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은 어떤 행사에 참석했을 때, “글보다 실물로 봤을 때 훨씬 더 따뜻한 사람”이라는 소개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농담 같은 소개에 웃을 수밖에 없었지만, 사실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교회 안팎의 많은 사람은 저를 까칠하고, 매우 교리적이고, 콧대 높고, 지는 법을 모르며, 타협하지 않는 사람으로 여깁니다. ‘심술궂다’는 말을 자주 들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사람들의 이러한 시각이 이해됩니다. 복음과 관련된 논쟁이 있을 때마다, 저는 늘 그 중심에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가까운 제 지인들은 이런 모습에 대해 사람들에게 설명이 필요하다고 말해 주었고, 이 작은 책자를 통해 그 이유를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

사역을 준비하던 청년 시절, 저는 평생을 싸우는 삶으로 살게 될 줄 전혀 몰랐습니다. 싸우는 것이 하나님께서 제게 맡기신 사역이라는 사실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사역에 대해 곰곰이 생각할수록, 저는 사역이 이중적인 성격을 지닌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저는 마치 서로 다른 두 세계를 동시에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맡기신 그레이스 커뮤니티 교회의 성도들을 사랑과 부드러움, 친절과 자비, 긍휼로 돌보는 것이 저의 사명입니다. 목회자와 그가 목양하는 성도들은 서로를 깊이 신뢰해야 합니다. 이것이 목회에서의 ‘부드러운 돌봄’에 해당합니다.

동시에, 그레이스 교회의 양들을 보호하기 위해 전투를 벌이는 일 역시 저의 책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제게 맡기신 무리를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할 사명을 주셨고, 저는 그 부르심에 따라 적극적으로 싸우고 있습니다.

찰스 스펄전은 목회의 이러한 이중적인 측면을 ‘검과 미장손를 쥔 모습’에 비유했습니다. 목사는 미장손으로 교회를 세우는 사람이자, 다른 한 손에 쥔 검으로 자신이 세운 교회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사람입니다. 목사를 한편으로는 부드러운 목자, 다른 한편으로는 적과 싸우는 용사로 묘사하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목사의 정체성을 이해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통찰입니다.

바울은 사도행전 20장에서 이와 같은 목회의 현실에 대해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경고했습니다. 그들 가운데서 이리들이 일어나 무리를 해칠 것이며, 악한 자들이 많은 사람을 잘못된 길로 이끌 것이라고 말했습니다(행 20:29). 그 일이 바로 오늘날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곧 오늘날 교회의 상태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복음주의 지도자들은 싸우기를 꺼리는 듯합니다. 오늘날 교회는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 달래주는 것이 목사의 일이라 여깁니다. 그리고 교회 지도자들은 조금이라도 불편함을 주지 않기 위해 애를 씁니다. 그러나 본래 목회 사역이란 본질적으로 불편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교회 안에서 책망이 이루어지는 일은 예전보다 훨씬 줄어들었습니다. 많은 목사들이 믿음의 선배들이 목숨 걸고 지켜냈던 진리들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비단 목사들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를 향한 저의 기도와 바람은, 그들이 이 땅에서의 삶을 마칠 때 바울처럼 “내가 선한 싸움을 싸웠다”고 고백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적어도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이 싸움이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싸움의 방식은 바뀔 수 있고, 이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싸움의 본질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둘러싼 전투입니다.

안타깝게도, 저는 이 싸움을 치르면서 많은 친구들을 잃었습니다. 사역자의 수가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줄어드는 모습을 보아 왔습니다. 우리는 어쩌다 이토록 많은 사람을 잃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그들이 가장 중요한 자리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질 때 싸우기를 멈췄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모든 전장을 누비는 병사라도, 가장 치열한 전투를 피하는 자는 결코 충성스럽다 할 수 없다.” 저는 이 격언이 현실로 펼쳐지는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교회의 지도자는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현장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곳에 가서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아무도 싸우지 않는 곳을 지키고 서 있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신실함은 전투가 벌어지는 자리에서만 입증될 수 있습니다.

