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금 제2차 냉전 시대라고 불리는(1945년 이후부터 지금까지), 정치적 우파와 좌파가 더욱 극명하게 갈리고 격렬하게 대립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광화문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매일 양 측 집회가 열리고, 어르신부터 성년을 앞둔 학생들까지 각각 자기 진영 논리를 따라 상대 진영을 비판하고 대적하는 일에 열을 올린다.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겠다는 원칙을 나름 고수해 왔던 기독교도 언제부터인가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는데, 극우 기독교, 극우 교회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이들은 대한민국 거리 집회를 주도하고 정치 활동을 이끄는 주체가 되었다. 한편, 기독교 좌파, 극좌 교회라고 불리는 이들도 자기 진영 집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거나 SNS로 목소리를 높이는 등 다양한 정치 활동을 하고 있다.
웨인 그루뎀은 “성경과 정치”라는 책에서 정치적 보수와 진보 모두 장점과 약점이 있지만, 그 정치적 아젠다만 두고 볼 때, 성경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와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이 드러내신 원칙을 진보보다는 보수가 더 많이 담고 있음을 합리적으로 입증했다(새 언약, 2024). 타데우스 윌리암스는 저서 “사회 정의에 대한 기독교인의 12가지 질문”에서 흔히 진보가 사회적 약자를 돕는 데 더 열심이 있고 보수가 부유한 자들을 위하는 데 더 관심이 있다는 선입견이 얼마나 역사와 현실을 무시한 오판인지 여러 사례를 통하여 설명했다(개혁된실천사, 2022). 특별히 전 세계적으로 진보적 성향이 극단적으로 나타나는 정권 아래 성 정체성 혼란과 생명윤리 문제가 극심해지고 동시에 이것에 반대하는 최후의 목소리를 내는 기독교에 대한 통제와 압박이 뚜렷이 보인다는 점에서 기독교가 보수적인 입장에 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기독교는 무조건 정치적 보수나 진보, 또는 우파나 좌파를 지지하지 않는다. 기독교는 오직 그리스도와 그분이 분부하신 모든 것을 지키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것에 반하는 정책이나 안건에 반대한다. 누가 그 목소리를 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성경의 목소리와 다른 것을 추종할 수 없는 것이다. 교회는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라고 믿고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한다(롬 13:1-2). 그러나 위에 있는 권세가 그 권세를 정하신 하나님을 거스르게 할 때, 교회는 만 왕의 왕, 만주의 주이신 하나님께 굴복할 것을 위에 있는 권세에 목숨 걸고 요구하며 불복하는 것이다. 그렇게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하나님이 세우신 사역자 또는 하나님을 섬기는 종으로서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하고 하나님의 선을 이루도록 권장할 것을 요구할 때, 교회는 우파나 좌파를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를 전파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나타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적어도 무엇을 하든지 다음과 같은 메시지가 전달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다스리신다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롬 13:1). 성경은 하나님께서 완벽하게 통치하고 계신다고 말한다. 구약 성경이 담고 있는 여러 제국의 흥망성쇠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왕조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일하고 계심을 또렷이 볼 수 있다. 기독교인이 제2차 냉전 시대 더욱 격해진 진영 논리에 휩쓸리다 보면, 정치적 승리만이 이 땅에 소망을 줄 수 있다고 철석같이 믿게 될 위험이 있다. 하지만 세상의 임금 마귀가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굴복시킨 것처럼 보인 십자가마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허락하신 일이었고, 우리 눈에 아무리 패배처럼 보이는 그 십자가가 마귀를 멸하시고 그리스도인의 발 아래에서 상하게 하실 선전포고였다는 사실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진리를 붙잡게 하기에 충분하다(롬 16:20; 히 2:14). 하나님이 다스리신다. 그러므로 패배한 것처럼, 소망 없는 것처럼, 아무런 선한 일이 앞으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처럼 실망하거나 좌절하거나 염려하거나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하나님께서 공의와 정의를 실현하실 것을 기대하고 간절히 기도로 요청하며 굳게 신뢰하라.
하나님이 세우신 권세를 존경한다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는 말씀은 권세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를 결정한다. 성령 하나님께서 영감을 통해 기록하신 성경의 명령은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는 것이다(롬 13:7). ‘존경할 만해야 존경하지’라고 핑계하고 싶은 우리에게 성령은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되 혹 위에 있는 왕이나 혹은 그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상하기 위하여 보낸 총독에게 하라”(벧전 2:13-14). 당시 “위에 있는 왕”이 악명 높은 네로 황제였다는 걸 생각할 때, 상대적으로 훨씬 점잖고 선한 정치를 펼치는 대다수의 권세들에 그리스도인이 무례히 대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함부로 이름을 부르고, 세상 사람이 사용하는 상스러운 표현을 아무렇지 않게 입에 담는다. 확실하지 않은 의혹에 관한 소문과 험담을 지인에게 직접 또는 SNS를 통하여 퍼뜨린다. 만일 그렇게 무례한 일에 가담하고 있다면 그는 기독교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확실히 좌파나 우파를 전파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라고 분부하신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와 그 뜻을 구한다
좌파 또는 우파의 정치 참여가 활발해지고 국가의 정치적 상황이 커다란 위기 국면에 들어서면서, 기독교인에게(특별히 목사에게) 어느 편에 설 것인지, 얼마나 위기감을 느끼고 적극적으로 정치적 소명을 밝힐 것인지 묻는 이들이 늘어난다. 상대적으로 조용히 기도하며 그들이 볼 때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는 그리스도인에게 ‘왜 침묵하느냐’라고 질책하면서 나치 정권이나 일제 강점기 때 침묵했던 교회와 같다는 참으로 거침없는 비난을 쏘아붙인다. 예수님께서 공적인 사역에 힘쓰셨던 때는 로마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강제 점령했던 시기다. 강제노역과 불합리한 세금 징수, 십자가 처형까지 매일 차별과 억압이 반복해서 일어났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런 정치적 소명도 하지 않으셨고 정치적 선동도 일으키지 않으셨다. 그분의 나라는 이 땅에 속하지 않았다고 하셨고, 정치적으로 어찌나 수동적이고 무기력했던지 ‘호산나’를 외쳤던 군중들도 가짜 메시아라며 십자가에 못 박을 것을 강력하게 요구할 정도였다. 물론 21세기 대한민국 국민은 그 당시 로마 시대 유대인과 달리 법이 보장하는 정치 참여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원칙이 적용되고 그분의 뜻이 실현되도록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는 그분의 우선순위를 바꾸지 않는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했던 예수님처럼, 그래서 아버지의 나라를 회복하고 그 나라 백성에게 믿음으로 얻는 하나님의 의를 가져다주시기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어주신 것처럼, 예수님의 제자도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뜻을 선포하고 이루기 위한 삶을 우선순위에 둔다. 그 일에 목숨을 건다.
