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극적인 제목이었다: “기독교 목사가 말하는 진화론이 사실인 이유.” 유튜브 채널인 “똑똑: 지식 배달”의 콘텐츠 중 하나가 그렇게 관심을 끌었다(출처: 보기, 2024년 9월 18일 업로드) . 과학커뮤니케이터 플라스크, 한국 이집트학 연구소 곽민수 소장, 연세대학교 기독교 교양학 김학철 교수, 기독교 웹툰 작가 김민석, 이렇게 네 사람이 다섯 가지 질문에 각자의 관점으로 답하는 내용의 콘텐츠였다: 1) 성경은 역사적 과학적 사실일까? 2) 성경은 표절이다? 3) 진화론 vs. 창조론, 4) 모태신앙은 가스라이팅이다? 5) 종교가 필요할까? 앞의 두 사람은 무신론자(혹은 불가지론자), 뒤의 두 사람은 나름대로 기독교 관점을 가지고 논의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마도 자극적인 제목에 나오는 “기독교 목사”는 다른 곳에서 장로회 목사라고 소개되는 김학철 교수를 가리키는 것 같다. 각각의 질문을 또 다른 ‘기독교 목사’로서 평가해 보려 한다. 이를 통하여 콘텐츠가 전달하는 정보를 성경의 바른 시각으로 바르게 분별하고 유익을 얻기를 원한다.

 1. 성경은 역사적 과학적 사실일까?

먼저, 김학철 교수는 이런 논리로 성경이 역사적 과학적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1) 성경은 당시 사람들의 신앙심을 담은 고백이다
(2) 그들의 고백에 역사적 과학적 사실이 사용될 수 있다
(3) 하지만 성경은 과학과 역사를 서술하려는 목적으로 기록되지 않았다
(4) 그러므로 성경을 통하여 과학적 역사적 사실을 얻으려고 하면 반드시 실패한다

그러자 스스로 무신론자라고 밝힌 곽민수 소장이 성경이 기록된 고대 근동에서 지금의 역사 기록물과 같은 형식을 발견할 수 없다고 장담한다. 역사적 사건을 기술하는 보고서 형식보다는 왕같이 핵심적인 인물을 영웅으로 묘사하기 위해 시나 신화 형식을 빌려 허구적으로 그려낸다는 것이다. 결국 성경을 포함한 당시 시대의 문서는 글의 작성 목적, 즉 왕의 정치적 입지를 굳히려는 의도 등을 통해 파악해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경도 이스라엘 백성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목적에 의하여 부정확한 역사 기술이 들어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곽민수 소장은 확신한다.

이어서 에끌툰의 운영자인 김민석 작가는 성경의 저자가 “역사로 의도하고” 성경을 기록한 것은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굳이 역사적 실증을 할 필요가 없이 다만 그들이 의도한 정신과 태도를 오늘날 독자가 발견하고 지금 이 시대에 바르게 적용하는 것이 성경의 더 좋은 적용이라고 주장했다. 플라스크는 나일강이 피로 물든 장면은 적조현상이나 산화철이 포함된 비로 보는 것이 더 과학적인 주장이라고 말하면서, 당시 사람들은 이러한 과학적 현상에 관한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피로 변했다’는 무지한 진술을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필자는 김학철 교수의 1, 2, 3번 논증에 동의한다. 성경엔 분명 역사적 과학적 사실이 담겨 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성경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분이 자기 백성을 위하여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를 기술하기 위한 목적을 갖는다. 성경은 과학 교과서나 역사 교과서로 사용하기 위하여 기록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자기계시에 합당한 반응 곧 예배와 섬김과 사랑을 이끌어내기 위한 책이다. 그러나 3번에서 섣불리 4번으로 건너기 전에 먼저 “성경의 무오성에 관한 시카고 선언문”의 이 구절을 읽어보자:

12항: 우리는 성경 전체가 무오하며, 모든 거짓과 속임수와 허위로부터 자유롭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성경의 무류성과 무오성이 역사와 과학과 관련된 내용은 제외한 채 단지 영적, 종교적, 구원적 주제에만 국한된다는 것을 부인한다. 아울러 우리는 지구의 역사에 관한 과학적 가설들이 창조와 홍수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부인하는 데 올바르게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한다.

