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13장은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마지막 편지의 마지막 장입니다.
바울은 여러 가지 권면을 마무리 하면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이 땅에서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인생은
평생 그리스도인으로 살았지만
정작 참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으로 밝혀진 인생일 것입니다.
차라리 자기 욕심과 욕망을 좇아
이 땅의 인생을 즐기며 살다가 영원한 멸망 가운데 빠지는 인생이
더 나을 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그나마 이 땅에서 만큼은 자기 원대로 살았으니까요.
참된 믿음을 갖지 못한 채
종교인의 삶을 살고 있는 자들은
이 땅에서 자기 스스로를 속이며 종교적인 율법으로 삶을 억누르다가
영원한 형벌을 고스란히 받게 될 끔찍한 인생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은 인생이 있다면
바로 이러한 인생일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정말 믿음 가운데 있는지 스스로 시험해보라고 명합니다.
“당신은 정말 구원받았습니까?”라는 질문에
분노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나를 무엇으로 보고 그런 말을?”이라고 반응할 필요가 없습니다.
바울도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그렇게 묻지 않았습니까?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자기 믿음과 신앙에 대한 끝없는 불신과 의심은 사양해야 하지만
내 믿음을 확증하고 시험하는 일은 신자에게 꼭 필요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믿음은 영생을 건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믿음이 참되면 영생을 얻을 것이요
당신의 믿음이 거짓이라면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기독교를 보면 우리가 점검하고 확증해야 할 믿음이
이렇게 중대하고 심각한 일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에 대해 믿고 안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일에 집회시간에는 믿는 사람의 옷을 입고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믿지 않는 사람과 전혀 다르지 않은 삶을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미지근한 삶과 하나님에 대한 적당한 지식으로
만족하는 사람들…
부모와 자녀의 신앙에 기대는 사람들…
적당히 잘 살고 있으니까 알아서 잘 되겠지…하는 마음으로
희미한 기준으로 자기 믿음과 신앙을 대충 점검하는 사람들…
한 대형교회 목사님은 자기 교인의 60%만 구원 받았을 것이라 말하였고
한국 교인의 10%만 참된 믿음을 가진 자일 것이라 말한 신학자도 있었습니다.
만약 그 신학자의 말이 사실에 가깝다면,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거짓 믿음을 소유한 90%에 포함됩니까?
아니면 참된 믿음을 가진 10%에 포함됩니까?
당신의 믿음을 시험해보십시오.
스스로 확증하십시오.
바울은 고린도후서 13:5절에서 이 시험의 기준을 말해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이것이 바로 참된 믿음을 소유한 자의 특징입니다.
그들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신 것을 아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소아시아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벧전 1:8-9)
소아시아 성도들은 육신적으로 예수를 본 적도 경험한 적도 없었으나
그들의 참된 믿음은 예수를 사랑하는 마음을
그들 속에 말할 수 없는 기쁨과 함께 넘치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이미 그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것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요 15:9-11)
소아시아 성도들 마음에 넘쳤던 기쁨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 안에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께서 기쁨을 충만케 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육신적으로 보지 못한 예수를 경험으로 체험하고 느꼈던 것입니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요 14:21)
계속 반복되는 말이 보이십니까?
예수가 당신 안에 계신 것에 대한 참된 증거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당신의 사랑입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예수님은 배도한 베드로를 불러내시어 세 번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참된 믿음을 소유한 자들은 예수를 사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에 감사하며
그분을 인격적으로 알고 사랑합니다.
베드로처럼
”주님께서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지 아십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신학적 용어를 많이 아는 것이 참된 믿음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교리에 대해 정확한 분별을 한다고 해서 참된 믿음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에 열심히 나오고 여러 가지 봉사를 하는 것도 결정적 증거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바로 참된 믿음의 증거입니다.
그러나 저는 한 가지 더 반복되는 말이 있다는 것을 잊지 않기 원합니다.
바로 “순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당신의 사랑은 반드시
순종을 통해 열매 맺습니다.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야고보는 그 독자들에게 참된 믿음을 확증하라고 말합니다.
마치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야고보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약 2:18)
행함이 없는 믿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약 2:26).
그 자체가 죽은 것입니다.
주여 주여 아무리 외쳐도,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것을 믿는다고 강력하게 주장해도
야고보는 그것은 귀신도 믿는 사실이라며
특별할 것 없다고 말합니다(약 2:19).
예수께서도 주여 주여 하는 자들이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마 7:21).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을 가진 자들, 즉 참된 믿음을 가진 자들은
순종의 삶으로 그 열매를 드러내는 자들입니다.
행함으로 구원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행함이라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내 안에 계신가 확증하는 방법은
하나님 말씀에 내가 얼마나 순종하는 지 점검하여
내 안에 그리스도를 향한 참된 사랑이 있는지 확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이 없다는 것은 치명적인 영적 상태를 말해줍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증거인데
하나님의 계명이 무엇인지 배우거나 알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아내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아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아서 그것을 들어주기 위해 노력한다고 말하면서
정작 아내가 원하는 것을 말할 때 듣지 않는 남편과 같습니다.
참 사랑은 상대방의 말을 듣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3장 5절 마지막을 이렇게 마무리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영어로는 “unless, of course, you fail the test”(NIV)입니다.
자기 믿음을 시험해 본 결과 실패라는 답을 얻은 것입니다.
영원한 형벌의 인생을 살고 있다는 결과를 낸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반드시 회개하고 돌이켜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합니다.
참된 믿음을 달라고 구해야 합니다.
죄 용서함을 받고 참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당신은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까?
당신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십니까?
당신은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십니까?
그 사랑의 증거로 순종의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날마다 자신에게 물어야 할 질문이며
날마다 전해야 할 복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