싸움에는 대가가 따릅니다. 한 번은 A.W. 핑크의 일대기를 읽었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는 견고한 신념을 지닌 신실한 학자였습니다. A.W. 핑크는 평생을 연구하고, 설교하고, 목회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말년의 그는 스코틀랜드 북해안의 작은 아파트에 머물며 세상과 담을 쌓은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것은 세상을 향한 깊은 적대감뿐이었습니다. 어쩌다 그렇게 되었을까요?

A.W. 핑크는 사람들에게 거절당하는 것과 끊임없는 싸움에 지쳐 갔습니다. 목회를 떠난 것이 A.W. 핑크의 쇠락에 있어 결정적인 전환점이었습니다. 그는 사역에서 오는 도전과 낙심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사랑과 격려로 돌봐주던 회중을 떠났습니다. 목회 사역을 그만두고, 자신을 보살펴 줄 이 없이 홀로 외롭게 떠도는 삶은 목사에게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그런 경우, 목사는 싸움에 쉽게 지치게 됩니다.

목회란 진리를 위하여, 그리고 하나님께서 맡기신 양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적과 싸우는 일입니다. 동시에, 그런 목회자를 마음에 품고 사랑하는 회중에게 자신의 마음을 쏟아붓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제가 목사로서 누리는 가장 큰 기쁨입니다.

저는 진리의 수호자이며, 교회는 진리의 기둥이자 터입니다. 궁극적으로 진리는 제가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저는 진리를 잘못 전하는 실수를 결코 범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이해하면, 제 마음속에는 다른 이들이 어떻게 생각할지를 고민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가 참된 성도라면 진리를 붙들 것이고, 아니라면 진리를 거절할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순수한 진리 자체를 선포하셨기에, 결국 군중의 손에 이끌려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세상은 진리를 본능적으로 적대하기 때문에, 싸움은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저의 사명은 오직 신실하게 진리의 편에 서는 것입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제 인생과 사역의 초창기에는 적이 교회 밖에 있었습니다. 이단적인 가르침과 거짓된 종교, 노골적인 불경건함이 바로 그 적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적이 교회 안으로 틈타고 들어온 것처럼 보입니다. 시간이 갈수록 그런 모습을 더욱 뚜렷이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날 제 사역을 향한 적개심은 대부분 교회 밖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 안에 있는 자들로부터 비롯됩니다. 바로 이러한 상황을 유다는 이미 예고한 바 있습니다. 유다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일반으로 받은 구원에 관하여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생각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그들은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하지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유다서 3–4절. 강조 추가)

나는 왜 싸우는가? 가장 쉬운 대답은, 싸우도록 명령받았기 때문입니다.

유다서 본문에 따르면, 저는 성경에 드러난 진리를 위해 힘써 싸우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이 진리는 성도에게 단번에 주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정수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진리입니다. 개인의 성격이나 의견이 아닙니다.

성경 전체에서 ‘진리를 위한 싸움’이라는 주제를 집중적으로 다루는 책은 유다서가 유일합니다. 신약성경의 순서에서 유다서는 요한계시록 바로 앞에 위치하며, 요한일서, 요한이서, 요한삼서 이후에 등장합니다. 이 책들은 진리라는 개념을 핵심 주제로 삼아 집중적으로 설명합니다. 예를 들어, 요한이서의 서두는 다음과 같습니다.

장로인 나는 택하심을 받은 부녀와 그의 자녀들에게 편지하노니, 내가 참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하는 자요, 나뿐 아니라 진리를아는 모든 자도 그리하는 것은 우리 안에 거하여 영원히 우리와 함께할 진리로 말미암음이로다.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진리와사랑 가운데서우리와 함께 있으리라… 진리를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요한이서 1–4절, 강조 추가)

요한이서의 시작 부분에서 ‘진리’라는 단어는 다섯 번이나 반복됩니다. 요한삼서의 서두에서도 ‘진리’가 강조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장로인 나는 사랑하는 가이오 곧 내가 참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하는 자에게 편지하노라. 사랑하는 자여, 내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언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도다”(요한삼서 1–4절, 강조 추가)

살아 있던 마지막 사도, 요한의 마지막 편지는 진리의 우월성을 집중적으로 다룹니다. 그리고 그 편지 바로 뒤에 이어지는 책이유다서입니다. 유다서의 핵심 메시지는 성도는 진리를 위해 끝까지 싸워야 한다”입니다. 

