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 채널인 “똑똑: 지식 배달”의 콘텐츠 중 “기독교 목사가 말하는 진화론이 사실인 이유”라는 흥미로운 제목의 영상을 발견했다(출처: 보기, 2024년 9월 18일 업로드) . 과학커뮤니케이터 플라스크, 한국 이집트학 연구소 곽민수 소장, 연세대학교 기독교 교양학 김학철 교수, 기독교 웹툰 작가 김민석, 이렇게 네 사람이 다섯 가지 질문에 각자의 관점으로 답하는 내용의 콘텐츠였다: 1) 성경은 역사적 과학적 사실일까? 2) 성경은 표절이다? 3) 진화론 vs. 창조론, 4) 모태신앙은 가스라이팅이다? 5) 종교가 필요할까?
플라스크와 곽민수 소장은 비교적 무신론자 혹은 불가지론자의 입장에서, 김학철 교수와 김민석 작가는 유신론자의 입장에서 각각의 문제에 답했다. 아마도 자극적인 제목인 “기독교 목사가 말하는”에서 목사가 가리키는 인물은 장로회 목사이기도 한 김학철 교수를 말하는 것 같았고, 김 교수의 답변은 나머지 세 사람의 답변에(특별히 무신론적 관점에 선 두 사람의 의견에) 철저히 맞서는 입장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또 다른 “기독교 목사”이자 성경의 무오성과 권위를 절대적으로 지지하고 신뢰하는 그리스도인의 답변은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이 칼럼을 썼다. 지난번에 이어서 세 번째 질문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3. 진화론 vs. 창조론
먼저, 과학머큐니케이터 플라스크(본명: 박윤지)는 ‘진화론과 창조론 중에 좀 더 합리적인 설명’은 진화론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녀가 합리성을 입증하는 증거로 제시한 것 중 하나는 화석이었는데, 고등 생물로 진화하는 중간 상태의 화석이 존재하지 않는 것에 관하여는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식으로 답변했다. 없는 것이 아니라 아직까지 못 찾은 것이 더 합리적인 설명이란 얘기다. 논리적으로는 그럴듯한 대답처럼 들릴지도 모르지만,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가 거대한 진화의 과정을 겪었다면 지금까지 수많은 탐험과 조사 과정을 통하여 한 개 정도의 증거는 발견하는 것이 더 합리적인 설명이 아닐까 싶다.
곽민수 소장은 진화론과 창조론을 같은 선상에서 비교하며 설명하는 것은 어렵다고 봤다. 진화론에서 정의하는 진화는 특별한 환경 가운데 더 적응력이 뛰어난 개체가 살아남은 과정이고, 창조론에서 보는 진화는 특별한 목적과 방향을 향하여 생명체가 발전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플라스크는 곽 소장의 말에 동의하면서 다윈 역시 처음부터 창조론에서 비판하는 진화 개념을 도입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진화는 목적이나 방향이 없는 과정이라고 설명하면서, 각각의 환경에서 우연히 살아남은 생명체가 각각 다른 모습으로 38억 년 동안 진화해 온 결과가 지금의 모습이라고 했다. 곽 소장은 플라스크의 말을 받아서 침팬지와 사람 중 누가 더 진화한 것인지에 관한 답은 ‘둘 다 똑같이 진화됐다’라고 했다. 서로 다른 경로를 통하여 같은 세월 진화 과정을 겪은 것이기 때문이다. 꼭 창조론의 관점으로 판단하지 않더라도 이와 같은 설명은 만족스럽지 못하다. 최초의 공통 조상이 존재하지 않는가? 어쨌든 진화의 개념엔 환경에 적응하여 살아남은 우월한 생명체가 더 나은 상태로 발전하는 개념이 들어 있지 않은가? 가장 큰 질문은 이것이다: 이들이 말하는 진화의 개념에서 동물과는 차원이 다른 인격과 인권의 가치를 어떻게 도출할 수 있는가?
