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 22:6)
부모는 자녀에게 “마땅히 행할 길”을 가르치고 싶어 한다. 특별히 한국 부모는 자녀 교육에 열과 성을 다하기로 유명하다. 교과 교육은 기본이고 여러 가지 예체능 교육을 비롯하여 기본예절 및 특별 기술 교육 등 다양하고 풍부한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하여 부모는 자기 삶을 헌신한다. 그리스도인 부모는 여기에 하나가 더 추가된다. 바로 신앙 교육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라고 믿기 때문에(잠 9:10), 부모는 자기만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녀의 유익을 위해서, 여호와를 경외하도록, 거룩하신 하나님을 알도록 최선을 다하여 가르치고 지도한다. 태교로 찬송가 음악 감상이나 성경 낭독을, 유아기에 성경 동화 읽기를, 어려서부터 유아부를 시작으로 중고등부까지, 학령기만 따져도 12년 가까이 자녀에게 신앙 교육의 기회를 정기적으로 제공하기 위해 투쟁한다. 그러면서 부모가 나이가 들어 자녀를 두고 떠나더라도 자녀가 계속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복된 삶을 누리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런데 모든 자녀가 부모의 신앙 교육 방침을 순조롭게 따르는 것은 아니다. 자녀가 자기 생각이 분명해지고 자기 의지가 점점 강해지면서 종종 ‘부모가 믿는 하나님을 왜 내가 믿어야 하나요?’라고 반항적으로 묻고, 부모가 자녀의 영적 축복을 위하여 수고하는 모든 것을 ‘종교의 강요’라고 비약하기 시작할 때가 온다. 어떤 자녀는 스스로 내적인 갈등과 방황을 잠시 겪다가 말기도 하지만, 어떤 자녀는 내면의 갈등이 외부로 강하게 표출되면서 부모와 마찰을 빚기도 한다. 부모의 신앙을 왜 자신에게 강요하는지 자녀가 물을 때, 부모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1. 먼저, 감사하라
감사하라고? 그렇다.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살전 5:18). 물론, 자녀가 신앙적으로 방황하는 것 자체가 감사할 제목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부모는 자녀의 갑작스러운 커밍아웃(?)을 경험할 때, 좌절, 염려, 근심, 원망, 분노, 죄책감 등에 사로잡힌다. 부모는 자녀가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믿고 경외하며 살게 될 것을 막연히 기대했다가 예상치 못한 사고를 당한 것처럼 충격을 받는다. 하지만, 자녀의 내적 갈등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무반응이 아니라 그 또한 반응이다. 부모의 신앙 교육이 실패했다는 증거로 받아들이지 말라. 죄인이 진리에 관하여 가장 자연스럽게 반응한 것뿐이다.
자녀가 하나님의 말씀과 고군분투할 때, 오히려 부모로서 더 많은 역할을 해줄 수 있는 기회로 삼아라. 그동안 순수하게 받아들인 말씀이 왜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 되었는지 물어보라. 하나님을 아는 아이로 자라다가 왜 지금은 그 하나님을 거부하고 싶어 하는지 이유를 찾아보라. 교회에 오는 것을 좋아했고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을 기다렸던 자녀가 왜 갑자기 좋아하던 것들을 멀리하고 싶어 하는지 깊은 내면의 답을 들어보라. 몸이 항상 건강하면 좋겠지만, 종종 몸에서 이상한 증상을 발견한다. 하지만, 때로 그 증상은 더 큰 문제를 발견하고 나아가 해결하기 위한 도구로 작용한다. 자녀가 부모의 신앙을 거부할 때, 그 증상 자체를 영원한 멸망으로 보지 말라. 하나님을 진실로 알게 되는 도구, 부모의 신앙이 아니라 자기 신앙을 세울 기회로 여겨라.