말세가 다가올수록 거짓 교사들이 많아지고, 그들이 퍼뜨리는 거짓을 많은 사람들이 믿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교회 시대’는 진리를 위해 끊임없이 싸워야 하는 시대입니다. 주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유다서와 요한 1, 2, 3서가 계시록과 함께 묶여서 등장하는 이유입니다. 계시록은 ‘끝’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살아 있는 진리이신 분께서 재림하셔서 세상을 다스릴 것이며, 진리만 존재하는 영원한 나라를 다시 창조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전까지는, 교회는 진리를 위한 전쟁 중에 있습니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누가복음 18:8)이 물음은 주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교회가 처음 시작될 때의 생동감 있는 모습과 비교하면, 이 질문은 매우 충격적으로 다가옵니다. 오순절 날, 삼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교회에 더해졌고, 그 후에도 수천 명이 회심하여 믿는 일이 불과 며칠 또는 몇 주 사이에 벌어졌습니다. 그 모든 일은 교회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이렇게 물으십니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주님의 질문이 암시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믿음이 자연스럽게 전 세계로 확산될 것이라 기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적은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거짓말을 통해 교회가 확장되지 못하도록 방해할 것입니다. 전투가 있다면, 반드시 적도 있습니다. 힘들긴 해도 전투는 아니라고 안일한 생각을 하다 가는 사역이란 것이 언젠간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바울은 말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디모데전서 4:1).

이 구절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완전히 잃어버린 거짓 교사들에 대한 경고입니다. 그들의 양심은 화인을 맞아 침묵이 낙인처럼 새겨졌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에게도 이렇게 경고합니다.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 또 불법의 사람 … 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니”(데살로니가후서 2:3). 사람들이 진리에서 떨어져 나가고, 교회로부터 완전히 떠나 배교하는 날이 임할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역시 거짓 교사들의 등장을 경고합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백성 가운데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그들은 멸망하게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베드로후서 2:1–3)

진리를 수호하는 자들과 진리를 오염시키는 자들 사이에는 끊임없는 싸움이 벌어집니다. 베드로는 이러한 자들이 올 것이라고 경고했으며, 유다는 그들이 이미 들어왔음을 말합니다. 거짓 교사들은 이미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 이들을 분별하고 교회 안에서 교회를 위협하는 세력과 맞서는 일은 이제 모든 성도의 중요한 일상의 사명이 되었습니다.

교회의 역사는 곧 하나의 긴 전쟁사입니다. 끊임없이 벌어지는 이 전쟁은 용기를 요구하며, 모든 순간에 분별력을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전쟁에는 용맹과 희생이 필요합니다. 때로는 인기를, 인간관계를, 소중한 유대를 포기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진리를 위한 가치 있는 희생입니다.

유다서는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부르심을 받은 자, 곧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라”(유다서 1절)

유다는 자신의 편지를, 성도들이 예수님에 의해 보호받고 있으며 또한 예수님을 위하여 지켜지고 있다는 확신의 말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서신의 말미에서도 비슷한 확신의 메시지로 마무리합니다.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기쁨으로 서게 하실 이 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영원 전부터 이제와 영원까지 있을지어다. 아멘”(유다서 24절).

이처럼 유다서는 서두와 결말에 확신을 주는 말씀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 중심부에는 심각하고 무서운 경고가 담겨 있습니다. 유다는 거짓 교사들의 존재와 그들이 미치는 영향을 경고합니다. 그는 성도들이 마음과 믿음을 잃을까 염려하여, 편지의 처음과 끝에 하나님의 보호와 사랑에 대한 확신을 담은 것으로 보입니다.

유다서는 거짓 교사들에 대한 강력한 경고의 내용을 담고 있으면서도, 그 전체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사랑을 입은 자들에게 주어진 확신의 말씀으로 감싸져 있는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특별히 3절은 매우 주목할 만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일반으로 받은 구원에 관하여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생각이 간절하던 차에…”(유다서 3절 상반).