기독교 목사인 김학철 교수는 창조론에서 창조 이야기와 창조 이념, 창조 신앙을 분류한다. 모든 기독교인은 세 가지 모두를 받아들이고 지지하며 신봉하지만, 이것을 세상 사람에게 설득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고 본다. 특별히 주류 과학은 방법론적 자연주의를 택하는데 창조론을 전제한 창조 과학은 그 방법을 채택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으로 판단했다. 하지만 김 교수는 자연주의 자체가 이념이라는 것을 간과한 것 같다. 눈에 보이는 것이 존재하는 모든 것이라는 사상은 관찰 결과가 아니라 철학이다. 자연주의 또는 물질주의를 전제로 관찰한 것을 해석하는 진화론 역시 이념과 신앙을 바탕으로 한다는 말이다. 창조 과학은(물론 지나치거나 과장된 것도 있지만) 똑같이 관찰된 결과를 가지고 창조 이념과 사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김 교수는 안타깝게도 진화론에게 절대적 객관성과 타당성을 양보하고, 창조론은 다만 성경 이야기와 그 속에 담긴 이념을 믿는 신앙적 사상 정도로 취급한다.
한편, 김 교수는 진화론이 가지고 있는 취약점으로 신의 창조 섭리를 부정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우연과 우연이 그 자리를 메꿔야 한다는 점을 들었다. 이것은 맞는 말이다. 김 교수가 언급한 리처드 도킨스는 ‘만들어진 신’이란 책을 통하여 ‘신을 제거해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장담했다. 그러나 그는 신의 자리에 우연히 모든 것을 완벽하게 통제하여 지금의 만물을 만들어낸 신’과 맞먹는 지혜와 능력을 자랑하는 Nothing’을 ‘우연’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냈다.
기독교 웹툰 작가 김민석은 기독교 핵심 교리는 첫 사람의 타락과 사람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인데, 진화론은 첫 사람이 누구인지조차 알 수 없다는 맹점을 받아들여야 하므로 기독교인이 받아들이기에 큰 부담이 된다고 말했다. 이 또한 맞는 말이다. 첫 사람 아담이 없으면 두 번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도 없다. 죄의 삯인 사망이 없으면 십자가 죽음을 통한 죄 사함과 새 생명의 구원도 없다. 유신 진화론을 지지하는 기독교인은 둘의 공존이 가능하다고 말하지만, 아직까지 필자는 신이 개입할 수 없는 방식으로 혹은 개입했더라도 전혀 티가 나지 않는 방식으로 피조 세계가 만들어졌다고 설명하거나 정통적인 타락의 교리를 왜곡하면서 동시에 복음을 아름답고 강력하게 선포하는 데 성공한 사람을 발견한 적이 없다.
김학철 교수는 이어서 한쪽으로 치우친 관점을 가지고 이야기하는데, 창조 과학을 받아들인 기독교인을 조롱하지 말라고 권하면서 그는 1) 정보 부족 2) 기독교인으로서 자기 정체성을 보호하고 강화하기 위하여 잘못된 과학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했다. “치열한 자체 검증 시스템을 통해서 검증된 사실” 즉 방법론적 과학이 설명하는 진화가 사실이라고 잠정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어떻게 기독교 신앙이 진화론과 공존할 수 있을지, 서로를 더 풍요롭게 할 수 있는지, 혹은 완전히 분리되어야 할 부분은 무엇인지 논하는 것이 더 “생산적인 방법”이라고 했다.
필자는 김 교수가 너무 힘없이 항복을 선언한 것으로 판단했다. 진화론을 받아들인 사람도 똑같이 두 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존재와 그분이 하신 일에 무지하다(정보 부족). 그리고 그는 존재하는 것만 믿기로 결단한 자기 정체성과 신앙을 보호하고 강화하기 위하여 선별적으로 정보를 받아들인다. 그러니까 기독교인은 정말로 치열한 검증 시스템을 통해서 검증된 사실인지부터 논의하는 단계에 뛰어들 수 있다. 정말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이 관찰된 결과만을 이야기하고 있는지, 아니면 그들의 가설과 그 가설에 전제된 철학적 사상에 유리하게 해석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철저하게 검증해야 한다. 그럴 때야 진정으로 김 교수가 말한 ‘아니오’라고 말해야 하는 것과 ‘예’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예리하게 분별 되고 그렇게 과학이 신학을 섬기는 본래 자리로 돌아올 수 있다. 필자는 하나님께서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이 모든 검증된 사실의 전제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모든 관찰된 결과를 해석하는 방법에 영향을 준다고 믿는다. 그리스도인은 이것을 단순히 종교적 성향에 불과하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사실에 접근하는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라고 주장해야 한다.