성경의 무오성에 관한 시카고 선언문에 서약한 이들은 성경의 무오성(오류가 없는 성경의 속성)과 무류성(오류가 있을 수 없는 성경의 속성)을 신뢰하는 300여 명의 복음주의 학자들이다. 대표적으로 잘 알려진 제임스 몽고메리 보이스, 노먼 가이슬러, 프랜시스 쉐퍼, 제임스 패커, R. C. 스프로울, 존 맥아더 등이 있다. 만일 이들처럼 성경의 무오성과 무류성을 신뢰한다면, 김학철 교수의 마지막 논증은 받아들일 수 없는 주장이 되고 만다. 왜 그런가? 성경이 거짓과 실수가 조금도 없으신 하나님의 저작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리 목적이 과학적 역사적 사실을 밝히는 것이 아닐지라도, 성경이 포함하고 있는 모든 과학적 역사적 정보는 반드시 “모든 거짓과 속임수와 허위로부터 자유”로운 사실이어야만 한다. 성경이 영적, 종교적, 구원적 주제를 다룰 때, 비유나 환상, 예언을 가지고 말할 때도 있다. 하지만, 역사와 과학적 사실을 통하여 설명할 때도 있다. 그런데 성경의 주목적이 영적, 종교적, 구원적이라는 이유로 성경이 주장하는 역사적 과학적 사실까지 부정한다면 그것은 성경에 명백한 오류가 있다는 말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아무리 ‘목적이 달라서 그렇다’는 변명을 해도 플라스크가 말한 것처럼 무지해서 사실이 아닌 정보를 기록한 것밖에는 안 된다. 결국 “성경을 통하여 과학적 역사적 사실을 얻으려고 하면 반드시 실패한다”는 말은 성경에 기록된 과학적 역사적 사실에 반드시 오류가 있다는 말이다.

더 큰 문제는 말씀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여호와가 이같이 이르노니 ‘네가 이로 말미암아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볼지어다 내가 내 손의 지팡이로 나일강을 치면 그것이 피로 변하고’”(출 7:17). 하나님도 과학적 지식이 짧으셔서 적조현상이나 산화철이 섞인 비를 ‘피’라고 잘못 말씀하신 것인가?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역사적 사실을 뻥튀기하고 조작하는 동안 진리의 영, 성경의 진짜 저자이신 성령 하나님은 왜 그 많은 거짓 정보가 기록되도록 내버려두신 것일까? 나름대로 기독교 입장에서 말한 김학철 교수와 김민석 작가는 무신론자 혹은 불가지론자라고 밝힌 나머지 두 사람과 성경을 순전히 오류가 많은 인간의 책으로 본다는 면에서 조금도 다르지 않다.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라는 성경 자체의 주장은 그들의 답변에서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딤후 3:16-17). 성경을 바라보는 두 기독교인의 낮은 관점은 다음 질문에서도 비기독교인과 전혀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2. 성경은 표절이다?

김민석 작가는 노아 홍수 이야기가 고대 수메르와 바빌론 홍수 설화와 닮았다고 말한다. 요셉 이야기도 이집트 문학의 두 형제 이야기와 유사한 점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구약 성경의 몇몇 부분은 “당시 문화에 대한 비평”으로 명백히 보인다고 평가한다. “누가 봐도 패러디”라고 말한다. 김학철 교수는 두 가지 가능성을 제시한다. 먼저, 구약의 지혜 문학이 고대 지혜서에서 발견되는 현상은 비슷한 문화가 나타난 두 지역이 있다는 것을 말해줄 뿐, 어디가 원조인지는 알 수 없다고 말했다. 동시 발생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앞서 ‘패러디’라고 말한 부분은 “안티 내러티브”라는 형식의 문학으로 어떤 대상을 대항하기 위한 목적으로 “다른 것의 모티브, 쓰임, 소재, 구도들을 상당히 갖고 온” 그러나 “성경만의 메시지를 갖고 있”는 저작으로 봐야 한다고 했다. 차용하긴 했어도 성경이 다른 문학에서 발견할 수 없는 가장 뛰어난 가치를 담고 있고 그것이 오늘날 서구 문명의 좋은 장점들을 만들어낸 독특한 자원이라고 평가한다.

곽민수 소장은 고대 근동에서 ‘표절’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던, 오히려 서로의 문화를 차용하여 자기들의 관점으로 재구성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현상이었다고 설명한다.

