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신뢰할 만한 분인가?’라는 질문에 관한 성경의 답은 명백히 ‘그렇다’이다. 먼저는 하나님의 신성이 이를 확증한다. 하나님은 거짓이 없으신 분으로 말씀하신 모든 것이 항상 진실하다(민 23:19). 하나님은 주권적인 분이시라서 그분이 계획하신 뜻대로 하나의 오차 없이 모두 이루신다(사 14:24). 하나님은 전지하시고 전능하셔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욥 42:2). 알지 못하거나 어쩔 수 없어서 계획하신 것을 이루지 못하게 될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사 46:10). 하나님은 선하시고 인자하시고 사랑이 풍성하시므로 모든 것을 합력하여 반드시 우리의 선을 이루신다(시 23:6; 롬 8:28). 둘째로 하나님이 신뢰할 만한 분이시라는 것은 역사적으로 검증된 사실이다. 아담과 하와에게 맺으신 언약, 아브라함에게 맺으신 언약, 노아와 맺으신 언약,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과 맺으신 언약에 하나님은 언제나 신실하셨다고 성경의 역사는 증언한다(시 100:5). 마지막 날에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심으로 그 피로 맺은 새 언약은 하나님의 성실하신 사랑을 확증하는 역사적 사건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그분을 영원히 신뢰할 수 있는 이유를 제공한다(롬 5:8).
환경과 상황은 하나님을 의뢰하는 것을 방해할 때가 많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발견하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은 어떤 일을 당신의 백성에게 행하시는가?’에 관한 대답은 우리가 하나님을 의뢰하게 만드는 강력한 근거가 된다.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고,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며,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말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자는 그래서 항상 ‘하나님은 신뢰할 만한 분이다’라고 고백한다. 예수님은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라고 말씀하셨다(마 7:24-25). 인생에 갑작스로운 비와 창수와 바람이 불어닥칠 때,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는 주추를 반석에 놀은 집처럼 무너지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에 그 믿음을 두고 그 믿음에 따라 순종하는 삶을 사는 자가 바로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다. ‘나는 하나님을 신뢰합니다’라는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정말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는 다음과 같은 순종의 열매를 맺는다.
감사
하나님의 백성은 구원의 은혜를 받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된 자들이다(골 1:12). 감사가 사라지는 이유는 명백한데, 하나님께 감사보다는 원망과 불평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지금 허락하신 일들이나 반대로 허락하지 않으시는 일들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거나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없으므로, 감사는 줄거나 사라지고, 불만이 터져 나오고 쌓여간다. 그러면 누가 환경과 상황을 초월하여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릴 수 있는가? 바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다. 환경과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하신 말씀을 굳게 믿는 자는 그 믿음의 열매로서 감사를 맺는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골 2:6-7).
‘그래도 나는 감사해요’라고 반복하여 말한다고 해서 실제로 “감사함”이 “넘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좋게 보이려고 혹은 신실한 성도는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의무감으로 억지로 감사를 짜낼 수도 있다. 하지만 진정한 순종의 열매인 ‘감사’는 반드시 말씀에 깊이 뿌리내린 견고한 믿음으로부터 자발적으로 흘러나와야 한다. 진짜 감사하는 마음이 넘쳐서 감사를 표하는 것이다. 누가 봐도 감사하지 못할 상황을 만났을 때도 진정한 감사를 표할 수 있을까? 있다! 상황이 아니라 그 상황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 말씀을 굳게 믿을 때, 가능하다. 우리는 의사가 날카로운 칼로 우리 몸을 찢고 잘라내도록 허락하면서 그가 우리 몸에 한 모든 일에 감사한다. 결국 우리에게 건강한 몸을 주기 위하여 수고하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모든 것이 그렇다. 모든 것을 통하여 선을 이루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는 범사에 진정으로 감사할 수 있다(살전 5:18).
예배
감사와 예배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예배한다. 하나님의 거룩하심, 무한하심, 편재하심, 전지하심, 전능하심 등 하나님이 지니신 신성과 능력에 감탄하며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높여 찬양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예배드린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일에 진정한 감사를 예배를 통하여 표현하는 것이다: “내가 주의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며 주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으로 말미암아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이는 주께서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보다 높게 하셨음이라”(시 138:2).
