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교회에서 목회하는 아버지와 어머니에게서 태어났습니다. 자연스럽게 매주 수요일에는 수요 예배, 금요일에는 기도 집회(지금은 없어졌지만), 주일에는 주일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매주 반복되는 일상이 되었지요. 집에서 교회까지는 2.5km 정도 거리였는데, 아주 어렸을 땐 집에 차가 없어서 부모님만 걸어서 수요일과 금요일 집회에 참석하실 때도 있었습니다. 자라면서 주일학교를 시작으로 학생회, 청년회에 올라가기 시작했는데, 기억이 생생하진 않지만, 대체로 형, 누나, 친구, 동생들과 어울리는 것을 무척 즐거워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을 진짜 제 가족같이 여겼습니다.
부모님은 거의 모든 교회 집회에 참석하셔야 했기 때문에 저는 그렇게 하는 것이 성도의 (행복한) 의무라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갖게 되었습니다. 몇 번 교회 가기 싫어했던 때도 기억나지만(그래서 하나님께 ‘오늘은 교회 안 가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한 적도 있어요), 부모님과 교회 선생님에게 교회의 지체라면 당연히 교회의 모든 집회에 참석하는 것이 옳다고 배웠기 때문에 그것이 어느새 저의 신념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고등학교를 수원에서 자취하면서 다닐 때도 토요일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친구와 버스를 타고 당시 토요일 저녁에 있었던 학생회에 거의 끝마칠 때쯤 참석하더라도 빠지지 않으려고 부지런히 달렸던 기억이 납니다(오산에서 2시간에 한 번 유평 마을로 오는 버스를 타야 했기 때문에 수원에서 오산까지 운행하는 버스에서 어느 시점에 내려서 터미널까지 달려가야 할지 늘 고민해야 했지요). 대학교 땐 대전으로 내려갔는데, 수요일엔 그곳에서 앞으로 다니기로 인사드린 대전 대덕 교회에 열심히 참석했고, 금요일에 유평으로 올라와 토요일 청년회와 주일 예배를 모두 마치고 월요일 아침 다시 내려가기를 5년 동안 반복했습니다. 한 번 국가고시를 봤을 때를 제외하고는 중간, 기말고사 기간에도 수요일과 주말, 양쪽 교회에 빠짐없이 참석했습니다.
어쩌면 저의 짧은 간증이 의도치 않게 자랑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자랄 때 국민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아주 특별한 일이 아니면 무조건 등교하는 것이 자랑이 아니라 당연한 일이었던 것처럼(아파서 쓰러지더라도 학교 와서 쓰러지라고 했었지요), 당시엔 교회 출석도 그만큼 모든 성도에게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하나님의 은혜로 제가 자라난 교회를 목회하는 일로 섬기면서, 여전히 학교는 대체로 가는 것이 당연한 곳으로 여겨지지만, 교회 참석에 관한 생각은 많이 달라진 슬픈 현실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남편이 출근해서 아이를 데리고 홀로 참석하기 어려워서, 어두울 때 운전하는 것이 힘들어서, 피곤하여 쉬고 싶어서, 교회 나갈 기분이 아니어서, 친한 사람이 없어서, 가족 여행을 가야 해서, 집에서 온라인으로 예배드리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아서 등 참석하지 못하는 이유는 천차만별입니다. 어떤 이유는 합당한 것처럼 들리고, 또 어떤 이유는 핑계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목회자로서 저는 거의 대부분 ‘그러면 다음 주에는 꼭 뵙기로 해요’라고 마음을 편하게 해주려고 애쓰는 편입니다. 정말 중요한 건 어찌 되었든 교회에 끌려 나오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지체로서 함께 모이기를 사모하는 자발적인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과거엔 아무 말 못 했지만, 요즘엔 아이들이 부모에게 당돌하게 묻습니다. ‘저는 성인이 아닌데 왜 성인 예배에 참석해야 하나요?’, ‘저는 왜 부모님이 선택한 신앙을 억지로 강요받아야 하나요?’ ‘주일예배는 참석할 테니, 학생회나 청년회는 빼주세요.’ 이런 당돌한 요구에 부모가 지혜롭게 답하고 자녀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려면, 부모 먼저 자신이 왜 교회의 모든 집회에 참석하기를 힘쓰는지(만일 그렇게 하고 있지 않다면 어떻게 그런 선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지) 분명한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성경을 통하여 우리가 교회의 지체로서 모이기를 힘써야 하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는 사실을 말씀드리기 를 원합니다. 이것이 사랑하는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족들이 붙드는 아름다운 신념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첫째, 모이기를 힘쓰는 것은 명백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이 옴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5)
이 말씀은 교회 출석과 관련하여 많이 인용되는 말씀이라 익숙하실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성령의 감동으로 쓴 이 권면에서 우리는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을 봅니다. 그들은 교회로서 모일 때 그 자리에 함께하지 않는 것이 습관이 된 사람들입니다.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서가 아니라 모이는 것을 그렇게까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아서 불참이 습관이 된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그날이 가까이 옴을 볼수록”,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속히 오실 것이기 때문에 “더욱 그리하자”라고 권면합니다. 37절로 내려가면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라고 선언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습관적으로 모이지 않는 잘못된 태도를 버리고 “오히려”(“더욱”으로 번역된 단어의 또 다른 뜻) “많이”, “충분히”(“그리하자”의 또 다른 뜻) 모여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오실 때가 가까울수록 모이는 것을 덜 힘쓸 것이 아니라 더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이는 일에 있어서 후퇴가 아니라 진보해야 합니다. 왜 그럴까요?