잘 가다가 실족한 것이 아니라 이제 본격적으로 자기 길을 가려고 하는 것이다. 자전거 보조 바퀴를 떼고 스스로 나아갈 때가 된 것이다. 그때가 온 것에 감사하며, 신앙의 자립이 가능하도록 계속해서 부모로서 적극적으로 또 사랑으로 도우라.
2. 쉬지 말고 기도하라
하나님은 자녀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아버지시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마 7:11). 하늘 아버지께서 당신이 구하는 자녀의 신앙을 주시기를 기뻐하실까? 당연하다. 그러니 아버지께 구하라. 아버지께서 당신의 자녀가 방황하는 그 과정을 통하여 그들을 만나주시고 또 믿음으로 거듭나게 하실 것을 기대하며 감사함으로 아뢰라(빌 4:6).
왜 기도하지 않을까? 먼저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해서다. 하나님께서 부모가 간절히 바라는 자녀의 구원을 이루실 것인지 의심하기 때문이다. 기도의 기간이 길어질수록 염려가 많아지고 믿음이 약해지기 쉽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의 원한을 풀어달라고 재판장을 수시로 찾아가는 과부의 비유를 통하여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가르치셨다(눅 18:1-8).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라고 말씀하셨다(7절). 기도하지 않는 두 번째 이유는 슬프게도 자녀의 구원에 큰 관심이 없어서다. 생각보다 많은 그리스도인 부모가 자녀의 학업, 취업, 결혼 등에 구원보다 더 많은 관심을 둔다. 구원은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도 한몫한다. 하나님이 택하셨다면 언젠가 구원하실 거라는 신학적 오류(예정이 아니라 운명론적 발상)에 빠진 부모도 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가 맞다. 하지만 하나님은 수동적인 반응이 아니라 적극적인 반응을 요구하신다: 믿어라! 회개하라! 들어라! 영접하라! 부모는 자녀 대신 믿어줄 수 없고 회개하거나 영접할 수 없다. 하지만 자녀를 위하여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다. 적극적이고 열정적으로 중보할 수 있다.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크다고 성경은 말하지 않는가?(약 5:16).
자녀가 신앙적으로 독립할 때는 더 많은 잔소리나 요구가 아니라 전폭적인 지지와 후원이 필요하다. 자녀를 위한 기도가 몇 달에서 몇 년 심지어 평생 지속될 수도 있다. 하지만, 부모가 먼저 세상을 떠난다고 해도, 평생을 기도로 자녀를 지원한 것은 결코 후회스럽거나 무가치한 일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자녀를 위하여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
3. 부지런히 가르치라
선지자 사무엘은 자신이 돌보는 영적 자녀들인 이스라엘 백성에게 마지막 설교로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길을 너희에게 가르칠 것인즉 너희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행하신 그 큰 일을 생각하여 오직 그를 경외하며 너희의 마음을 다하여 진실히 섬기라”(삼상 12:23-24). 그는 이스라엘의 영적 부모로서 그들을 위한 중보 기도를 쉬지 않고 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선하고 의로운 길 가르치기를 멈추지 않았다. 자녀가 더 이상의 신앙 교육을 거부할 때, 많은 부모는 그들이 어느 정도 방황하도록 내버려둔다. 예배 참여를 싫어하면 참여하지 않도록 놔두고, 교회 오기 싫어하면 오지 않아도 된다고 허락한다. 설교가 지겨우면 듣지 말라고 하고, 또래와 함께 교제하는 시간에 빠지고 싶어 하면 그렇게 하도록 허용한다.
