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딤전 5:7-8

“경건”(godliness)은 모든 그리스도인 마땅히 추구해야 할 것입니다.
경건은 영어로 godliness로 “하나님을 닮는 것” 혹은
하나님의 성품(사랑, 은혜, 자비, 거룩 등)을 닮는 것을 말합니다.

어떻게 인간인 우리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성품을 닮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완벽한 모습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요 1:14)

그래서 “경건에 이르도록 연단하라”는 명령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라”는 명령과 같습니다 (엡 4:15; 골 3:10).

그리스도인이십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기 위해 부지런히 연단 해야 합니다!
당신은 경건에 이르도록 연단해야 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목적 자체를 잊어버리고 삽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하나님이 당신의 경건함을 원하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살전 4:3).

거룩함(sanctification)은 이제 막 죄의 노예에서 풀려난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형상까지 이르는 과정을 말합니다.
경건에 이르는 과정 그것이 바로 거룩함이며 이것을 우리는 “성화”라 부릅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날마다 조금씩 더 닮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삶 가운데 열심히 이루고 계신 것이 바로
이 경건입니다(롬 8:28-30).

천지가 창조 되기 전부터 당신을 구원하시기로 계획하신 하나님은
이미 당신의 삶 가운데 이 경건(거룩함)을 이루시기를 기뻐하셨으며
당신은 거룩함을 입기로, 경건에 이르게 하시기로
택하심을 받은 사람입니다(벧전 1:2).

당신이 할 일은 당신 삶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과
말 할 수 없는 탄식과 간구로 이 일을 도우시는 성령님과 더불어
경건에 이르도록 부지런히 자신을 연단하는 것입니다.

경건, 그것은 이 세상에서 그리고 이후의 삶에서 우리에게
유익을 주는, 인간이 세울 수 있는 최고의 목표입니다.

무엇으로 우리를 연단할 수 있을까요?

우리를 경건하게 해주는 데 무엇이 필요한지 너무도 분명합니다.
바울은 경건에 이르도록 연단하라는 명령 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믿음의 말씀과 네가 따르는 좋은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 (딤전 5:6)

무엇입니까?
우리를 경건에 이르게 해주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은 참으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기에 충분하며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것입니다 (딤후 3:16-17).

오늘날 사단은 그리스도인이
성경이 아주 중요한 책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가장 하찮게 여기도록 만드는데 성공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참 진리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말씀은 지식적이며 공부는 특별한 사람에게만 필요한 것이고
주일 설교 하나면 경건에 이르는 데 충분하다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성도의 삶 가운데 말씀이 멀어지고 있다면, 성경이 읽혀지지 않고 있다면
이보다 더 위험한 신호는 없습니다.
경건에 이르기를 연단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문제는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에  우리에게 영향을 주는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가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만들어낸 이야기, 허무한 신화, 미신, 거짓 정보들…
스마트폰을 한 번 터치만 해도 우리에게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에서
헤어나오기 힘듭니다.

뉴스들, 기사들, 드라마와 영화에서 쏟아져 나오는 가치관들 가르침들…
가치 있는 것에 대한 세상의 관점들, 아름다움, 사랑, 멋지다는 것에 대한 관점
남편과 아내의 역할에 대한 비뚤어진 시각들, 잘못된 제안과 상담들…
심지어 잘못된 설교들…

그 헛된 가르침과 교훈들, 거짓 정보들에 노출되어 있는 시간과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시간을 비교해 볼 때
경건에 이르기 위해 연단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입니다.

당신이 TV보는 시간이 성경 읽는 시간 보다 많다고 지적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TV를 전혀 보지 않아도 당신은 세상의 헛된 정보에 완전히 노출 되어 있습니다.
죄악된 세상에 사는 동안 그 막강한 영향력은 어찌 할 수 없습니다.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당신 스스로 그 헛된 것들에 자신을 노출 시키지 않는 것입니다.
무익한 것들을 보기 위해 시간과 물질을 투자하지 않는 것이며
헛되고 거짓된 것들에 귀 기울이지 않는 것입니다.
손에 들린 스마트폰으로 잠시 나를 즐겁게 해줄 허탄한 오락을 선택하기 보다는
나를 경건에 이르도록 도와주는 것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나 스스로 나 자신에게 허탄하고 망령된 것들을 집어넣지 않는 것이
경건에 이르기를 연단하는 좋은 방법입니다.

