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에 이어서…)

둘째, 모이기를 힘쓰는 것은 하나님이 있으라고 하신 곳에서 충성하는 일입니다

저는 2013년 목회를 시작하면서부터 청년회를 맡아 섬기고 있습니다. 청년회는 ‘작은 교회와 같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교회 전체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요소가 청년회 안에서도 발견됩니다. 모이기를 힘쓰는 부분도 그렇습니다. 안타깝게도 적지 않은 청년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교회를 떠납니다. 아주 가끔 부모를 위하여 주일에 잠깐 교회에 참석해줄 때도 있지만, 부모의 신앙을 떠나 자기 신앙을 좇아 교회 밖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공예배는 잘 참석하는 편이지만 청년회에서 거의 보지 못하는 청년들도 있습니다. 학생회까지는 부모에 의하여 약간의 의무감을 가지고 참석했지만, 청년회는 개인의 선택이라고 여기는 것 같습니다. 요즘엔 학생회도 ‘나오는 친구는 계속 나오고, 안 나오는 친구는 계속 안 나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자녀가 학생회에 참석하는 것을 부모가 그렇게까지 신경쓰지 않거나 혹은 자녀가 원치 않는 것을 어찌할 수 없어서 그럴 수 있습니다. 거듭나지 않은 십대 자녀를 교회에 데리고 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과제인지요. 그들을 교회 학교까지 보내는 것은 더욱 부담이 되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포기하지 마십시오. 부모는 자녀의 참된 행복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습니다. 가장 행복한 인생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모든 사람의 본분대로 사는 인생입니다(전 12:13). 본분에서 벗어난 인생은 헛되고 헛된 인생이고 그 끝에 모든 악한 행위와 은밀한 일에 대한 심판을 받지만, 그 본분대로 사는 인생은 하나님 주신 인생의 선물과 몫을 즐겁게 누리고 결국엔 선한 행위에 관하여 상을 받습니다(전 12:14). 구약 시대 하나님의 백성은 부모로서 자녀를 하나님을 경외하는 백성으로 길러내야 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녀에게 신앙의 자유를 주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든지 바알을 섬기든지 마음대로 해도 좋다’는 관용을 베풀지 않았습니다. 팔일 만에 할례를 주는 것으로 그들의 신앙은 정해졌습니다. 부지런히 하나님 경외하는 법을 배워야 했습니다. 물론 육신의 할례가 아니라 마음의 할례가 더 중요합니다(신 10:16). 유대인이라고 해서 모두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 참 유대인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참 백성이 되는 것이었습니다(롬 2:28-9). 그러나 부모가 할 일은 분명했습니다. 자녀가 마음의 할례를 받을 수 있도록, 그래서 참 유대인으로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도록 최선을 다하여 길러내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부모 아래 태어난 자녀들은 참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라날 수 있는 좋은 배경을 얻은 셈이죠. 죄와 허물로 죽은 자들은 스스로 하나님을 선택하지 않습니다(엡 2: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습니다(롬 3:10).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부모를 만난 자녀는 어려서부터 하나님을 배울 수 있고 또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얻습니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에서 나는데, 그 말씀을 말과 삶으로 들을 수 있는 수없이 많은 기회를 얻습니다(롬 10:17). 그리스도 안에 있는 부모에게 하나님은 한 가지를 요구하셨습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엡 6:4). 구약 시대 하나님의 백성처럼 부지런히 자녀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권면하는 것이 오늘날 하나님 백성의 의무입니다. 단지 의무가 아니라 자녀가 평생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말씀에 순종하고 이생에서 복을 누릴 뿐만 아니라 다음 생에서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특권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 귀한 특권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자녀의 영혼이 귀한 만큼 부모는 자녀 앞에 하나님 말씀을 두어야 합니다. 말씀을 듣고 경험할 수 있는 곳으로 자녀를 부지런히 보내야 합니다.

자녀가 공부하고 싶어 하지 않거나 학교에 가기 싫어하기 때문에 그들이 원할 때만 공부하게 하고 등교시키는 부모는 없습니다. 자녀가 잘되기를 진심으로 바라기 때문에 어르고 달래고 때로는 경고하고 질책하면서 그들이 스스로 학습할 수 있도록 권위를 행사합니다. 그들의 육체를 연단하는 것으로 남은 생애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유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라고 말합니다(딤전 4:8). 이 말씀을 진실로 믿는 그리스도인 부모는 자녀를 공부시키는 열심보다 훨씬 더 큰 열심으로 자녀에게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고 경건을 배울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자녀를 보내려고 애쓸 것입니다. 그들의 금생과 내생에 약속하신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성인이 되어서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시점이 오면, 청년회나 주일 예배를 수시로 빠지는 모습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피치 못할 사정에 의하여 빠지는 경우가 아니라 그것이 하나의 습관이 된 사람들입니다. 그만큼 덜 중요하게 여기거나 반드시 참석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서 생기는 현상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과 종종 이야기해 보면 많은 경우 소속감을 느끼기 어려워서라고 대답합니다. 친밀한 교제를 나눌 사람이 없고, 자기 속 이야기를 꺼내서 진솔한 대화를 하기 어렵다고 말합니다. 그런 답답한 심정과 외로운 마음을 경험적으로 알기 때문에 너무나 안타깝게 여기고 어떻게든 돕고 싶은 마음이 가득합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우리가 모이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교제는 우리 마음을 위로하고 지친 영혼을 격려하여 선을 부지런히 행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교제를 사모하는 이유는 그렇게 나에게 유익을 줄 만한 사람이 거기 있어서가 아니라 내가 그런 유익을 줄 수 있는 사람으로 거기 참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존 파이퍼의 아들로 한 교회에서 소속감을 얻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바너버스 파이퍼는 그의 경험과 성경의 가르침을 근거로 소속감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소속감은 우리가 가장 편안하고 안락하게 느끼는 곳 혹은 타인과의 공통점이 가장 많은 곳에 의해 정의되지 않는다. 소속감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있으라고 의도하신 곳, 그러므로 우리가 참 생명과 깊은 만족과 기쁨을 발견하기를 바라시는 곳에 의해 정의된다. 소속감은 도덕적 실체다. 이는 하나님의 눈에 무엇이 옳은 것인지에 대한 문제이며 그분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에 대한 문제다. 그리고 소속감은 위로가 되는 실체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부르심과 목적을 실행하는 일은 그분과 동행하고 그분의 약속 안에 살며 그분과의 친밀한 관계 안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소속감”, 생명의말씀사, 2025, 34-35pp). 하나님은 당신을 우리 교회의 지체로 부르셨습니다. 거기 있으라고 의도하셨습니다. 바로 거기서 참 생명과 깊은 만족과 기쁨을 발견하기를 바라십니다. 지금 당장 친밀감을 느낄 수 없거나 소속감이 들지 않는다고 여겨지더라도, 당신이 그 부르심에 순종할 때, 하나님이 바라시는 대로 당신에게 생명과 만족과 기쁨이 주어질 것입니다.

