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 5장을 공부하는 중, 부한 자들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를 접하면서
재물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지 아내와 이야기하게 되었습니다.

재물, 그것은 우리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히 보여주는
대표적인 마음의 잣대입니다.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눅 12:34)

주님을 위해 살고 죽는 우리는
재물도 주님을 위해 사용합니다(롬 14:8).

보통 주님을 위해 사용한다고 말할 때 우리는 쉽게 헌금을 떠올립니다.

헌금을 얼마나 하는 것이 적절한가 생각할 때
보통 우리 마음에 있는 기준은 십 분의 일, 즉 십일조입니다.

조금 이상하고 우습게 들릴지 모르지만,
십일조를 하면 뭔가 해야 할 것을 한 것 같고,
안 하면 정상적인 기준 이하를 드린 것 같은 생각도 듭니다.

아마도 이러한 말씀 때문인 것 같습니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말 3:8)

십일조는 구약시대 뿐만 아니라 신약시대에 와서도
종교적으로 열심이 있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사이에서는
철저히 지켜졌던 것입니다(마 23:23; 눅 11:42)

특히 예수님의 비유에서 성전에 올라가 자신의 의로움을 뽐냈던 바리새인은
자신이 소득의 십일조를 드린다고 자랑했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눅 18:12).

또 십일조는 율법으로 제정되기 전에도
아브람이 멜기세덱에게 드리고(창 14:20),
야곱이 하나님께 드리기로 약속한 것이기도 합니다(창 28:22).

이 십일조의 기준을 오늘날 우리의 헌금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을까요?

또 어떤 사람은 헌금은 하나님께 하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교회 행정을 돌보거나, 특히 교회 일꾼들을 위해
사용되는 것이 대부분이 아니냐고 말합니다.

헌금의 사용에 있어서도 십일조와 공통점을 찾아볼 수 있는데요,
흥미롭게도 십일조는 오늘날 헌금과 같이 유사한 목적을 위해
제정된 율법입니다.

십일조는 분깃이 없던 레위인들과 고와, 과부들의 유업으로 주기 위해
제정된 율법입니다.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이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레 18:21)

셋째 해 곧 십일조를 드리는 해에
네 모든 소산의 십일조 내기를 마친 후에
그것을 레위인과 객과 과부에게 주어
네 성읍 안에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신 26:12)

당시에는 화폐나 금전으로 소득을 얻기 보다는
곡식, 과실, 기름, 가축 등으로 얻었기 때문에
십일조도 각각의 소출에 해당되었습니다
(신 12:17; 14:23; 삼상 8:15; 대하 31:5; 느 13:12).

문제는
이 십일조에 대한 법이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 적용되는가?
입니다.

성경을 공부하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구약 율법의 대상은 교회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율법은 교회에게 순종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율법을 하나님이 주신 것이며
교회가 믿는 하나님도 동일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율법을 오늘날 교회에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율법서를 해석하고 적용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율법 그 자체를 우리에게 바로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 그 안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속성과
하나님이 그 율법을 통해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혼시에 이혼 증서를 요구했습니다(신 24:1).
그러나 그 율법의 참 의미에게 대해 예수님은 말씀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완악함을 인하여
이혼을 쉽게 할 수 있도록 놔두지 않으신 것입니다.

이혼에 대한 구약의 율법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참 뜻은
이혼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않는 것입니다(마 19:6).

그 안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속성은 거룩함과 신실하심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결혼관계의 신성함을 지키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시기 때문에 결혼관계를 신실하게 유지하기를 원하십니다.

구약 율법의 적용은 항상 이렇듯
하나님의 속성과
그분이 원하시는 참 뜻을 알 때 가능합니다.

자, 그렇다면 십일조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어떤 속성이 십일조에 담겨있을까요?

하나님은 선하시고 인자하십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위해 일할 사람들을 부르시고
그들을 먹이고 입히십니다.

하나님은 은혜롭고 자비로우셔서
고아와 과부같이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도우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참 뜻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 자비로우심과 은혜로우심을 기억하며
하나님이 돌보시는 자들, 하나님의 일꾼들과 고아 과부들을 섬기기 원합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돌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과부를 명단에 올려 재정적으로 돌아볼 것을 명하고(딤전 5:9-10),
뒤이어 장로들을 금전적으로 지원할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딤전 5:17-18).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헌금할 때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십일조라는 율법 안에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 은혜와 자비가 있으며
그분이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돌보시는 자들을
우리가 주께 받은 것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물론 오늘날 헌금은 십일조의 개념보다 크기 때문에
어려운 성도를 돕거나 일꾼들을 돌보기 위한 것 외에도
주의 복음이 확장되는 일에 다양하게 쓰이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은 헌금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가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하게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노니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고후 9:5,7)

1.헌금은 준비되어야 합니다.
충동적으로 즉흥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계획적으로 준비되어 드려야 합니다.
주님을 위해 드리고자 하는 마음의 중심이 여기에 드러납니다.
귀한 선물은 고르는데 오래 걸리고 준비하는데 시간을 많이 들입니다.
중요한 사람에게 줄 때 더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얼마나 귀하고 중요한 분이십니까?
우리 영혼의 주인이시며 우리를 위해 그 아들을 주신 분이십니다.
그분께 드리는 헌금은 준비되어야 합니다.

2.헌금은 마음에 정한 대로 해야 합니다.
십 분의 일이라는 규칙은 우리에게 해당되지 않습니다.
그보다 적게 드린다고 하나님의 재물을 도둑질하는 것도 아니요
그보다 많이 한다고 해서 하나님께 뭔가 더 아량을 베푼 것도 아닙니다.
내게 주어진 모든 것이 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고전 4:7).

내 마음에 정한 대로 드려야 합니다.
그 마음의 중심을 하나님은 아십니다.
천천의 만만의 양들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양들을 드리는 예배자의 신령과 진정을 원하십니다(요 4:23).

당신의 헌금생활을 돌아보십시오.
당신이 드리는 헌금은 당신의 마음의 중심을 보여줍니다.

3.인색함으로, 억지로 드리지 말아야 합니다.
헌금을 하는 자의 마음 자세는 하나님 앞에서 선해야 합니다.
말라기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마지못해 드리기 위해 저는 것과 병든 것을 가져오면 안됩니다.
마치 밀린 회비를 독촉 받다가 억지로 내는 사람처럼,
자꾸 내야 한다는 마음의 압박 속에서 어쩔 수 없이 내는 사람처럼,
빨리 내고 부담을 덜어버리려는 마음으로 드려서는 안됩니다.

4. 즐겨 내야 합니다.
헌금은 주님을 향한 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만물의 주인으로 우리의 돈이 필요하신 분이 아닙니다.
헌금은 십일조와 같이 실질적으로 교회 안의 여러 가지 필요를 위해
사용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곧 하나님께 하는 예배로
사랑의 표현으로 보십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일꾼을 돌보시는 방법이며
교회 안의 가난한 성도를 돕는 방법이십니다.
주의 복음과 진리를 전파하시는 방법이십니다.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 하셨습니다(마 25:40).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세에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할 것이라 경고하였습니다(딤후 3:2).

오늘날 사람들이 재물을 사용하는데 있어서
초대교회처럼, 과거의 우리 믿음의 선진들이
인색하지 않고 즐거워함으로 풍족하게 주께 드렸던 것처럼
그렇게 드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러가지 사회 환경과 시대의 차이도 있지만,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첫사랑에서 멀어지지 않았는지
그것이 우리의 헌금생활에 드러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말세를 살아가는 우리는 우리 마음을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의 말씀을…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눅 12: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