피곤하게 일을 하고 집에 돌아온 당신은 아마도 잠시 쉬고 싶을 것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재미있는 TV프로나 영화를 보며 편하게 웃고 즐기고 싶을 것입니다.

저는 그것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율법주의자들처럼 영화보면 더러운 죄인이라고 손가락질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저는 사단이 그리스도인이 경건에 이르는 것을 막는데 아주 잘 한 부분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그와 같은 오락과 유희를 즐겨야 쉰다고 생각하게 만든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람을 쉬게 하는 것은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우리의 육체에 편안함을 주는 것들은 잠, 스트레칭, 가벼운 운동, 마사지, 사우나, 목욕 등
다양한 것이 있습니다. 육체에 건강한 음식을 먹는 것도 좋습니다.
우리의 정신에 쉼을 주는 것은 조용한 묵상이나 독서, 대화 등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가볍게 걷는 것도 마음을 평안하게 해줍니다.
좋은 음악을 듣는 것도 정신에 새로운 활력소가 됩니다.
우리의 영혼에 쉼을 주는 것도 기도, 말씀, 교제 등 참 많이 있습니다.

왜 항상 TV나 영화, 컴퓨터, 인터넷이어야 할까요?
누가 이렇게 하는 것이 쉬는 것이라고 정해준 것일까요?

문제는 이러한 매체들은 유익한 것을 우리에게 전달해 줄 때도 있지만
상대적으로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양의 허탄하고 망령된 정보가 이 매체들을 통해 전달되고
우리는 사실 언제나 지혜롭게 선택하지는 않는 다는 것에 있습니다.

또한 실질적으로 TV, 컴퓨터, 스마트폰은 육체적, 정신적, 영적 쉼을 주는 도구로
그렇게 좋지 않습니다. TV를 두 시간 보는 것보다 두 시간의 잠이 육체적으로 쉼을 더 많이 주고
컴퓨터를 두 시간 하는 것보다 두 시간의 독서가 더 많은 정신적 쉼을 주며
스마트폰을 두 시간 하는 것보다 두 시간의 기도와 말씀을 읽는 것이
당신의 영적인 건강에 더 유익합니다. 

TV, 컴퓨터, 스마트폰으로 설교를 보거나 채팅으로 교제할 수 있습니다.
충분히 좋은 도구로 쓰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동차나 가전기구들에게 에너지소비효율등급이 있듯이
육체적, 정신적, 영적 쉼을 주는 효율등급이 있다면 TV, 컴퓨터, 스마트폰은
아주 효율성이 나쁜 점수를 맞게 될 것입니다.
잠이나 독서, 기도는 아마도 좋은 효율등급을 갖겠지요.

저는 TV, 컴퓨터, 스마트폰처럼 효율성이 나쁜 도구가 아니라
아주 좋은 효율성을 가진 도구를 하나 소개하려고 합니다.
당신을 경건에 이르도록 도와주는 아주 좋은 도구이며 습관입니다.

J. I. Packer는 이 좋은 도구에 대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잃어버린 기술이며,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을 몰라서 통탄할 만큼 괴로움을 당하고 있다.

이것은 바로 “묵상”입니다.

현대인들은 “묵상”의 기술을 거의 잃어버렸습니다.
“묵상”은 거의 인간의 삶 가운데 멸종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아주 조금의 생각할 틈도 현대인들은 허락하지 않습니다.
항상 귀에 무언가가 꽂혀 있어야 합니다.
음악이든 강의든 무엇이든 듣고 있어야 합니다.
눈은 항상 무언가 봐야 합니다.
오늘의 검색순위와 핫뉴스를 누가 가장 빨리 알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재미있고 흥미로운 영상들을 봐야 합니다.
동시에 손도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게임을 하거나 문자를 보내거나 메신저를 사용하느라 손가락이 바쁩니다.

