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해석에 있어서 아주 유명한 말이 있다. “문맥을 벗어난 본문은 기만이다”(“A Text without a Context is a Pretext”)라는 말이다. 이 말은 성경을 해석할 때, 반드시 본문을 둘러싼 외부 문맥(당시 문화, 역사, 언어, 배경 등) 그리고 내부 문맥(본문 앞뒤를 둘러싼 성경의 내용) 안에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성경 해석의 근본 원리를 강조한다. “Pretext”는 “핑계”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무언가를 하는 진짜 이유를 숨기면서 대신 둘러댄 구실’을 말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남을 속여 넘긴다”는 의미의 “기만”으로 볼 소지가 충분하다. 남을 속이려는 의도가 분명한 경우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문맥을 벗어난 성경 해석은 무지하여 자신과 남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고 성경의 의미를 오도하는 죄라고 말할 수 있다.

2024년 10월 1일 당당뉴스에서 “기독교대한감리회 소속 목사 9인의 공동 고백”을 게재했다(보기). 이 고백문을 작성하고 발표한 이들은 올해 서울에서 열린 퀴어문화축제에서 축복식에 참여한 목사들이다. 총 8개의 핵심 주장이 담겨 있는 이 고백문에는 많은 성경 구절이 인용되어 있다. 먼저, 서문은 마가복음 12장 31절로 시작한다: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여라. 이 계명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새번역). 이 말씀은 한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물었던 질문, “모든 계명 가운데서 가장 으뜸되는 것은 어느 것입니까?”에 관한 예수님 대답의 일부다. 예수님은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힘과 목숨을 다하여 사랑하라’는 계명을 첫째 되는 계명이라고 하셨고, 둘째 되는 계명으로 공동고백에서 인용한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말씀하셨다. 그런데 공동 고백에서는 “둘째는 이것이다”를 감추고, “이 계명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를 마치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여라”에만 해당되는 말씀인 것처럼 인용했다.

결국 성소수자를 축복하는 목사들의 행위는 이웃을 자기 몸같이 사랑하는 가장 큰 계명에 순종한 행위이고, 그들의 행위에 어떤 이유로든 반대한다면 ‘가장 큰 계명’을 거스르는 것이라고 책망하는 듯하다. 하지만 “이 계명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가 가리키는 계명은 첫째와 둘째 되는 계명 모두이고(그래서 복수형이 사용됐다: “계명들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둘 다 중요하지만, 첫째 되는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둘째 되는 계명에 순종하기 위하여 이웃을 사랑할 때, 그 목적, 동기, 방법, 수단 등이 첫째 되는 계명의 통제를 받는다. 아무리 이웃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는 방법과 수단으로 하는 것은 계명의 우선순위를 뒤바꾸는 잘못을 낳는다. 이런 측면에서 성소수자를 축복하지 않는 것은 그들을 미워하거나 혐오하기 때문이 아니다. 사랑하지만 하나님이 미워하시고 심판하시는 길을 축복하고 권장하는 방법으로 사랑할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사랑하시는 길로 그들을 돌이키게 하고 회복하도록 돕는 것이 우선순위에 따라 가장 큰 계명들에 순종하는 법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것이 진짜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이웃을 사랑하는 올바른 길이다.

정리하면, 기독교대한감리회 소속 목사 9인은 성소수자를 축복하지 않는 것을 가장 큰 계명인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어긴 것으로 정죄하지만, 사실은 가장 큰 계명들 중에서 우선순위에 따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식으로 이웃을 사랑하기 위하여 축복하기보다 회개하도록 돕는 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본문의 의미에 더 부합하는 행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1. “성서는 상황에 맞게 재해석 됩니다” = 히브리서 1장 1-2절?

