 접촉을 피하면 된다. 물론 개인의 신앙 가운데 겪는 여러 가지 고난이 있을 수 있겠지만, 집에서 나와 사회에서 겪는 고난이 있다고 하여 집을 나간 가족의 일원이 자신이 속한 가정에 돌아가야 할 필요성이 격감되지는 않는다. 그리스도가 신부인 교회를 불러 모으셨고, 그 신부인 교회는 한 몸으로 여러 지체들이 서로 섬기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가나안 성도들은 현재 자신이 섬김의 부르심에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지, 어떤 지체로서 어떻게 역할을 다하고 있는지 스스로 돌아봐야 한다.
셋 째, 당신은 신실한 자로 부르심을 받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를 부르시는 장면은 참으로 아름답다. 어부와 세리, 사회적으로 그렇게 대단하지도 특출 나지도 않은 자들이었다. 이스라엘의 선생으로 자부하던 자들, 소위 엘리트 계열이 아니라 평범한 자들을 부르셨다. 하지만 그분이 제자들에게 요구하신 것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주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이렇게 말씀하시고는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죽을 각오를 하고 따라오라고 말씀하셨다(막 8:34; 눅 9:23). 예수님은 세상 그 누구보다 예수님을 가장 우선순위에 두라고 하셨다. 자식보다, 부모보다 더 주님을 사랑해야 한다고 하셨다. 또한 그분은 자기 목숨보다 주님을 더 사랑할 것을 명하셨다. 바울은 제자로서 가져야 할 이 신실함에 대해 잘 알았다. 그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음도 유익하다고 말하였다(빌 1:21). 또한 그는 맡긴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말했다(고전 4:2).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러한 충성스러움이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그들은 재산도, 시간도 아낌없이 주님께 바쳤다. 그리고 그들은 목숨도 주를 위해 내어 놓았다. 신실함에서 어느 정도 멀어져 적당한 신앙으로 빠져나가려는 교회 안 아웃사이더에게 예수님은 요한을 통해 일침하신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계 3:15). 어떤 사람은 충성을 강조하거나 순종을 강조할 때 율법주의라고 비난한다. 물론 올바른 동기 없이 행위를 강조한다면 문제가 있다. 그러나 교회를 위해 먼저 자신의 모든 권리를 죽기까지 내려 놓으시고 신실한 사랑으로 우리를 어둠에서 빛으로 이끌어내신 분께서 우리에게 사랑의 반응으로서 순종을 요구하실 때, 그것을 짐으로 여긴다면 주님은 아마도 첫 사랑이 어디서 떨어졌는지 생각하고 회개하라고 명하실 것이다(계 2:5). 과거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명하셨다. 그리고 그분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한 것을 요구하신다(벧전 1:15~16). 은혜와 자비, 긍휼과 사랑, 정의와 공의가 변치 않으시는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동일한 신실함을 요구하신다. 교회는 신실한 자들로 부르심을 받았다.
교회 안 아웃사이더들은 자신이 과연 어디로부터 아웃사이드에 속해있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강단에서 묘사하는 이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숨쉴 틈을 찾아 편안하게 머물 수 있는 신앙을 찾는 것은 지극히 현실적으로 보인다. 정치제도에 순종하라는 말씀이나 직장 상사에게 순종하라는 명령을 들으며 그것이 이상적인 명령이지만, 현실적으로 이런 부분에서는 원리에서 벗어나 실질적 적용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성경이 제시하는 일반 원리가 여러 가지 모양으로 적용점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점에서 동의하지만, 원리는 원리일 뿐이고 이상은 이상이며 현실은 다르다는 생각은 문제가 있다. 교회에서 인정받는 모습이 교회 정치나 죄악 된 인간이 만들어낸 잘못된 사회구조상의 산물이라면 문제가 되지만 그것이 성경이 제시하는 순종의 삶의 모습인데도 나에게 부담이 되고 거부감이 생겨서 그것으로부터 나와 바깥의 영역에 머물고 싶다는 생각은 신실한 자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 있어서 치명적이다. 계시록 말씀에 따르면 뜨거운 것에서 나오고 싶은 마음이다. 차갑게 되기는 싫고 뜨거운 것도 싫다는 것이다. 미지근함을 유지하고 싶은 신앙. 그것은 회개를 요구하는 죄다. 성경은 끊임없이 뜨겁게 사랑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교회를 부르신 주께서 우리를 먼저 뜨겁게 신실하게 사랑하셨다고 확증하고 있다.