“깨달음,” “고찰,” “묵상” 은 인간의 활동 가운데 자취를 감춰버리고 있습니다.
TV나 미디어매체들은 인간으로 하여금 수동적으로 정보를 받아들이고
일차적으로 그것에 반응하게 합니다.
더 이상의 생각을 진전시키는 것을 막아버립니다.
심지어 두 세장의 칼럼도 읽고 생각하는 것이 불가능해지고 있습니다.
한 시간의 설교를 집중해서 듣는 것도 점점 힘들어집니다.

언제 당신은 한 가지 주제에 대해 집중해서 한 시간 이상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까?

 

성경은 묵상하는 자들에 대해 복되다고 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1:2)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율법책을 주야로 묵상하라고 말합니다 (수 1:8).

시편기자는 119편 148절에서 주의 말씀을 묵상하기 위해 새벽에 일어났다고 고백합니다.

다윗 역시 밤중에주를 묵상하였다고 말합니다(시 63:6).

예수님도 묵상하셨을까요?

마태복음 11장 25-26절에 예수님의 말씀은 참 흥미롭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예수님은 지금 아버지 하나님께 말씀하고 계십니다.
많은 권능과 이적을 베푸신 고을에서 회개하는 자들이 적었을 때
예수님은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 뜻이 옳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대해 깊이 생각하신 것입니다.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를 돌아보시는 하나님의 뜻에 대해
그것이 옳다라고 응답하신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이 묵상하셨다고 생각합니다.

J. I. Packer가 정의한 “묵상”을 보면 제 이 생각에 동의하실 것입니다.

묵상이란 하나님의 사역과 도, 목적과 약속들에 대해 자신이 아는 것을 상기하고, 숙고하고, 깊이 생각해 보고, 자신에게 적용하는 활동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하나님이 보시는 가운데,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과 교통하는 수단으로서, 의식적으로 수행하는 거룩한 사고 활동이다.

저는 경건에 이르도록 연단하는 것을 돕는 아주 좋은 도구가 바로 이 “묵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삶에 묵상이라는 습관이 필요하며 묵상해야할 내용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위의 말씀들에서 복있는 자가 묵상한 것은 주의 율법이었고
다윗과 시편기자도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였습니다.
여호수아가 묵상하라고 명한 것 역시 주의 율법책, 즉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삶 가운데 조금의 여유가 주어진다면 묵상하는 습관을 가져봅시다.

하나님과 그분의 뜻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봅시다.

십 분, 이 십 분 정도 차 안에서 이동하는 시간이 주어진다면
아침에 잠시 읽은 한 구절의 말씀에 대해 곱씹으며 생각해보고 묵상해봅시다.

화장실에 갈 일이 생겨서 앉아서 시간을 보낼 때
주일에 들었던 말씀을 다시 한 번 기억해보고 그 주제에 대한 묵상을 해 봅시다.

잠 들기 위해 누웠을 때 잠시 잠이 오지 않는다면 그 잠깐의 시간 묵상해봅시다.

다윗처럼 시편 기자처럼 새벽에 일어나 따로 시간을 떼어두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습관을 들여봅시다.

J. I. Packer는 이 묵상의 목적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묵상의 목적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정신적, 영적 시각을 밝히는 것이며, 하나님의 진리가 우리 마음과 뜻에 충분하고도 적절히 영향을 끼치도록 하는 것이다. 묵상은 자신에게, 하나님과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종종 자신과의 싸움, 의심과 불신의 풍조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분명하게 이해하도록 스스로를 설득하는 것이다.

이 묵상의 결과에 대해서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영광 그리고 우리 자신의 하찮음과 죄성을 묵상함으로 겸손해진다. 또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드러난 신비로운 하나님의 자비를 묵상함으로써 격려받고 평안을 얻는다. 즉 묵상은 우리를 위로해준다…그리고 우리가 이처럼 겸손해지고 고양되는 체험 속으로 깊이 들어가면 갈수록 하나님을 아는 우리의 지식은 점점 증가하며, 그와 함께 우리의 평화, 힘, 기쁨도 증가한다.

현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에게
경건에 이르기를 연단하는 좋은 방법은
허탄하고 망령된 정보로 채우고 있는 삶의 빈틈들을
하나님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묵상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읊조리는 것으로,
하나님의 진리와 그분의 성품을 고찰하는 시간으로 채우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주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말씀으로 이 글을 마무리 하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히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