1번 질문과 똑같은 관점, 그러니까 성경이 당시 고대 근동 문학과 별반 차이가 없는 방식, 서로의 문학과 서사를 표절하고 차용하여 만든 인간의 저작물이라는 관점을 기독교인이나 비기독교인이나 똑같이 공유하고 있다. 사실 유사한 서사와 문학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성경이 그것을 베꼈다는 주장은 자유주의 신학이 개발한 비평 이론을 사실로 받아들여 성경의 연대를 성경 자체가 주장하는 것보다 훨씬 나중으로 끌어내려야 근거를 갖는다. 가령 모세가 모세 오경을 썼다는 전통적인 주장(“모세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고, 출 24:4; “모세가 여호와의 명령대로 그 노정을 따라 그들이 행진한 것을 기록하였으니, 민 33:2)을 거부하고,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을 때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하려고 누군가가 모세의 이름으로 당시 문학을 차용하여 만든 저작물이 모세오경이라고 주장해야 위와 같이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첫째, 고대로부터 물려받은 유대인의 전통적인 가르침과 초대 교회의 일관된 주장보다 현대 신학 이론이 더 정확한 연대 측정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도대체 어디로부터 난 것일까? 만일 성경이 전통적으로 주장된 연대에 기록된 것이 사실이라면(성경 자체의 증거도 분명히 있다), 성경은 오히려 고대 근동 문학이 베낀 원본이지, 그 반대 또는 동일한 형식의 저작물로 볼 수 없다. 둘째, 비기독교인이나 기독교인이나 다를 바 없이 주장하는 것처럼 성경은 정말 순수한 인간의 책에 불과한 것인가? 하나님은 고대 근동의 다른 신들과 마찬가지로 신앙심을 갖고 있는 이들이 만들어낸 신이고, 기독교인은 그중 가장 합리적인 신을 선택하여 문명의 여러 가지 이득을 가져다주고 있는 것인가?


앞으로 세 가지의 질문을 더 평가하겠지만, 우리는 오늘날 비기독교인에게 다가가는 세련되고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며 친절하고 공감하는 태도와 배려하는 자세 갖춘 기독교인을 많이 발견한다. 김학철 교수는 잘잘법이라는 채널을 통해 수십만 명의 구독자에게 기독교의 가르침을 전달하고 있다. 이들의 관점에서 시카고 선언문은 고리타분하고 오래된, 보수적이고 치우친 기독교의 극단주의적 가르침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시카고 선언문은 성경이 무오하고 무류한 하나님의 말씀이고 그 안에 담겨 있는 모든 정보가(영적, 종교적, 구원적이든, 역사적, 과학적이든) 허위나 거짓이나 오류가 전혀 없는 사실이라고 확신한다. 성경은 주변에 있는 문학을 차용한 더 나은 인간의 저작물이 아니라, 무지하고 완악한 사람에게 하나님이 은혜로 계시한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다. “똑똑: 지식 배달”의 이번 콘텐츠는 오늘날 대중이 사랑하는 기독교 목사의 입장을 잘 담아냈는지 몰라도, 또 다른 목사의 관점에서 보면, 역사적 과학적 오류가 가득한, 고대 근동의 문학을 베껴낸 인간의 저작물이 성경이라고 주장하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리고 그 주장은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철저히 부정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무시하는 사람들의 주장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과연 이들처럼 성경을 보는 사람이 시편 기자처럼 이렇게 고백할 수 있을까?

여호와여 주께서 가까이 계시오니 주의 모든 계명들은 진리니이다
내가 전부터 주의 증거들을 알고 있었으므로 주께서 영원히 세우신 것인 줄을 알았나이다
주의 모든 계명들이 의로우므로 내 혀가 주의 말씀을 노래하리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의 구원을 사모하였사오며 주의 율법을 즐거워하나이다
(시 119:151-2, 173-4)

성경에 관한 관점은 곧 성경의 저자이신 하나님을 대하는 자세를 반영한다. 그리고 성경을 오류가 있는 인간의 책으로 보는 이들이 제시하는 하나님은 성경의 하나님이 아니다. 결론적으로 성경과 성경이 증거하는 하나님을 왜곡하거나 불신하는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니라 기독교를 모방한 이교도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