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는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을 찾아 오셨습니다(눅 15).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가까이 나아왔고,
그 자리에 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그 모습이 아주 못마땅했습니다.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눅 15:2)
그들은 수군거렸습니다.
종교적으로 흠이 없고 스스로 의롭다고 여겼던,
적어도 자신들의 무리 밖에 있는
세리와 죄인 보다는 내세울 것이 있다고 생각한
그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 다니지 아니하겠느냐?(15:4)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이 질문에 쉽게 답했을 것입니다.
‘당연히 찾아야지, 양을 잃어버렸는데…’
당시 유대인 사회에서 양은 아주 중요한 재산목록이었습니다.
과거 우리 나라에 소가 아주 중요한 재산목록이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경제적인 이유 뿐만 아니라 종교적으로도
양은 하나님께 드리는 중요한 제물이 되었습니다.
또한 집에서 가까이 두고 귀하게 키우는 가축인 만큼
양은 그들에게 있어서 정이 많이 들만한 동물이기도 했습니다.
나단은 다윗이 밧세바와 범죄한 후 양을 사랑하는 한 목자에 대해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아무것도 없고 자기가 사서 기르는
작은 암양 새끼 한 마리 뿐이라
그 암양 새끼는 그와 그의 자식과 함께 자라며
그가 먹는 것을 먹으며 그의 잔으로 마시며
그의 품에 누우므로 그에게는 딸처럼 되었거늘(삼하 12:3)
‘이렇게 귀한 양을 잃어버리다니…
당연히 찾아야 하지 않겠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마음엔 잃어버린 양에 대한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 애타는 마음이 생겼을지도 모릅니다.
암나귀 하나를 잃어 에브라임 산지, 살리사 땅, 사알림 땅 등
베냐민의 땅을 두루두루 살피고 헤맸던 사울처럼(삼상 9),
잃어버린 가축을 찾아 애타게 찾는 자의 심정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눅 15:5-6)
예수님은 잃은 양을 찾은 목자의 기쁨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이 목자는 어찌나 기쁜지, 친구들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함께 그 기쁨을 나누기를 원하였습니다.
귀한 양을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았을 때의 기쁨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도 잘 알았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을 자기 생명처럼 지켰던 자들이지만,
자기의 소나 나귀를 안식일에 풀어 끌고 나가 물을 먹였고(눅 13:15),
구덩이에 빠진 양은 안식일이라 할지라도
끌어 내어 구하였습니다(마 12:11).
이렇게 귀히 여기는 가축을 완전히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았을 때, 죽은 줄 알았던 생명을 다시 찾은 기쁨이
있다는 것을 아주 잘 알 고 있었습니다.
내 귀한 가축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아주 충격적인 사실이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집에서 키우는 가축들에 대하여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 애타는 마음은 있었어도,
수 많은 죄인과 세리들에 대한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마 12:12)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눅 13:15-16)”
사망으로 가고 있는 한 영혼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길을 잃고 헤매는 많은 죄인들의 방황을 애타게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위해 손을 내밀지도, 그들을 부르지도 않았습니다.
그들과 함께 하지도 않았습니다. 먹지도 마시지도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과 거리를 멀리 두고, 그들과 다르다는 사실에 기뻐했습니다.
기도하는 날에는 그들과 비교하여 얼마나 의인인지 자랑하였습니다.
그들이 다시 돌아오게 해달라는 기도는 없었습니다.
야고보는 편지의 마무리를 이렇게 하였습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되어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의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할 것이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임이라(약 5:19-20)
야고보의 말처럼, 우리는 우리와 함께 교회에서 주님을 부르고
함께 모이며, 함께 예배드리고 말씀들었던 자들을 기억합니다.
그들은 우리와 함께 있었으나, 지금은 우리를 떠났습니다.
그들은 구원 받은 자처럼 보였으나 실상은
죄인이었고, 진리를 떠난 자로 미혹된 길을 걷고 있는 자들입니다.
사망으로 가고 있는 자들이며 허다한 죄 가운데 살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잃어버린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그들을 돌아오게 하시기 원하십니다.
죄를 덮으실 분도, 사망에서 구원하실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돌아서게 하는데
우리를 사용하십니다.
문제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처럼 우리는 그들에 대해서
예수님과 같은 애타는 마음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키우는 애완동물보다
우리가 잃어버린 USB나 신분증보다
우리가 찾기 위해 노력하는 비싸지 않은 물건들 보다
온 천하보다 귀한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마음이
부족한 것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찾을 때 얼마나 기뻐하실까요?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 15:7)
우리는 날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주님을 기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여기 주님이 말할 수 없는 즐거움으로 기뻐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는 일이 여기 있습니다.
잃어 버린 영혼 한 사람을 찾아 가는 것입니다.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그들에게 주님께 돌아올 것을 권면하는 것입니다.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들을 향해 애타는 마음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진리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귀히 보시는 지극히 작은 그 영혼을
그분의 마음으로 바라보고
그분이 손으로 도우며
그분의 입술로 진리를 전하고
그분의 삶처럼 그들을 돌아서게 하기 위해 사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 멀리 아프리카까지 가야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
내 가정에 길을 잃은 자녀들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 사망으로 가고 있는 학생들이 있습니다.
세상과 자신을 사랑하며 욕심에 미혹된 청년들도 있습니다.
형식적인 교회생활을 즐기고 있지만 진리를 떠나 살고 있는 어른들도 있습니다.
우리 중에 잃어버린 자들이 있습니다.
스스로에게 한 번 질문해봅시다.
당신의 마음에 그들을 향한 자리가 있나요?
당신의 마음에 주님의 마음이 있나요?
죄와 사망으로 빠져가는 자들을 위해 내밀 손이 당신에게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