바너버스 파이퍼는 결론적으로 교회에 진정으로 속하는 방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교회에 진정으로 속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성령님의 도움을 받아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라. 교회의 유익을 위해 당신의 삶을 드리라. 예수님과 그 백성을 사랑하는 일에 전심으로 기쁘게 자신을 헌신하라. 당신이 이렇게 하고, 또 다른 사람들도 당신에게 이렇게 하도록 허락할 때, 당신은 소속감을 갖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소속감을 갖게 될 때, 당신은 당신이 창조된 목적에 맞게 달콤하고 깊고 생동감 넘치는 친교를 누리게 될 것이다(155p). 그러므로 당신이 소속감을 갖기 힘들거나 친밀감이 덜 형성되었다는 이유로 모이는 것을 더디 하거나 꺼리는 것은 정확히 하나님의 의도하신 교제의 목적에 역행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당신은 ‘“형제(자매)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하”라는 부르심에서 “먼저”에 주목해야 합니다(롬 12:10). 당신이 모이기를 힘써야 하는 이유는 “먼저” 사랑하기 위함입니다. 모든 구성원이 이것을 기억하고 사랑을 주기 위하여 헌신하러 모인다면 그 모임은 분명 하나님이 의도하신 달콤하고 깊고 생동감 넘치는 친교를 낳을 것입니다.

결론

한 율법사가 예수님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냐고 물었습니다(마 22:36). 예수님은 가장 큰 두 계명을 말씀하셨는데, 사실상 그것이 성경에 기록된 모든 명령(“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 요구하는 핵심이라고 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

우리가 반드시 모이기를 힘쓰는 자가 되겠다고 결단하는 일은 바로 이 두 계명에 순종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그래서 그분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전심으로 순종하기 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모이기를 힘쓰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주가 다시 오실 때까지 더욱 힘쓰라고 하셨습니다. 힘쓰는 자는 뒤로 물러나는 믿음이 아니라 더욱 진보하는 믿음을 보여야 합니다. 단순히 모이는 것이 믿음의 진보라고 말할 순 없지만, 모이는 것에 힘쓰는 것으로 우리 믿음이 진보되는 것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우리가 가진 믿음은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게 합니다. 살아있는 믿음을 가진 자들은 행함이 따르지 않는데도 믿음은 진실하다고 헛되게 자랑하지 않습니다. 행함으로 믿음을 증명합니다. 모이기를 힘쓰는 것은 믿음을 증명하는 일이고, 그 전진하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또한 성도를 우리 자신 같이 사랑하기 때문에 모이기를 힘씁니다. 내가 위로받기 위하여, 격려받고 사랑받기 위하여 모이는 것이 아닙니다(물론, 서로 사랑하면서 받는 부분도 있습니다). 내가 “먼저” 위로하기 위하여, 격려하고 사랑하기 위하여 모이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약속하신 친교를 우리 가운데 일으켜 주실 것을 믿습니다. 코로나 이후로 헌금은 줄지 않았는데 절반 이상의 성도가 나오지 않고 있다고 말하는 교회가 적지 않습니다. 온라인으로 참여해도 큰 문제가 없다고 느낀 기독교인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코로나 이후 성도들이 그동안 모일 수 없어서 더욱 간절해진 마음을 가지고 모이기에 힘쓰려 하고 있음에 참으로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은 이 기간에 진리를 간절히 찾는 자들을 교회에 많이 더해주셨습니다. 오랜 교회생활을 하면서 저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모이기를 힘쓰겠다’고 결단한 성도와 그렇지 않은 성도가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전자의 경우 그 자녀들이 자연스럽게 부모의 신념을 따라 성실하게 자기 신앙을 만들어 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저는 모든 성도에게 동일한 결단이 요구된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성도를 먼저 사랑하겠다는 결단입니다. 그 결단이 우리 교회를, 우리 자녀들을, 그리고 사랑하는 성도님들을 하나님의 약속된 축복 아래 두게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