넷 째, 당신은 예배하는 자로 부르심을 받았다.
하나님은 구약과 신약 동일하게 하나님의 백성을 부르시면서 “제사장”이라 칭하셨다(출 19:6; 벧전 2:9). 그들의 역할은 오직 하나님만을 예배하는 것이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이 가장 많이 경고를 받고 심판을 받은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 외의 우상을 숭배했기 때문이다. 신약교회에 주어진 명령 중 골로새서 3장 15절을 보면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씀하시면서 이 복수의 무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이렇게 명하신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6-17). 물론 예배는 개개인이 삶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포함한다. 모든 삶이 다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지는 예배다(롬 12:1). 그러나 성경 전체적으로 절대 간과할 수 없는 예배는 회중예배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율법으로 강력하게 권하여 함께 모여 하나님께 예배드릴 것을 명받았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성도가 함께 모여 같은 믿음과 같은 소망 같은 기쁨을 가지고 그 모든 것의 원천이 되시는 주님을 높여 찬양하는 것은 하나님의 분명한 부르심이다. 또한 강단에서 함께 듣는 하나님의 말씀과 서로 모여 나누는 교제, 권면, 기도 등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것이 예배자로서 부르심을 입은 교회의 역할이다.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 역할은 무료배식이나 자원봉사 보다는 교회의 근본적인 부르심에 충성할 때 가능한 것이다.
내가 만난 한 가나안 청년은 주일마다 혼자 자기 방에서 예배를 드린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히 자신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신에게도 기쁨이 된다고 했다. 하루에 세 번 하나님께 기도로 예배를 드린 다니엘처럼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다니엘이 민족의 회복을 위해 기도했다고 생각한다(다니엘 9장). 그것도 자신의 목이 달아날 수 있는 위기 가운데 간절히 하나님의 백성이 다시 모여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임재 앞에 함께 예배하는 것을 구했다고 생각한다. 사마리아에서 예배지에 대한 예언을 알고 있던 여인에게 예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는 아버지 하나님에 대해 말씀해주셨다. 언제 어디서나 우리는 하나님이라는 참 예배의 대상을 향하여 삶으로 예배를 드린다. 그러나 이러한 원리가 성경 전체에서 일관적으로 강조되고 있는 회중예배의 특징을 무시할 수 있게 만들수는 없다. 신약의 성도들은 예배를 위해 모이기 힘썼던 것을 본다. 그들은 매일 예배하기 위해 모였다. 뿐만 아니라 계시록 마지막에 이루어질 최종적인 예배의 모습 역시 주님을 섬기는 자들이 모두 함께 드리는 회중예배인 것을 보게 된다. 개개인이 드리는 예배의 중요성이나 의미 역시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가나안 성도는 그 이유가 어찌되었든 함께 예배하는 자로 부르심을 입은 그것에 어떻게 순종하고 있는지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다섯 째,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았다.
하나님을 가리켜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구약과 신약이 다르지 않다. 모든 생명의 근원이 되시기 때문이다. 신약에 와서는 그것이 더 명확해진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시고 예수님을 맏아들,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 부르신다(마 7:11; 23:9). 많은 사람이 외우고 있는 요한복음 3장 16절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말한다. 서신서는 이 개념을 확장시켜 자녀이면 유업을 상속받는 자가 된 것이라 말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를 이제 “아빠(아바)”라 부른다고 말한다(롬 8:15; 갈 4:6). 이러한 관계 안에서 교회는 무리로서 여러 자녀들의 모임이라 말할 수 있는데, 때문에 서로 사랑할 것을 명하고 있다(벧전 1:22; 4:8). “형제”라는 칭호는 때로 이러한 가족의 관계를 강화시킨다. 우리는 한 아버지, 한 주님, 한 유업, 기업을 함께 나누고 있는 한 가족이다.