정치 기사에 관심을 가지고 여러 쟁점을 설명하는 유튜브 방송에 귀를 기울일 수 있다. 하지만 먼저는 하나님 나라 법칙이 당신 개인의 삶과 가정에 온전히 적용되기를 힘써야 한다.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당신과 그리스도와 교회의 비밀을 드러내는 당신 가정이 복음과 그 가운데 드러난 하나님의 의를 세상에 선포하기를 당신의 주인께서 가장 원하고 계신다.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땅이 아니라 그 땅과 함께 불사름을 당할 불쌍한 사람들을 위하여, 우리는 좌파나 우파가 아니라 기독교를 전파해야 한다. 영원한 나라와 뜻을 선포함으로써.
이웃을 사랑한다
냉전 시대의 특징은 이웃에 대한 혐오와 분노다. 의견이 다르고 정치적 성향이 다른 사람을 적대적으로 대하고 심지어 끝없이 미워하는 것이다. 의견의 차이는 집단의 발전을 가져오는 이점이 있지만, 여기에 자기애가 더해지면 타인은 자기를 사랑하는 데 방해가 되는 원수가 되어 버린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제자들에게 요구하신 가장 대표적인 명령은 첫째,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것(그분의 나라와 뜻을 구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둘째, 이웃을 내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하면 참된 것을 말할 수 없는가? 정치적 사안에 관하여 이 세대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대로 분별하고 말할 수 없는가? 있다. 그리고 그래야 한다. 다만,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말)하여”야 한다(엡 4:15). 성경은 “각각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라고 명령한다(엡 4:25).
사랑 안에서 말하는 것은 참된 것을 무례하지 않게 전달하는 것이다. 화내거나 교만한 태도를 가지고 말하지 않는 것이다. 오래 참고 온유한 태도를 가지고 말하는 것이며, 시기나 자랑을 목적으로 삼지 않고, 상대방의 유익을 목적으로 삼는 것이다(고전 13장). 사실 세상에서 정치적 발언에 앞장서는 사람 중에 이런 사랑의 태도를 갖춘 사람을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사랑할 수 있다. 참 사랑을 받은 자로서 그 사랑을 보여줄 수 있다. 좌파나 우파에 속한 정치인이나 세상 사람이 보여주는 성품과 태도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가 보여주신 성품과 태도를 닮아야 한다.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않으시고, 오직 자기를 희생하는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보여주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가 참된 기독교인이다.
결론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남의 눈 속에 있는 것을 보기 전에 자기 눈 속에 있는 것을 보고, 다른 사람의 잘못을 티로 여긴다면, 자기 잘못은 들보로 여기는 종교다(눅 6:42). 정치는 정반대다. 자기 잘못은 숨기거나 축소하고 남의 잘못은 없는 것도 들춰내고 작은 흠을 엄청나게 키운다. 그래서 세상 정치에 오래 휩쓸릴수록 기독교는 근본정신부터 변질되기 쉽다. 날마다 자신을 회개하도록 만드는 복음의 은혜에서 멀어지고, 세상을 완벽하게 다스리시는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 깊어진다. 속히 임하게 될 하나님 나라에 대한 기대는 줄어들고 이 땅의 나라에 대한 염려만 가득하다. 이웃은 사랑의 대상이 아닌 증오의 대상이 되고,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권세는 조롱과 비방거리가 된다. 그러므로 제2차 냉전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좌파와 우파의 전략적인 정치 공방에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 우리 생명의 근원인 마음을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지켜내야 한다. 우리 입에서 그 말씀에 따른 참된 말, 바른 말을 내야 한다. 우리 눈을 열어 하나님의 가치관과 우선순위를 바로 보고, 우리가 행할 길을 주의 계명으로 튼튼하고 평탄하게 닦고 그 길로 주의 율례를 힘입어 나가야 한다(잠 4:23-26).
정치적 관점에서 주어진 말씀은 아니지만, 솔로몬의 이 잠언 말씀은 오늘날 정치적으로 혼란과 시험에 빠진 기독교인에게 정말 필요한 말씀이 아닐 수 없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네 발을 악에서 떠나게 하라(잠 4: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