자녀가 신앙을 극단적으로 거부할 때(특별히 그들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지게 하는 성인이 되었을 때는 더더욱) 잠시 그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생각을 들어볼 시간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에는 일시적으로 격렬한 반항심이 가라앉을 때까지 원하는 대로 해줄 수도 있다. 하지만, 성인이 되어 자기 신앙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교회 생활을 하고 있는 청년들은 하나같이 크고 작은 내적 방황을 겪었고, 그들이 그 위기의 순간에 교회 밖으로 떨어져 나가지 않고 결국 안으로 들어오게 된 이유를 물으면 십중팔구 부모가 끝까지 선하고 의로운 길을 요구했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어떤 부모는 어르고 달래기도 하고, 어떤 부모는 ‘교회 오지 않는 것은 선택 사항에 없다’고 단단히 못 박는 등, 자녀의 기질과 상황에 맞게 어떻게든 권하고 가르치고 이끄는 일을 멈추지 않은 것이다. 이스라엘이 듣고 순종하거나 듣지 않고 불순종하거나 그들의 영적 아버지 사무엘은 옳은 것을 가르쳐야 했다. 그것이 자녀 이스라엘 백성에게 참된 복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부모는 자녀가 평생 여호와를 경외하기를 바란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하여 어떤 큰 일을 행하셨는지 성경을 통하여 절절히 깨닫고 감격한 자로서 자녀가 그 은혜를 풍성히 맛보고 평생 그분을 진실로 사랑하고 섬기기를 원한다. 그것이 참된 복이기 때문에 부모는 그 복된 길로 자녀를 인도하기를 결코 멈추지 않는다.
4. 끝까지 사랑하라
부모의 내리사랑은 세상에서도 가장 크고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일방적인(이타적이고 희생적인) 사랑으로 묘사된다. 자녀를 위해서라면 부모는 백번이고 죽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인 부모는 세상의 부모처럼 자녀가 잘되기를 누구보다도 바란다. 그래서 자녀가 구원받고 하나님을 아는 자로 평생 영생의 복을 누리며 살기를 간절히 원한다. 자녀가 건강한 신앙을 가질 수 있다면, 부모는 뭐든지 희생할 수 있다. 영원한 천국에서 부모와 자녀가 다시 만나 복의 근원 되신 하나님을 함께 섬기게 된다는 소망을 가지고 사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인가!
신앙의 방황을 겪는 자녀는 부모의 사랑이 더 많이 필요하다. 반항하는 그들도 부모가 실망하고 슬퍼하는 모습을 보면서 미안함과 죄책감을 느낀다. 자녀가 교회에 가는 것과 예배에 참석하는 것에 따라 부모의 사랑과 대우가 달라지는 것처럼 보여서는 안 된다. 그들에게 선하고 의로운 길을 가르치는 부모의 동기와 본심이 그들을 향한 순수하고 진실한 사랑이라는 것을 그들이 알고 느끼게 하라. 부모의 자존심이나 명예, 죄책감이나 수치심 때문에 자녀에게 억지로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그들의 영원한 복을 위하여 간절히 요청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죄인이 어떻게 선하고 의로운 길로 돌이키는지 생각해 보라. 자신들이 가고 있는 길이 틀렸다고 계속해서 질책을 받아서가 아니다. 그렇게 가다간 큰일 난다고 쉼 없이 경고를 들어서가 아니다. 하나님의 풍성한 긍휼과 일방적인 사랑의 크기에 압도될 때, 그때 회심이 일어난다.
자기 신앙은 자기가 알아서 챙기는 거라고 자녀를 방치하는 것도 사랑이 아니지만, 자녀의 의사와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신앙을 강요하는 것도 사랑으로 느껴지기는 어렵다. 쉬지 말고 자녀를 위하여 기도하고, 부지런히 자녀에게 하나님을 섬기고 따르는 의로운 길을 가르쳐 주면서, 그 모든 것이 사랑에서 비롯된 것임을 분명히 자녀로 알게 하라. 자녀의 신앙을 위한 믿음의 기도와 그들이 제발 의로운 삶을 택하길 바라는 간절한 소망과 함께 자녀를 향한 풍성한 사랑이, 하나님이 주신 것처럼 분명히 드러나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통하여 자녀가 신앙의 홀로서기에 필요한 모든 은혜를 더하시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