유다는 서신을 쓰기 시작할 때 본래 성도들에게 전하고자 했던 주제가 따로 있었음을 밝힙니다. 그는 구원에 관한 내용을 통해 성도들을 격려하고자 했으며,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의 은혜를 기뻐하며 나누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어떤 이유가 그의 방향을 바꾸게 만들었습니다.

유다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유다서 3절 후반).

유다는 본래 구원의 영광에 관해 기록하고자 했으나, 다른 사명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계획과는 달리 반드시 이 편지를 써야 한다는 강한 필요를 느꼈습니다.

성경의 저자들을 보면, 때로는 성령께서 그들이 원하던 바가 아닌, 다른 일을 감당하게 하시는 경우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에서도 바울은 그러한 불가피성을 언급합니다. 이런 대목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영감이 어떻게 실현되는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성경 저자들을 정확히 자신의 뜻에 따라 이끄셨습니다.

유다가 “필요를 느꼈다”고 표현할 때 사용한 헬라어 단어는 ‘눌림’의 개념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이는 ‘압박을 받다’, ‘물러설 수 없게 되다’, 혹은 ‘꼼짝없이 묶이다’는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습니다. 유다는 성령께서 주신 내면의 강한 부담감을 거부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성령께서 기록하기 원하셨던 메시지는 분명했습니다. 바로, 성도들이 믿음의 도를 위해 힘써 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싸우다’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ἀγών (agon)입니다. 이는 본래 ‘움푹 파인 장소’나 ‘경기장’을 의미하며, 이 단어에서 영어의 agony가(‘고통’) 파생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검투사들의 결투나 레슬링을 포함한 격렬한 경기가 대개 그런 움푹한 스타디움에서 열렸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유다의 권면은, 성도들이 마치 치열한 경기장 한가운데 서 있는 선수처럼 영적인 전투에 임해야 함을 상기시키는 표현입니다. 유다는 성도들이 자신을 결투에 임하는 영적 검투사로 여기기를 바랐습니다. 유다가 사용한 동사의 시제 또한 이 싸움이 단발적인 행동이 아니라, 일생 동안 계속되는 싸움임을 보여줍니다.

이 점에서 바울이 디모데에게 했던 권면과도 연결됩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디모데전서 6:12)라고 간절히 부탁한 것과 맥락을 같이합니다.

편안함과 안일함에 몸을 맡기며 흘러가는 삶은 성도가 걸어가야 할 길이 아닙니다. 성도의 삶은 끊임없는 분투이며, 일평생 영적인 전사로서 싸워야 하는 삶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자신이 성도의 온전함과 진리를 위한 사역 가운데 고통을 겪고 있다고 말합니다(갈라디아서 1:28–29). 목회자는 한편으로는 성도들의 유익을 위해, 다른 한편으로는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 싸워야 합니다. 그러므로 진리가 공격을 받을 때, 목회자는 싸움에 나서는 것 외에 이 명령에 순종할 다른 길이 없습니다.

저 역시 개인적으로 그러한 싸움을 경험했습니다. 처음으로 공적인 자리에서 논쟁하게 된 계기는 『은사주의(The Charismatics)』라는 책을 출간한 이후였습니다. 당시 우리 교회와 협력 관계에 있던 한 단체는 진리를 지키기 위해 저와 함께 싸워주었습니다. 그들은 제가 집필한 책을 자신들의 월간지에 챕터별로 실어 발행하기도 했고, 이전에는 그 단체가 제작한 시리즈를 그레이스 투 유 라디오를 통해 우리 교회에서 방송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그 단체는 더 이상 자신의 라디오 방송에서 해당 자료를 송출하지 않고, 이제는 저와 함께 싸우려 하지 않습니다. 싸움이 너무 치열해졌고, 감당해야 할 대가가 너무 컸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저의 첫 번째 싸움이었습니다.

