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이 물어보시는 질문 중 하나가 바로 “판단”과 “분별”의 차이입니다.

우리가 판단은 하지 말아야 하지만, 분별은 해야 하지 않나요?

“판단”은 긍정적인 의미와 부정적 의미 모두를 가질 수 있습니다.
판단하지 말라,” “판단하고 있구나”는 말에서
분명히 “판단”은 부정적인 단어로 사용 되었습니다.

반면, ”잘 판단해서 결정해,” “판단력이 있는 사람”
이라는 말에서는 긍정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이에 비하여 “분별”은 대부분 긍정적인 의미를 내포합니다.
그래서 분별 해야 한다,” 분별력 있는 사람”
이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분별”은 그 자체적으로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하지는 않습니다.
”분별”이라는 단어 옆에 부정적인 수식어가 있어야만 부정적 의미를 갖습니다.
분별함,” “분별력 없음,” “잘못된 분별”… 이렇게 말이죠.

우리는
”분별 하지 말라”는 말은 거의 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판단하지 말라”는 말은 쉽게 들을 수 있습니다.

보통
<판단>이라는 단어를 부정적으로 사용할 때가 많고,
<분별>이라는 단어는 긍정적으로 사용할 때가 많습니다.

두 단어의 어감의 차이를 느껴보십시오.

판단하는 사람/분별하는 사람
판단하는 습관/분별하는 습관
판단하는 성향/분별하는 성향
판단하자/분별하자
내 판단/내 분별

이 칼럼을 통해서 <판단>과 <분별>의 의미를 생각해보고
그 둘을 구분하는 명백한 기준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판단>과 <분별>의 정의

먼저 정확하게 이 두 단어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이렇게 나옵니다.

<판단> – 사물을 인식하여 논리나 기준 등에 따라 판정을 내림
<분별> – 세상 물정에 대한 바른 생각이나 판단(분변)

자세히 보면 <분별>의 정의에는 “바른”이라는 단어가 사용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때문에 <분별>이라는 단어 자체는 긍정적으로 사용될 때가 많은 것입니다.
또한 “분별”이 “바른 판단”과 같은 말이라고 합니다.

반면, <판단>이라는 단어는 판정의 기준이 “논리나 기준”이라고 정의되었으나
그것이 “바른” 것인지, 바르지 않은 것인지에 대한 설명이 없습니다.
그래서 <판단>은 문맥에 따라 긍정적으로 혹은 부정적으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기준이 바르면 긍정적으로, 바르지 않으면 부정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단어가
바로 <판단>입니다
.

두 단어의 정의를 볼 때, 사실상 <판단>은 <분별>을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판단>의 범주 안에서 “바른” 기준이 적용된 것은 “분별” 혹은 “바른 판단”,
잘못된 기준이 적용된 것을 “잘못된” 판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judgment

 

<판단>과 <분별>이 성경에서 사용된 예

한글 개역개정성경에도 위와 같은 <판단>과 <분별>의 개념이
잘 드러나 있는지 살펴봅시다.

<판단>이라는 단어는 총 65절에 사용되었습니다.
신구약을 통해 <판단>이라는 단어는
긍정적 혹은 부정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구약성경에서는
대체로 여호와 하나님의 “판단”을 가리킬 때 사용되었습니다.
때문에 그 판단 기준이 옳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이 경우 “판단”은 항상 긍정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시라 그의 판단이 온 땅에 있도다(시 105:7)

여호와여 주는 의로우시고 주의 판단은 옳으니이다(시 119:137)

구약성경에 사람의 “판단”에 대해 기록된 경우
부정적으로 기록된 경우가 있는데 에스겔 16장 52절에 나옵니다.

네가 네 형과 아우를 유리하게 판단하였은즉
너도 네 수치를 담당할지니라
네가 그들보다 더욱 가증한 죄를 범하므로
그들이 너보다 의롭게 되었나니
네가 네 형과 아우를 의롭게 하였은즉
너는 놀라며 네 수치를 담당할지니라

성경은 이 “판단”을 “가증한 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에 보면 사람이 판단하는 것에 대하여 기록되었는데,
바른 기준을 가질 때는 긍정적으로
잘못된 기준을 가질 때는 부정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 하시니라(요 7:24)

위의 경우 외모로 판단하는 경우는 부정적이고,
공의로운 기준을 가진 판단은 긍정적입니다.

부정적으로 사용된 경우가 아주 뚜렷한 경우는
야고보서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약 4:11)

야고보는 재판자, 판단자는 오직 한 분,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는”
하나님이시라고 말합니다(약 4:12)

이처럼 성경에서 <판단>은 대부분 긍정적으로 사용되었지만,
잘못된 기준을 가지고 하는 판단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특히 야고보는 아주 강력하게 “판단”하지 말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분별>은 총 23구절에 사용되었습니다.
<분별>은 그 자체적으로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사용된 적이 없습니다.

계속해서 분별은 “바른” 기준을 통해 된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거룩하고 속된 것을 분별하며
부정하고 정한 것을 분별하고(레 10:10; 참고 레 11:47)

거룩하고 속된 것을 분별하는 “바른” 기준은 하나님의 율법입니다.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왕상 3:9; 참고 신 1:39; 32:28)

선악을 구분하는 “바른” 기준은 하나님의 계명입니다.

