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고든은 자신의 책
「우리 목사님은 왜 설교를 못할까?」에서
오늘날 수 많은 교회의 목사들이
가르치는 일에 실패하고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데이비드 고든은 이러한 현상은
설교자가 게으르거나, 전달력이 없어서가 아니고
제대로 된 교육을 못 받아서도 아니며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서도 아니고
말씀에 대한 확신이 떨어져서 그런 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문제일까요?

무엇이 데이비드 고든으로 하여금
자신이 만난 수많은 설교자들을
제대로 된 설교를 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평가하게 했을까요?

그가 가장 첫 번째로 중요하게 꼽은 이유는 바로
많은 설교자들이 “읽는 것”에 실패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기본적이지만 가장 중요한 일은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을 말하는지 제대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은 아주 쉽게 쓰인 것이라 그냥 읽으면 다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 공부가 필요하며 왜 문맥에 따라 읽고 해석해야 합니까?’

‘어린아이도 다 알 수 있게 쓰여진 것이 성경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다음과 같은 말씀들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벧전 3:19)

예수님은 정말 죽으시고 나서 부활하시기 전에
지옥에 가서 귀신들에게 무언가 선포하신 것일까요?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마 12:31)

성령을 모독하는 죄란 무엇일까요?
무엇이길래 사하심을 얻지 못한다고 할 수 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도 씻지 못하는 죄가 있단 말인가요?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약 5:15)

이 말씀은 병든 자를 주께서 일으키시겠다는 약속인가요?
만약 그렇다면 신실한 형제 자매들이 병으로 죽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만약 이것이 들어주실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말씀이라면
왜 하나님은 확실하지도 않은 약속을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기록하셨을까요?

이 외에도 수 많은 난해구절들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벧후 3:16)

베드로 당시에도 말씀을 억지로 해석하고 풀어서
망친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경의 어려운 구절들은,
성경은 마땅히 공부해야 하며
본래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부지런히 연구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올바른 설교를 위해서는
반드시 성경 본문 자체에 대한 바른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오늘날 서로 대화하는 중에도 서로 어떤 의미로 그렇게 말했는지
되묻는 경우가 종종 생깁니다. 실시간 대화에서도 그런 일이 쉽게 생깁니다.

그런데 수 천년 전에 고대언어 히브리어와 헬라어로 쓰인 성경,
팔레스타인 지역의 정서와 문화와 역사가 담긴 글을
아무런 공부 없이 읽으면 다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네! 성경에 담긴 진리는 단순하고 명확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본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오래 생각해보고 연구하며 부지런히 공부하는 것은
성경의 진리를 전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입니다.

에스라가 이스라엘 백성을 어떻게 가르쳤는지 살펴보면,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에게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니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느 8:8-9)

율법책이 쓰이고 나서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다른 나라의 포로생활을 오래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본래 자신들에게 주어졌던 율법책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해석과 설명이 필요했습니다.

학사 에스라가 그것을 연구하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또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어려운 부분들은 그냥 지나치고
중요한 내용 예를 들면 서로 사랑하라,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 등을
잘 묵상하고 순종하며 살면 되는 것 아니겠냐?

다 자세히 알 필요가 있냐, 그냥 중요한 것만 잘 따라가면 된다

사실 데이비드 고든이 오늘날 설교의 문제점으로 삼은 것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본문 내용의 문맥을 읽는 것에 실패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성경을 대충 읽게 됩니다.
본문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고 그 안에 담긴 진리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하기 보다
한 번 살짝 훑어보고 아주 일반적인 원리들만 가지고 설교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설교자가 디모데후서 2장 22절을 읽고 설교를 준비한다면

또한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

한번 쓱 훑어 보고는, 아! 청년들에게 성적인 유혹을 피하라고 가르치면 되겠구나!
라고 설교를 준비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진리를 온유함으로 가르치며(25절), 젊은 혈기로 교만함을 드러내지 말라는
내용이라는 것을 문맥을 읽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중하게 본문을 읽고 해석하지 않을 때
아주 쉽게 성적 욕망에 대한 설교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고 로마서 5장 8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성경을 대충 읽는 설교자들은 이 두 말씀을 한 번 슬쩍 읽어보고는
아! 둘 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말씀이구나! 하고는
엄연히 본문은 서로 다른 맥락과 문맥 안에서
서로 다른 저자와 화자를 통해 주어진 것임에도
똑같은 설교를 만들어 낸다고 고든은 지적합니다.