예배는 두 가지 인식을 반드시 요구한다. 하나는 앞서 말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바르게 인식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그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바르게 인식하는 것이다. 우리의 예배는 첫 번째 인식 곧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바르게 아는 것으로 시작하고, 두 번째 인식 곧 나의 어떠함을 바르게 아는 것을 통하여 감사의 깊이를 더하게 된다. 쉽게 말하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영원한 심판과 저주를 받아 마땅한 자신의 참모습을 바르게 인식할수록 하나님이 베푸신 모든 것이 하나하나 감사의 제목이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과 예배는 그래서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 우리는 왜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일에 실패하는가? 하나님과 그 앞에서 우리를 바르게 인식하는 데 실패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미워하는 어떤 일을 허락하신 하나님은 더 이상 위대하거나 선하신 분이 아니라고 인식되고, 그 앞에 선 우리 자신도 이 정도의 돌봄과 대우를 받기엔 너무나 소중하고 가치 있는 존재라고 인식될 때, 우리는 예배의 동력을 잃어버린다.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과 그 앞에서 자신의 참모습을 바르게 인식하는 자로서, 언제나 찬양과 감사받으시기 합당하신 하나님께 영과 진리로 예배드린다. 형식적이고 무료한 공예배, 하나님을 부정하는 자와 다를 것 없는 삶의 예배를 드리고 있다면, 당신은 사실상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가 아니다: “너희 중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종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자가 누구냐 흑암 중에 행하여 빛이 없는 자라도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며 자기 하나님께 의지할지어다”(사 50:10).
겸손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에게 ‘겸손’을 찾아볼 수 없다면, 앞서 우리가 다룬 감사와 예배의 열매도 거짓일 가능성이 높다. 감사와 예배 모두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참 위치를 자각할 때 생기는 열매라서 그렇다. 겸손은 자신을 낮추는 것과 동의어인데, 쓸데없이 자신을 비하하고 멸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합당한 위치까지 바르게 낮추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의 합당한 위치는 무엇인가? 영원한 형벌 그리고 죽음이 아닌가? 지은 모든 죄에 대한 대가를 하나도 빠짐없이 치러야 하는 자리가 우리에게 마땅한 자리 아닌가?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 되었다고 해서 우리가 받은 모든 은혜가 당연한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함을 받은 자의 자리 역시 풍성한 은혜를 내려주신 분 앞에서는 한없이 낮고 또 낮은 자리다.
감사와 예배가 사라진 마음에서 ‘겸손’을 찾아보기 어려운 현실은 ‘이런 삶을 허락하신 분을 어떻게 예배할 수 있나요?’, ‘이렇게 나를 힘들게 하신 분께 감사할 것이 뭐가 있나요?’라는 흔한 반응 속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은 창조주와 구원자로서 피조물이자 구원받은 자들의 참된 예배를 마땅히 받으셔야 한다. 하나님은 영원한 형벌과 심판으로부터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독생자를 아낌없이 내어주신 그 사실 하나만으로 영원히 감사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 그런데도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않고 그분을 영화롭게 하지도 않는 것은 죄인의 교만한 본성이다(롬 1:21).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는 겸손하다.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라고 겸손히 고백하는 자에게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굳은 신뢰를 발견한다(욥 1:21). 하나님을 의뢰할수록 우리는 더 합당한 우리의 자리를 찾아갈 수 있다.
간구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잘 요청하지 않는다. 지금까지의 언행이 대체로 믿음직하더라도 현재 불신의 대상이 된 사람에게는 구하는 것을 줄 수 있는 건지, 주고 싶어는 하는 건지 영 미덥지 않기 때문에 구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을 때,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지 않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약 4:2-3). 그런데 다윗을 비롯한 많은 시편 기자는 구할 수 없는 중에 구하고,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란다. 탄식하고 호소하면서도 하나님께 둔 믿음을 놓지 않는 것이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다고 평가받는다(롬 4:18). 그의 삶은 하나님을 의뢰하기 위한 발버둥으로 채워져 있다. 약속하신 후손을 바로 주지 않으셨을 때, 그는 종들 가운데 하나를 후손으로 삼으려고 했고, 또 아내의 여종 사이에서 난 자식으로 대체하려고 하기도 했다. 약속의 자녀를 낳아줄 아내를 누이라고 두 번 속여서 빼앗길 뻔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인생의 단련으로 인하여 아브라함의 믿음은 견고해졌고, 하나님 말씀을 붙들어 자녀를 바치라는 명령에 순종하기에 이른다. 아브라함은 아무것도 바랄 수 없는 광야 한 가운데서 하나님 말씀을 믿음으로 간절히 구하는 자가 된 것이다.