공동 고백의 8가지 주자에 각각 근거 구절로 인용된 말씀도 ‘기만’에 가깝다. 첫 번째 주장인 “성서는 상황에 맞게 재해석 됩니다”를 지지하기 위한 본문은 히브리서 1장 1-2절이다: “하나님께서 옛날에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번에 걸쳐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으나, 이 마지막 날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공동 고백을 작성한 목사들은 “성서는 시대의 상황에 맞게 재해석되어 왔”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본문은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내용이 아니라 수단과 방법이 달라졌다는 것을 말한다. 과거엔 예언자들을 통하여, 마지막 날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과거엔 “여러 가지 방법” 그러니까 환상, 꿈, 기록 등을 통하여, 마지막엔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인격과 삶을 통하여. 이후 히브리서 전체 내용을 보면 과거 예언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이 계시하신 내용이 그림자였다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실체가 드러났다고 말한다. 요컨대 예수님은 구약을 재해석하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셨다.

공동 고백의 저자들은 감리회 <신학 지침>이 성경의 “축자적 해석”을 반대하고, 시대에 맞게 성경을 “새롭게 해석”할 것을 요구한다고 주장했다. 감리회의 성경해석 원칙이 정말 그렇다면 안타깝지만, 그들의 주장은 적어도 감리회 안에서는 타당성을 가질 수도 있다. 하지만 성경의 무오성과 권위를 인정하고, 기록된 문맥 안에서 성경을 해석한다면, 절대로 그들은 성경의 지지를 받을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의 주장처럼 동성애 관련 성경 구절은 “정상을 벗어난 성행위 혹은 성폭력”만 다룰 뿐이지 “현대적 의미의 동성애” 즉 “동성에게 느끼는 낭만적이거나 감정적인 성적 매력” 등은 예외로 봐야 한다는 말은 절대로 문맥 안에서 성경 본문의 의미를 찾은 결과가 아니다. 오히려 지금 시대의 문맥으로 성경 본문을 재해석한 것이다. 하나님은 과거 옛날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번에 걸쳐 여러 가지 방법으로 말씀하실 때도 모든 종류의 동성애를 죄라고 하셨고, 마지막 날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대속의 대상 중에는 폭력적이고 비정상적인 성범죄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마음으로 간음한 자들까지 모두 포함되어 있다. 결론적으로 히브리서 1장 1-2절은 성경을 상황에 맞게 재해석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모든 상황을 구약의 예언과 그것을 성취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해석하라고 요구한다.

 2. “신학의 다양성은 존중되어야 합니다” = 사도행전 17:23?

‘신학의 다양성은 존중되어야 한다’는 말 자체는 맞다. 공동 고백의 저자들은 세 가지 논점으로 이것을 주장한다: 1) “신학은 시대와 상황에 맞추어 다양하게 확장되고 발전해 왔습니다.” 2) “감리회는 신앙과 신학의 다양성을 존중하고, 그 속에서 일치를 추구합니다.” 3) “감리회는 연구와 토론을 통한 다양성 속의 일치를 지향해야 합니다.” 세 가지 논점 모두 일리가 있다. 하지만, 오늘날 동성애를 바라보는 신학적 관점이 다양해졌기 때문에 동성애를 지지하고 축복하는 새로운 관점도 “다양성”으로 존중해야 한다는 주장은, 앞서 첫 번째 주장과 결이 같다. 새로운 시대 문화의 문맥을 가지고 성경 본문을 재해석해야(신학을 재정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충격적인 것은 그들이 인용한 사도행전 17장 23절에서 “나는 여러분이 알지 못하고 예배하는 그 대상을 여러분에게 알려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한 바울의 의도가 정확히 그들의 주장을 반대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아덴에 있는 여러 우상을 섬기는 자들에게 ‘하나님도 너희가 믿는 다양한 신들 중 하나’라고 설득하기 위해 이렇게 말한 것이 아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우주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이라고 했고(행 17:24), “하늘과 땅의 주님이시므로, 사람의 손으로 지은 신전에 거하지 않으”신다고 했다(행 17:24). 바울은 다양성을 존중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우상과 차별된 유일하신 하나님을 선포했다. 그들이 신전에 모신 다양한 신들은 모두 사람이 지은 건물에 갇힌 우상에 불과하다. 참 신, 하늘과 땅의 주인이시며 온 우주의 창조주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다. 바울은 나아가 그 하나님께서 세계를 심판하시기 전에 회개하라고 경고했다(행 17:30-31).