그 때에 너희가 돌아와서 의인과 악인을 분별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아니하는 자를
분별하리라(말 3:18)

의인과 악인을 구분하는 “바른” 기준,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않는 자를 구분하는 “바른” 기준,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로마서 12장 2절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2장 14절은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라고 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라고 명합니다(딤후 2:15).

요한일서 4장 1절은 거짓 선자들을 분별할 것을 명하면서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고 권고합니다.

이처럼 성경에서 “분별” 혹은 “바른 판단”의 기준은 항상
하나님이심을 보게 됩니다.

자! 여기서 <잘못된 판단>과 <분별>을 구분하는 명백한 기준이 나옵니다.

<잘못된 판단>과 <분별>을 구분하는 명백한 기준:
기준이 하나님의 말씀이면 분별이다.

“분별”(혹은 “바른 판단”)과 “잘못된 판단”을 구분하는
아주 뚜렷한 기준은 바로 그 판단의 기준이 어디에 있는가에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분별” 혹은 “바른 판단”은 늘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이 그 기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멀어지고 그 뜻을 대항하는 행위는 죄입니다.

우리는 죄를 죄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죄를 죄라고 판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바른 판단이며 분별입니다.

원수 맺는 성도가 있다면 죄라고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갈 5:20).

분쟁과 시기가 가득 찬 관계가 있다면
죄 가운데 있는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롬 16:17; 약 4:2).

투기와 술 취한 자들에게 그것은 하나님이 금하신 것이라고
말 할 수 있어야 합니다(갈 5:20-21).

사실 성도가 서로 해주어야 하는 것이 분별에 따른 권면입니다.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살전 5:14)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약 5:16)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히 10:24)

그러나 그 기준이 하나님의 기준이 아닌 경우
나의 판단은 “잘못된 판단”입니다.

저 형제는 옷을 왜 저렇게 입고 교회에 오지?

이 교회는 왜 예배시간에 피아노를 치지?

왜 저 교회는 우리가 하는 방식으로 하지 않지?

저 자매는 아이들을 왜 저렇게 입히지?

저 학생은 왜 인사성이 없지?

하나님의 기준이 아닌 내 기준으로
판단할 때 우리는 판단의 죄를 짓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서로 차별하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경고합니다.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약 2:4)

홀로 입법자와 판단자 되시는 하나님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끌어내리고 그 보좌를 꿰차고 앉아서는
자기가 만들어낸 자기 기준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형제 자매를 정죄하고 판단하는
너는 도대체 누구냐?고 야고보는 묻습니다(약 4:12)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자기 기준을 가지고
하나님이 주신 분별이라고 주장하는지 모릅니다.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은 분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 스스로의 기준으로 남을 판단하고 있는 중입니다.

분별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하나님 말씀의 기준으로 바른 판단, 분별을 한 경우에도,
그것이 아무 유익이 되지 않고 도리어 해가 될 수 있습니다.

<분별>이 유익이 되지 못하는 경우: 사랑이 없을 때

예를 들어 생각해봅시다.

한 형제가 범죄했습니다.

그것을 죄라고 말하는 것은 “바른 판단”이며 “분별”입니다.

그런데 그 형제를 찾아가
”형제! 지금 죄 짓고 있어! 출교 당하고 싶어?”

이렇게 말한다면, 이것이 바른 “분별”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분별이 아무리 성경적이었더라고 해도, 이러한 표현은 전혀 유익을 가져다 줄 수 없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2-3)

내가 성경에 대해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고
무수히 많은 책을 읽어 여러 교리에 능숙하여
여러 가지 바른 판단을 해낼 수 있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바른 판단의 말을 거침없이 꺼내면서
내 진심은 그 사람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사랑 없이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 수 있다는 충격적인 말을 합니다.

진짜 사랑의 모습은 단지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내 감정이 진심에서 우러나온다고 말해도
내가 가진 분별이 다음과 같은 모습으로 표현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짜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사랑은 온유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고,
사랑은 성내지 않으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며

모든 것을 참고 믿고 바라며 견딥니다.

내 분별은 위와 같은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야고보는 참 지혜, 위로부터 난 지혜는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약 3:17)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다고
말합니다(약 3:16).

성경은 분명히 진리를 말할 것을 명령하지만
동시에 사랑 안에 할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며(엡 4:15, 흠정역)
Speaking the truth in love

우리는 너무도 분명하고 확실한 분별을
형편없는 그릇에 담아서 상대방에게 전달할 수 있습니다.

확실한 분별을 조금의 사랑도 없이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오히려 이것은 시기와 다툼을 만들어 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리를 말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기준을 가지고 바른 분별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동시에, 우리는 사랑 안에서 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 안에서,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본을 보이신 겸손함 가운데,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배우라고 하신 온유함을 가지고
우리는 진리를 말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사도바울이 얼마나 강하게 이 진리를 디모데에게 명하고 있는지 보십시오.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 4: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