4. 모태신앙은 가스라이팅이다?
김민석 작가는 “교육은 자립을 목표로 하고 세뇌는 의존을 목표로 한다”라고 어디선가 읽은 내용을 인용한 뒤, 실제 기독교 현장에서 세뇌에 가까운 일이 많이 일어난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그는 “정신적 자립”을 목적으로 종교가 제 역할을 다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김학철 교수는 ‘세뇌’가 부정적인 단어라고 말하면서, 기독교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가 다른 사상을 비판하면서 자기 신앙을 쌓는다고 설명했다. 또한 종교는 기본적으로 언어를 통하여 세상을 이해하고 가치를 찾을 수 있도록 돕는다고 말했다. 그래서 좋은 종교는 바른 비판과 올바른 이해를 갖도록 돕고 진짜 가치 있는 것을 추구하도록 만들지만, 그렇지 않은 종교는 인간을 고립시키고 그들의 삶을 파괴한다고 평가했다. 김 교수는 결과적으로 기독교가 올바른 태도를 취하기만 한다면, 좋은 종교의 역할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가스라이팅처럼 비판적인 평가를 내릴 필요는 없다고 했다.
곽민수 소장은 “자립하기 이전에 노출되는 세계관이나 가치 기준”은 반드시 자녀에게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1) “강요” 2) “대안적 세계관에 대한 폄하와 멸시”가 동반된다면 그것은 가스라이팅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개인적인 경험으로 이를 입증하려 했는데, 어렸을 때부터 신앙인으로 자라던 그가 고고학적 지식을 연구하면서 신앙관과 충돌을 지속적으로 겪다가, 결국 ‘신이 없다면’이라는 생각과 함께 기독교 세계관에서 탈출했을 때, “엄청난 자유로움을 맛봤”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배타적인 종교일수록 “종교 교육에 있어 조심스러운 접근이 필요”하다고 했다.
어떤 면에서 일리가 있는 말이다. 성경은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말하라’고 명령한다. 참된 것을 전할 때는 강요나 멸시, 미움 등의 사랑과 반대되는 것을 동원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김 교수 말처럼 세상을 바라보고 평가하는 기준 없이 사는 사람은 없다. 그것이 주류 종교이든 개인이 붙잡는 신념 체계이든, 결국 누구나 믿는 바가 있다. 요즘 기독교 안에서 자녀에게 종교의 선택권을 줘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그들이 원치 않으면 권하지도 말라는 것이다. 그것이 사랑으로 말하기 위한 태도를 강조하는 말이라면 납득할 만하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으로부터 끊임없이 권면을 받는다. 세상의 유행하는 신념 체계를 따르도록, 하나님 없다고 말하고 자기 욕구대로 사는 것이 최고라고 말하는 이교도 사상의 가스라이팅을 받는다. 항상 “사랑 안에서” 해야 하는 것은 기독교인의 과제이지만, “참된 것을 말하라”는 명령을 부정하고 거역하는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을 이해하는 가장 합리적인 설명(사실상 유일하게 진실한 설명)과 세상의 가치를 정확하게 보여주는 기독교 교리를 앉았을 때나 섰을 때나 부지런히 가르쳐야 할 책임이 부모에게 있다. 믿는 자에게 영생이, 거부하는 자에게 영벌이 있다고 믿는 부모는 자녀가 영벌에 처해지는 것을 지켜만 볼 수는 없다. 세상이 아무리 삐딱하게 ‘가스라이팅’이라는 말로 비방해도 말이다.