하나님께 더이상 구하지 않는 사람의 마음엔 불신이 심겨 있다. 하나님이 좋은 것을 주실 수 있는지, 주시려고는 하는지 영 미덥지 않기 때문이다. 그동안 느꼈던 실망과 좌절에 하나님을 의뢰하기를 포기한 것이다. 이런 면에서 하나님께 구하지 않는 것, 탄식하지 않는 것, 부르짖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증거가 된다. 아브라함처럼 반평생이 될 수도 있다. 어쩌면 평생 하나님께 호소할 수도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응답하실 것이고, 그것이 우리가 바라는 것이나 바라는 때와 다를 수 있지만, 중요한 건 계속해서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그분을 신뢰하는 자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는 믿음으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실체를 끊임없이 바라보고 구하며 살아가는 자다.
용서
감사, 예배, 겸손, 간구는 그 대상이 하나님이지만, 용서는 그 대상이 사람이다. 그러나 용서도 나머지 네 가지 열매와 더불어 하나님을 의뢰하는 것의 결과라고 충분히 말할 수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범죄한 것 때문에 상처받고 피해를 본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어?’라는 판단과 정죄가 일어난다.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을 당한 것처럼,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말을 들은 것처럼 괴롭고 화가 나고 답답하다. 그런데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는 자신이 당한 억울하고 고통스러운 일까지도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된 것임을 인정한다(엡 1:11). 그리고 그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실수로 허락하시거나 악의를 가지고 계획하신 것이 아니라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려고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계심을 굳게 믿는다. 그래서 용서할 수 있는 견고한 토대를 세운다. 분명 죄지은 자의 의지적인 선택이고, 악한 생각과 행동이 빚은 결과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모든 것보다 훨씬 크시고 그 모든 것으로 반드시 선을 이루어내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용서할 수 있는 것이다.
용서하기를 끝까지 거부하는 자는 그래서 그 용서하지 못하는 죄를 사람에게만 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도 짓는 것이다. ‘나는 당신이 허락하신 일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고, 당신이 이것으로 무슨 선한 결과를 내신다는 것도 믿을 수가 없어요’라고 말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라고 분명히 말한다(히 11:6).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그분이 우리가 행한 일에 보상하시는 분이라고 믿는다면, 우리는 용서할 수 있다. 용서할 수 있도록 사랑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를 구하려고 부지런히 하나님을 찾을 수 있다. 용서하지 않는 자는 사실상 겸손히 하나님을 구하는 일과 감사로 충만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도 문제가 있기 마련이다. 용서의 부재는 하나님을 의뢰하는 일에 반드시 실패를 가져온다.
결론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라는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다. 하나님을 진실로 의뢰하지 못하면서도 얼마든지 ‘감사합니다’, ‘예배합니다’, ‘간구합니다’, ‘겸손하게 나를 낮춥니다’, ‘용서합니다’라고 앵무새처럼 소리 낼 수 있다. 사도 베드로는 우리 “믿음의 확실함”이 반드시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라고 확신한다(벧전 1:7). 그러면서 “불로 연단하여” 얻는 금보다 더 귀하다고 말한다. 그렇다. 우리 믿음은 매일 하나님이 허락하신 연단을 통하여 정결해지고 있다. 순전한 믿음은 진정한 감사와 예배와 용서와 겸손과 간구를 낳는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최종적인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는 것으로 우리 믿음의 확실성을 궁극적으로 발견할 것이지만, 지금 하나님이 허락하신 여러 가지 시험 가운데 감사와 예배와 겸손과 간구와 용서를 맺는 것으로 그 믿음이 하나님의 말씀에 견고하게 심겨 있음을 확신할 수 있다. 당신은 정말 하나님을 의뢰하고 있는가? 말이 아니라 당신 삶에서 맺히는 순종의 열매로 답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