결론적으로 사도행전 17장 16-34절을 해석할 때, 바울이 우상 숭배자들에게 전도할 때, 전도 대상을 존중하면서 유순하고 부드러운 말투와 지혜로운 서두를 사용했다고 설명하는 것은 옳다. 그러나 바울의 메시지는 절대로 ’신학의 다양성을 존중하자’는 게 아니었다. 반대로 그는 다양한 신들을 모두 부정하고 참 신, 유일하시고 살아계신 하나님만 존중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3. “모든 사람이 죄인입니다” = 요한복음 3장 17절?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말은 부정할 수 없는 성경의 가르침이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그런데 성소수자를 축복한 9인의 목사들은 여기서 이상한 주장을 전개한다: 1) “죄 없는 인간은 없고, 죄 앞에서 인간은 동등합니다”, 2) “정죄와 심판은 하나님의 일이지, 인간의 일이 아닙니다”, 3) “성소수자에 대한 정죄와 심판은 성서의 가르침에 반합니다.” 요약하면 우리 모두 죄인이니까 성소수자를 정죄할 자격이 없고, 성경 또한 성소수자를 정죄하지 말라고 가르친다는 말이다. 공동 고백의 저자들은 이것을 입증할 성경 구절로 “너희 가운데서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라는 예수님 말씀을 인용했다(요 8:7). 세상 모든 죄인을 향한 성경의 가르침으로 인용된 말씀은 요한복음 3장 17절이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것이다.” 확실히 ‘심판’이 아니라 ‘구원’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런데 문맥 안에서 본문을 들여다보면, 모든 죄인이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곧 발견하게 된다. 바로 이어지는 18절 말씀에서 예수님은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다. 그렇다. 하나님은 모든 죄인에게 긍휼을 베푸신다. 모든 죄인을 구원하기를 기뻐하신다. 그러나, 모든 죄인이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 아들을 믿는 자는 구원을, 아들을 믿지 않는 자는 심판을 받는다. 누가 아들을 영접하는 자인가? 누가 아들을 믿지 않는 자인가? 이어지는 문맥, 19-21절을 보자.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요 3:19-21)

빛이신 예수님께서 자기의 어두움 곧 악한 행위를 밝게 드러내실 때, 빛으로 가까이 나와 진리를 따르는 자는 하나님 안에서 행하는 자라는 것을 입증한 자다. 반대로 자기 악한 행위가 드러날까 두려워하여 빛이신 예수님에게서 멀어지고, 예수님의 진리의 말씀보다 그들이 더 사랑하는 악을 따르는 자가 바로 정죄 받은 자다. 그러면 진리의 말씀이 동성애가 죄라고 밝히 말하는데도, 그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여 빛으로 나와 변화를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악을 계속 행하는 자는 구원받은 자인가 아니면 정죄 받은 자인가? 간음 중에 잡혀 예수님 앞에 나온 여인은 정죄 받지 않았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서 원하는 대로 계속 같은 삶을 즐겨라’라고 하지 않으시고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요 8:11). 그러므로 공동 고백의 저자가 의도한 바와 달리, 동성애를 포함한 모든 죄 앞에 평등한 죄인들은 그들의 죄를 버리고 빛이신 예수님께 나와 구원을 받아야 한다. 그들을 새롭게 하시고 진리를 따라 행하게 하시는 구세주와 영생을 누리며 동행해야 한다. 성경은 모든 죄인에게 그것을 요구하고, 요구하라고 가르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