5. 종교가 필요할까?
김민석 작가는 기독교가 없어도 세상은 종교성이 짙다고 평가했다(굿이나 점치는 것만 봐도). 결국 종교 없이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이 현실이고, 그러니까 좋은 종교가 되기를 힘쓰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다. 플라스크 역시 힘들고 외롭고 필요할 때 도피처와 심리적 안정감을 주는 도구로 종교가 필요하다고 봤다. 그녀는 윤리적 기준선 또한 종교에서 발견된다고 판단했다. 곽민수 소장은 종교와 종교적 감수성을 분리했다. 모든 사람은 종교적 특성을 가지고 있어서 종교의 유무와 상관없이 종교적 감수성을 가지고 있고, “독립적인 주체로 자신의 실존을 강화하고 만들고 싶다면” 종교적 감수성을 벗어나려고 시도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권했다. 그는 인류의 발전이 결국 종교적 감수성을 대체할 새로운 신념 체계를 창조할 것이라고 기대했다(종교가 없어져도 무관한 세상이 올 것이란 기대로 볼 수 있겠다). 김학철 교수는 인권이나 안식일(주일에 쉬는 개념) 등 인간 사회의 중요한 자산을 지켜내는 데 필수적이라고 봤다. 그러므로 이것을 계속해서 보존하고 계승하려면 종교는 자기 역할을 지속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필자는 김 교수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고 본다. 그리고 두 명의 무신론자(한 명은 불가지론자에 가깝지만)와 논의하는 이와 같은 장에서 어느 정도 발언의 내용과 수위를 조절할 필요도 있다고 생각한다. 쉽게 말하면, 이곳에서 예수 그리스도만이 길, 진리, 생명이시기 때문에 기독교가 필요 없다고 말하는 순간 모든 인류에게 소망이 없고 멸망과 심판만이 주어질 뿐이라고 말하는 것이 어색하고 불편한 자리였을 것이라고 감안해 본다는 말이다. 그러나 필자는 ‘친절’과 ‘타협’은 예리하게 구분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진리는 그것을 거부하는 이들에게 항상 불쾌감을 주기 마련이다. 진리를 말하는 것 자체가 무례한 것으로 비칠 수 있다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는 생물학적으로 다르다’라고 말하는 것이 동성애자들에게 혐오 발언으로 들리는 것처럼 말이다. 때로는 친절하고 융통성 있어 보이기 위한 타협의 유혹을 받는다. 예를 들어 ‘성과 젠더는 다르지만, 성은 전통적으로 남자와 여자로 분류됐다. 각자의 믿음이 다를 수 있다고 보지만,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고 있으며, 이렇게 분류할 때, 이런저런 유익이 있다고 생각한다’는 식으로 돌려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친절하게 말하기 위한 노력이 ‘타협’이 될 소지가 크다. 혹자는 위의 발언을 통해 ‘그러면 성과 젠더는 구분하여 적용할 수 있구나’, ‘남자와 여자의 분류는 전통적인 방식인 것이고 새로운 방식으로는 또 다른 구분이 가능하구나’, ‘저 사람은 남녀의 구분을 지지하지만, 다른 관점을 가진다고 해도 각각 장단점이 있을 뿐 본질적으로 틀린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구나’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그래서 많은 경우 진리는 단순하게 선포된다. 빙빙 돌려 말하거나 의도적으로 분명한 선언을 회피하면 결국 의도하지 않은 것을 전달하기 마련이다. 기독교를 대변하는 자리라면 가장 기독교적인 대답을 하는 것이 진리를 타협하지 않고, 오해를 낳지 않고, 정확하게 또 친절하게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세상이 그리스도를 미워한 것처럼 그분을 노골적으로 따르는 자는 핍박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분을 정확하게 증거했다고 받는 비방이나 조롱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기쁨으로 감수하는 일이 아닌가. 그리고 지금까지 그런 방식으로 기독교가 이 땅에 심기고 자라고 열매 맺고 있지 않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