그다음 싸움은 『참된 무릎 꿇음(The Gospel According to Jesus)』을 통해 벌어졌습니다. 저는 그 책을 통해 그리스도의 주권에 대한 진리를 변호하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이 주님이시기에, 우리가 예수님을 주로 섬기는 것은 당연하다는 사실을 설명하고자 했습니다.

최근에는 우리 신학교 졸업생 중 한 사람이 트위터에 다음과 같은 글을 올린 것을 보았습니다.

“영혼을 얽매고 자유를 억압하며, 양심의 가책을 주고 확신을 무너뜨리며, 복음을 율법적으로 변질시키는 주권적 구원의 오류로부터 가능한 많은 사람을 자유롭게 하고 싶다.”

그는 분명 싸움에 지친 듯 보였습니다.

유다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유다서 1:4). 유다는 경고합니다. 이 ‘몇 사람’은 누구든 될 수 있습니다. 신학교 교수, 주일학교 교사, 기독교 작가, 신학자, 심지어 목회자까지도 예외가 아닙니다. 유다는 분명히 말합니다. 그들은 교묘하게 교회 안으로 침투하여 예배 자리에 앉고, 강단에 서서 가르치며, 하나님의 사람인 양 행동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진리에서 떨어져 나갈 때, 우리는 비로소 그들의 참된 정체를 알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이단의 목적은 하나님의 은혜를 방탕함으로 바꾸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방탕함’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는 통제되지 않은 악덕을 뜻하며, 갈라디아서 5장에서 바울이 나열한 여러 부도덕한 죄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죄에 해당합니다. 방탕은 곧 반율법주의와도 같은 개념입니다. 많은 경우,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주권을 부인하려는 이유는 자기 죄를 정당화할 수 있는 신학적 근거를 마련하기 위함입니다. 슬프게도, 하나님의 은혜를 자신의 죄를 가리는 도구로 삼는 이들은 언제나 존재할 것입니다.

디도서에서 바울은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디도서 2:11).

참된 은혜는 결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를 지으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불경건함을 부인하도록 가르칩니다. 

진정한 은혜는 죄로부터 도망치라고 가르칩니다. 반면 부도덕은 스스로를 정당화하기 위해 그에 맞는 신학을 만들어냅니다. 은혜에 대한 왜곡된 이해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뒤틀린 은혜를 옹호하는 자들은, 유다가 말하듯, 이미 오래전부터 멸망 받기로 정해진 자들입니다.

오늘날의 복음주의 문화는 이러한 잘못된 은혜관을 공적으로 지적하는 일에 주저합니다. 현대 문화는 “넘치는 사랑”과 “값없는 은혜”라는 이름으로 모든 사람을 수용하고 포용하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거짓된 성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은혜가 있으니 이제 자유롭게 살아도 절제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당신이 이러한 주장에 반박하려 한다면, 비난을 감수해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감수함이야말로 진리를 위해 싸우라는 부르심에 응답하는 성도의 삶입니다.

저는 지금도 같은 싸움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의 순결성, 진실성, 온전성, 충분성, 명확성을 지키기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 복음에 대해, 회심에 대해,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된 믿음에 대해 싸우고 있습니다.

이 모든 싸움 가운데 가장 힘든 일은 혹여 싸움에 지쳐 매주 제가 돌보고 있는 성도들과 함께 누리는 사랑과 긍휼과 기쁨을 잃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입니다. 한 교회를 오랜 시간 동안 섬긴다는 것은 정말 아름다운 일입니다. 진실하고 활기찬 기독교의 생명력을 간직한, 사랑이 많고 신실한 성도들과 함께하며 격려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기쁨을 보기 위해 한 교회를 떠나지 않는 목회자는 분명 좋은 선택을 한 것입니다.

그레이스 교회는 저의 평생을 바친 공동체입니다. 그 삶은 기쁨으로 가득 찬 인생이었습니다. 이 교회의 성도들로부터 받은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이 교회는 제게 참된 은혜입니다. 물론, 싸움이 치열할 때 떠난 이들을 생각하면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싸움을 끝까지 함께 해준 제 아내와 많은 친구들이 있기에 저는 진심으로 감사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