사실 가나안 성도 혹은 교회 안 아웃사이더들이 종종 하는 말은 “한국교회에 문제가 있어서…” 혹은 “교회가 오늘날 제 구실을 못하기 때문에…”이다. 때로 그러한 말들은 나 자신을 돌아보게 만들고 교회의 목적과 역할을 고민하게 도와주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이 진정 “성도”라면 그들이 가리키는 손가락은 결국 정확하게 자기 자신을 향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도 결국 한 가족이기 때문이다. 외식적인 교회가 싫증난 사람들은 교회의 지체로서 자신의 삶에 외식이 없는지 돌아봐야 한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가족들이 외식을 버릴 수 있을지 내가 속한 지역 교회 안에서 내 역할을 다하며 고민해야 한다. 교회 모든 구성원이 가나안 성도가 생각하는 교회의 그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몇 사람 혹은 인도자가 그럴 것이다. 그렇다면 그 교회의 지체로서 나는 어떻게 그들을 섬길 것인가? 어떻게 그 문제를 해결하도록 도와줄 것인가? 한 지체로서 여러 사람을 권면하거나 돕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지만, 우리는 아무리 큰 문제를 가지고 있는 구성원이 있어도 가족이기에 서로를 포기하지 않는다. 교회는 가족으로 부르심을 받았다. 그리고 가나안성도는 지금 “교회”라는 가족 안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나는 “가나안 성도”라는 말 자체에 모순이 있다고 생각한다. 구약성경에서 “가나안”에 거주한 백성들은 축출대상이었다. 때로 하나님은 그들을 몰살시키라고 명하셨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반대하고 대항하는 위치에 있었고,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유일한 길은 그들의 하나님, 그들의 삶의 방식을 버리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었다. 그들은 결코 “성도”가 아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 “가나안 성도”라 불리는 자들이 위에서 언급한 부르심에서 빠져나오려 하는 사람들이라면, 어쩌면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과 등을 진 가나안 백성일지도 모른다. 교회라는 무리로서의 부르심, 섬기는 자로서의 부르심, 충성스러운 제자로서의 부르심과 예배하는 자로서의 부르심, 그리고 하나님의 가족으로서의 부르심에서 멀어지는 것을 택하는 것으로 그들의 신앙을 지킨다고 생각한다면 말이다. 물론 일시적으로 또한 임시적으로 그러한 상황에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이 궁극적으로 유지하고 있는 안전한 신앙의 방식이라면, 그것이 그들이 지향하는 교회로서의 삶의 모습이라면 그들은 어쩌면 하나님의 백성의 모습에서 멀어지기 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모든 “가나안 성도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던 백성 가운데 신실했던(의로운) 백성이었으면 좋겠다.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신실하게 기도하는 자, 다시 함께 모여 예배드리는 것을 사모하는 자, 연약하고 패역한 백성들의 죄를 위해 눈물로 기도하는 자, 그들의 회복과 회개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자.
슬프게도 “가나안 성도들”가운데는 그렇지 않은 자들도 있다. 마치 자신은 교회의 한 가족이 아닌 것처럼 따로 떨어져 나와서 모여있는 무리들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자신은 그들과 다름을 강조하는 사람. 섬기기 힘든 자들과 어울리기 힘든 자들에게서 벗어나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영위하는 자들. 마치 페르시아 시대 예루살렘 재건을 위해 자신들이 영위하던 것들을 포기하고 폐허가 된 곳으로 돌아가 신실하게 회복의 약속을 붙들고 헌신하고 있던 자들을 멀리서 비웃듯 개인적인 삶 가운데 하나님과 일대일 만남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며 모든 하나님의 공동체적 부르심을 거부하면서 그 모든 책임을 공동체에게 돌리는 자들도 있다. 나는 그들을 위해 기도한다. 그들이 당했던 슬픔과 상처에 대해 기도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이 간과하고 있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하게 되기를 기도한다. 진정 그들이 가나안에 속한 백성이 아니기를, 혹 일시적으로 부득이하게 가나안에 거주한다 하더라도 진정한 “성도”로서의 역할을 다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