사실 이런 수박 겉핥기 식의 성경읽기는
심각한 문제를 초래합니다.

수박 겉핥기 식의 성경읽기와 공부는
하나님이 주신 말씀의 본래 의미를 찾아가려는 노력을 게으르게 합니다.

하나님이 원래 의도하신 말씀의 의미을 온전히 파악하는 일에 소홀히 하여
말씀을 대강 살펴보고 대충 전하는 것은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더하거나 빼는 참으로 무서운 일입니다.

사실 그래서 말씀을 전하는 일을 하는 자들은
이러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말씀에 담겨있는 모든 단어의 의미와 문맥과 역사적 배경과 문화적 배경을
열심히 부지런히 공부하여 말씀의 본래 의미를 파악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할 때

자신의 직감과 사고에 의존하게 되고
지극히 감정적이고 주관적인 해석을 만들어 내기 아주 쉽습니다.
”이 구절이 나에게는 어떤 의미인가?”
”이 구절에서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는가?”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집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의 본래 의미에서
더하거나 감하지 않기 위해서
설교자는 더욱 더 본문 내용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강해설교를 위한 준비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설교자들이
성경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펼칩니다.

그들은 성경을 읽습니다.

그들은 성경에 나온 단어를 강조하여 가르칩니다.

성경을 펴서 읽고
”사랑,” “겸손,” “섬김,” “봉사” 등의 단어에 집중하여
그들 생각을 가르칩니다.

여기 저기서 잡다한 예화들을 덧붙입니다.

마더 테레사도 나오고, 부처도 나오고, 공자도 나옵니다.
그들 다 “사랑’’, “자비”, “용서”의 예화로 사용되고
우리의 따라야 할 본이라고 말합니다.

때로는 세상적으로 성공한 부자들, 정치가들, 사회 개혁가들의
이름도 나옵니다.

미국 저 어디 마을 구석에서 일어난 감동적인 이야기도
청중의 마음을 울리기 위해 사용됩니다.

그러나 정작
본문이 무엇을 말하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배경에서 그런 말씀을 주셨는지,
예수님의 명령이 정확하게 어떤 의미였는지,
그 명령을 들은 자들의 반응이 어땠는지는 관계 없습니다.

오늘날 그 말씀이 어떻게 우리 삶에 교훈을 줄 수 있는지,
살아있는 말씀의 내용을 말해 주지 않습니다.

이런 식의 설교는 결국 말씀 자체의 권위를 무너뜨립니다.

본문에 드러나는 몇 가지 단어에 집착하거나
본문의 개념(컨셉)이나 주제만 따와서 가르치는 것은
결국 본문 자체에 깊고 풍성하게 담겨있는 말씀의 진리를 훼손시킵니다.

공자와 맹자의 도덕적 사상이나
철학가와 사회운동가의 강력한 주장을 듣는 것과
똑같은 권위와 힘으로 듣는 이에게 다가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정도의 권위를 갖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산상수훈을 마치셨을 때 사람들은 그 권위에 놀랐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마 7:28-29)

예수님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던 것은 예수께서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셨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요 14:24)

오늘날 설교에 힘이 없고 권위가 없는 이유는
말씀을 가르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참된 권위와 능력과 힘은 설교자의 목소리와 화술에서 오지 않습니다.
청중을 들었다 놓는 호소력과 감정에 있지 않습니다.
심금을 울리는 예화나 간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들이 물론 중요합니다만, 근본적으로
참된 권위는 하나님의 권위가 담겨있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강해설교는 매우 중요합니다.

성경 자체가 그 권위를 가지고 성도에게 전해질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바로
강해설교이기 때문입니다.

강해설교는 말씀을 인용하여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말씀 자체가 말씀하고자 하는 바를 전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당신의 진리를 말씀하시도록
강해 설교자는 말씀 본문의 의미를 정확하게 분별하여
전달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권위가 드러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