이어서 38절에서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하셨느니라”라고 하박국 2장 3-4절을 인용하여 말씀합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인용한 말씀은 하나님께서 선지자 하박국에게 직접 기록하라고 명하신 것인데, 믿음을 가진 하나님의 백성들이 절대 뒤로 물러나지 말 것을 엄히 요구하십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리는 것은 뒤로 물러나는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오순절에 시작된 교회는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는 믿음의 열심을 보였습니다(행 2:46). 그러나 40여 년이 지나 히브리서 기자가 이 권면을 기록할 때, 어떤 사람들의 믿음이 뒤로 물러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라고 경고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는 “뒤로 물러나 멸명할 자”가 아니라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입니다(39절). 후퇴하는 자가 아니라 전진하는 믿음을 가진 자입니다.
1990년대 모이기를 힘쓰는 일에 있어서 우리는 확실히 지금보다 앞서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많이 뒤처졌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보는 현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이 이것을 기쁘게 여기지 않으십니다. 저는 단순히 출석률이 높고 낮은 상태를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믿음이 전진하고 있는지 아니면 후퇴하고 있는지 진지하게 점검해 봐야 한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깊이 생각하면서 에베소 교회에 주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이 생각났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진리의 말씀이 선포되고 실천되는 교회였습니다.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않고 자칭 사도들을 분별하여 거짓을 드러낼 정도였습니다(계 2:2). 또한 많은 수고와 인내가 있는 교회였습니다(계 2:2, 3). 그런데 주님은 그들에게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계 2:4). 어떤 부분에 있어서 그들은 뒤로 물러난 것입니다. 예전 같지 않아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우리가 모이는 일에 있어서 혹시 그렇지 않은지요. 처음 가졌던 그 마음을 잃어버리지 않았는지요. 정확한 의미와 분별이 전달되는 말씀이 살아있는 교회, 많은 수고와 인내와 헌신이 있는 교회라고 자랑하지만, 모이는 일에 있어서는 우리도 어쩌면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라는 뼈아픈 질책을 받을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중에는 훨씬 더 많은 성도님들이 모이기를 힘쓰고 있다는 사실에 참으로 감사가 됩니다. 그분들 마음에 오실 주님을 사모하며 기다리는 마음, 주님께 진일보한 믿음을 보여드리고 싶은 아름다운 마음이 계속해서 발견되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히브리서 기자가 “어떤 사람들”을 잊지 않고 “권하”라고 명령한 것처럼, 저는 모이기를 힘쓰는 일에서 잠시 뒤처진 분들을 사랑으로 권면하기를 원합니다. 조금 더 힘을 내십시오. 뒤로 물러나지 말고 앞으로 나오십시오.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계 3:19).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기를 누구보다 기뻐하십니다. 성도의 삶은 오직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은 삶이 아닙니까? 주께서 자기 목숨을 내어주신 사랑을 우리에게 주셨을 때, 우리 삶을 그분께 드리기로 우리가 함께 결단하지 않았습니까? 자녀에게 지혜롭게 사는 법을 가르쳐주기 원하신다면, 지혜의 근본인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가르쳐주십시오(잠 1:7). “아들과 손자들이 평생에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하나님이 약속하신 형통과 축복을 누리기를 원하신다면 “부지런히 가르치”셔야 합니다(신 6:2-9). 그들의 참된 행복을 위해서 모이기를 힘쓰는 것이 부모의 확고한 신념 그리고 그들 자신의 신념이 되도록 말과 본이 되는 삶으로 부지런히 가르치십시오. 그러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잠 22:6). 그들의 믿음이 후퇴하지 않고 전진할 수 있도록 그들을 이끌어 주십시오.
(2부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