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이라는 말은 기독교 내에서 참 많이 사용하는 말입니다.
“영성”이라는 말이 얼마나 인기 있는지
갓피플몰에 들어가 “영성”과 관련된 도서를 검색해보면
1,070여 개의 리스트를 보여줍니다.
이는 “성화”(220개), “거룩”(340개), “순종”(228개)을 훨씬 웃도는 숫자로
심지어 “구원”(900개)보다 많은 결과입니다.
참으로 사랑 받는 이 “영성”이라는 단어는 과연 어떤 의미일까요?
표준국어대사전은 이렇게 정의합니다.
신령한 품성이나 성질
위키백과에서는 영성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신성의 영역과 연결 또는 합일되는 경험
또 “영적지수”(Spiritual Quotient)라는 말도 함께 인기를 얻고 있는데,
<SQ 영적지수>라는 책을 쓴 황준배씨는
영적지수가 뛰어난 성경인물로 다니엘, 솔로몬을 꼽았습니다.
“그들의 리더쉽은 미시적 학습지능을 초월한
국가와 사회를 움직였던 거시적 차원의 카리스마적 리더쉽”이었고
그것이 바로 SQ, 즉 영적지수가 높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황준배씨는 다니엘이 영적지수가 높았다는 근거로
다음 말씀을 인용합니다.
네가 네게 대하여 들은즉
네 안에는 신들의 영이 있으므로
네가 명철과 총명과 비상한 지혜가 있다 하도다(단 5:14)
하나님의 영이 사람 안에 있어
하나님의 품성이나 능력이(명철, 총명, 비상한 지혜)
겉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위에서 이야기 된 것을 보면,
신약성경에서 “영성”은 “성령충만”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기(예수)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더라(눅 2:40)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행 6:5)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행 6:8)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행 11:24)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행 13:52)
신약성경에 성령이 충만했던 사람들은
구약의 다니엘처럼 하나님의 영이 충만하게 있어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와 권능을 행했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성”을 갖기 원합니다.
지혜와 지식이 풍성하기를 원하며,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과 권능이 충만하게 임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영성계발서나 영성훈련기관 및 서적이 많은 인기를 누리는 이유입니다.
침묵영성훈련, 금식 및 집중기도훈련, 영적일기쓰기 등
영성훈련을 위한 방법도 참 다양합니다.
실제로 성경도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엡 5:18)고 명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영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과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과는
별개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타고난 영성,” “영성이 뛰어난 사람”
이러한 표현들은 말씀에 대한 지식이나 순종의 삶과 관계 없이
영성이라는 것이 주어지기도 하고
영성을 훈련시킬 수 있는 것처럼 오해하게 합니다.
마치 묵상과 명상을 오래 하면 뭔가 도인이 되는 것처럼
집중기도, 침묵, 마음단련을 하면 영성이 높아진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말씀을 공부하고 순종하는 것은 인위적이고
앉아서 묵상하면서 뭔가 집중하려는 자세는
영성훈련에 직결되는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영성” 혹은 “성령충만”이
오직 성령의 소욕을 따를 때,
다시 말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갈 5:25)
아하! 성령으로 행하는 것!
많은 사람들은 방언을 물 흐르듯 잘하면 영성이 뛰어나다고 생각합니다.
예언의 적중률이 뛰어나도 영성이 아주 좋은 것이라고 합니다.
기도할 때 많은 눈물을 흘리거나,
“아멘”을 크게 외치는 것도 영성이 뛰어난 것이며,
때론 헌금을 많이 하는 사람을 가리켜 영성이 대단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성령으로 행하는 것”은
어떤 기발하고 초인적인 능력이나, 감정, 행위 보다는
말씀에 순종할 때 우리를 통해 보이는 하나님의 성품에 가깝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오직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으로
우리가 순종할 때 우리의 삶을 통해 드러나는 “거룩함”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
성령이 충만한 자들을 교회의 지도자로 세웠던 초대 교회 시절,
디모데에게 바울이 명한 장로의 자격은
바로 “영성”이 충만한 사람이 어때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신중하며 단정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하지 아니하며…
(딤전 3:2-3)
영성은 비상한 머리나, 영특한 지혜, 초인적인 능력이나 감성,
외모에서 뿜어져 나오는 신비롭고 거룩한 기운 등이 아닙니다.
말에서 흘러나오는 오묘한 표현들이나 목소리 톤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영성은 언제나 순종의 삶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영성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반응과 직결됩니다.
내적인 반응과 외적인 반응 모두를 포함합니다.
마음으로는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며
삶으로는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영성이 뛰어난 사람은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하는 사람입니다(신 6:5; 눅 10:27).
영성이 뛰어난 사람은
내 몸과 같이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막 12:31; 약 2:8).
또한 뛰어난 영성은 교회 안에서만 반짝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충만을 받으라고 말한 바울은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과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 5:19-21)
영성이 뛰어난 사람은 찬양과 감사가 넘치는 사람입니다.
범사(모든 일)에 그런 사람입니다.
또한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복종하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이어서 부부(엡 5:22-33), 부모와 자녀(엡 6:1-4),
종과 상전(엡 6:5-9) 가운데 복종이 무엇인지 설명합니다.
어떤 사람이 성령이 충만한 사람의 모습인지
각 처에서 어떻게 드러나야 하는지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영성은 교회에서만 드러나는 특별한 성품이 아니라
가정, 직장, 사회에서도 드러나는 그리스도인의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방언을 많이 하지만
가정에서 독불장군인 사람이 영성이 뛰어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직장에서는 믿지 않는 사람과 똑같이 살면서,
기도할 때 눈물을 흘린다고 영성이 뛰어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정치 지도자들 위에 세우신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하면서
예배에 잘 참여한다고 영성이 대단한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영성은 내가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그곳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사는
나의 삶이 말해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영성을 얻기 위해 영성 훈련 책자를 사지 마십시오.
오직 성경을 주야로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영성을 높이기 위해 특별 훈련을 하지 마십시오.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시기 바랍니다.
오직 그의 말씀에 귀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겸손히 마음을 낮추고 말씀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영성은 아마도 예언, 방언, 기적, 경건한 태도와 자세
뭔가 심오한 표현과 몸짓에 비해 대단하지 않게 여겨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감정위주의 인간중심적이며 능력추구형인 엉터리 영성은
그와 극적으로 비교되는 더러운 삶으로
결국은 하나님께 욕을 돌리고 그 영광을 가리우게 됩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영성은 다릅니다.
여전히 옛자아의 습관에서 힘겹게 싸우는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함으로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으로
하나님 앞에 온전히 의롭다하심을 얻었습니다.
예수의 능력으로
우리는 옛자아를 벗어버립니다.
죄와 싸워 이기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해냅니다.
우리는 새 사람을 입습니다.
우리의 새 옷은 하나님의 거룩함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의 순종과 함께
날마다 더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십니다.
죄인인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거룩이 선포됩니다.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과 은혜가 드러납니다.
우리의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펼쳐집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증거됩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 충만이며
이것이 바로 진정한 “영성”입니다.
참된 영성은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로 귀결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