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그리스도인은 영적 출생과 성장을 경험한다. 전자를 중생 혹은 거듭남이라고 말하고(요 3:3), 후자를 성화의 과정 혹은 구원에 이르는 과정이라고 부른다(빌 1:19). 둘 다 하나님 말씀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신자의 거듭남은 ‘썩지 아니할 씨’ 곧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이다(벧전 1:23). 영적 출생을 일으키는 믿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에서 난다(롬 10:17). 신자의 성장에도 말씀의 역할이 크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한다(딤후 3:15). 그래서 신자는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기 위해 갓난아기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해야 한다(벧전 2:2). 결국 신자의 영적 출생과 성장 모두 하나님을 아는 지식 곧 신학이 요구된다.

어떤 사람은 ‘지식은 교만하게 한다’며 성경 지식을 쌓는 것을 터부시한다. 하지만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운다’고 말한 사도 바울의 의도는 지식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는 것의 문제 곧 교만을 지적하려는 것이었다(고전 8:1-3). 바른 신학은 신자를 바른길로 인도한다. 건전한 성경의 가르침으로 신자의 마음을 교훈하고 책망한다. 구부러진 삶을 바르게 펴고 의로운 길로 걷는 법을 교육시킨다(딤후 3:15-16). 요컨대 바른 신학은 바른 성품을 낳는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바르게 자라가면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더욱 닮게 된다는 말이다(벧후 3:18).

그러므로 신학을 하는 방식보다 중요한 건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는 양식이 되는 신학을 하고 있느냐’이다. 당신은 신학교 강의실에서 성경의 지식을 쌓을 수 있고, 개인적으로 성경을 공부하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을 수도 있다. 교회에서 교사의 은사를 가진 성도를 통해 그리스도를 배울 수 있다. 가장 중요한 질문은 다음과 같다: 그 배움이 당신을 더욱 예수님 닮게 하는가?

바른 신학은 그리스도의 겸손을 가르친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 11:29)

예수님은 겸손의 왕이시다. 그래서 그분을 바르게 배운 이들은 모두 겸손을 닮는다. 사도 바울은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다(행 22:3). 사람들이 최고로 알아주는 신학교 교수 밑에서 박사 과정을 밟은 셈이다. 베스도는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라고 외치기까지 했다(행 26:24). 하지만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잃어버리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얻기를 원한다고 고백했다(빌 3:8). 바른 신학을 하는 사람은 지식을 자랑하는 데 사용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데 사용한다(고전 13:2).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 찾으시는 영혼을 얻기 위해 사용한다.

바울은 많은 서신서를 통해 교회의 부족한 지식을 깨우치고 부패한 삶을 꾸짖었지만, 재판장의 자리에 오르지 않고 그들과 똑같은 준행자 입장에서 그렇게 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바울은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권면했고, 그 권면은 자기 몸을 쳐서 복종시키는 자신에게도 적용되었다(빌 2:3). 바른 신학은 건전한 성경의 가르침을 남에게 엄격하게 적용하고 자신은 예외로 두지 않는다. 남을 판단하는 그 판단으로 자기 자신을 똑같이 판단한다. 당시 대표적인 신학도인 바리새인과 얼마나 다른가? 한때 바리새인이었던 바울은 이렇게 묻는다: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롬 2:3).

당신의 신학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게 하는가? 아니면 겸손히 예수님과 이웃을 사랑하기 위한 종이 되는가? 당신의 신학은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도구인가? 아니면 당신도 언제나 굴복해야 할 주권적인 뜻인가? 당신의 신학이 사랑이라는 가장 좋은 길로 당신을 인도하는지 보기 원한다면 고린도전서 13장 1-7절을 읽어보라.

바른 신학은 그리스도의 거룩을 가르친다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마 23:3)

바리새인의 신학은 그들의 삶을 철저히 통제했다. 바리새인의 신학을 따르는 이들은 누구든지 삶의 일거수일투족을 간섭받았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삶의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왜 그럴까? 예수님은 그들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라고 책망하셨다(마 15:8). 성경의 지식이 입술과 머리 나아가 삶의 구체적인 방식까지 영향을 미쳤으나 진정한 삶의 변화를 가져오는 심장부 곧 마음에 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성령을 통해 심령을 변화시키고 참된 의미에서 삶의 변화를 가져온다(롬 12:2; 엡 4:23).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고 그 분별대로 사는 삶은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을 때 일어난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방탕한 삶에서 떠날 것을 요구하였다. 그것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는 그들에게 마땅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바른 신학을 하는 이들은 달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엡 4:19-20)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배운 이들은 그리스도의 거룩하심을 닮는다. 모든 더러운 것에서 점점 멀어진다. 참고로 성경이 말하는 더러운 것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 수군거림, 비방, 능욕, 교만, 자랑, 부모 거역, 우매, 무정, 무자비(롬 1:29-31).

많은 기독교인들이(특히 잘 알려진 이들의 경우 더 잘 드러난다) 가지고 있는 지식을 삶에 반영하지 못한다. 그들의 신학이 심령을 새롭게 하는데 무용지물이고 그 결과 삶에 온갖 더러운 것이 함께 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거룩하심을 닮아가는 데 항상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바울처럼 우리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가슴을 칠 때가 많다(롬 7:24).

하지만 우리는 적어도 바울이 일꾼의 자격으로 가장 먼저 제시한 기본 곧 “책망할 것이 없”는 사람은 되어야 한다.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손가락질당할만한 성품의 결함은 가지고 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미리 아시고 택하시고 구원하신 목적은 아들의 형상을 닮게 하기 위함이다(롬 8:29). 그렇다면 우리는 완벽에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날마다 조금씩 더 그분의 거룩하심을 닮아가야 한다. 영화롭게 되는 그날을 기다리는 신자는 성화의 경주에 소극적으로 임하지 않는다.

결론

우리는 지금까지 건강한 신학의 몇 가지 필수 요소를 살펴봤다. 첫째, 바른 신학은 하나님 말씀인 성경의 절대 권위에 복종하는 신학이다. 성경 본문의 의미를 시대의 필요에 따라 혹은 주관적인 느낌에 따라 변개하는 신학은 건강하지 못한 신학이다. 둘째, 바른 신학은 기도의 옷을 입고 겸손히 배우는 신학이다. 말씀을 하나의 연구 대상으로 삼아 마음대로 해체하는 신학이나 우상처럼 쥐고 신비로운 경험을 좇는 신학은 모두 기도하지 못하게 하는 신학으로 근본적인 해악이 그 안에 있다. 마지막으로, 바른 신학은 바른 성품을 낳는다. 항상 배우나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게 하는 신학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고 그 은혜 안에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신학이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20)

그리스도인 중에서 신학을 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어디에서 누구에게 배웠든 중요한 건 그 신학이 그의 삶에서 어떤 열매를 맺게 하느냐이다. 산속에서 조용히 성경을 묵상하며 예수님을 배웠다고 해도 주관적인 해석으로 본문을 멋대로 주무른다면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신학교에서 뛰어난 교수 아래 체계적인 성경 지식을 쌓았다 해도 성도에게 자랑하고 가르치려 들고 교만하고 사랑 없이 행한다면 ‘배설물’에 불과한 지식이 되고 만다. 교회에서 교사나 목사에게 꾸준히 배운 설교와 가르침으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얻었다 해도 온갖 불의한 말과 행동을 서슴지 않고 행한다면 그 사람의 신학도 쓸데없다. 좋은 신학은 좋은 열매를 맺는다. 어디에서 누구에게 배웠든 하나님 말씀 앞에 굴복하고 늘 기도로 구하는 자, 많든지 적든지 배운 지식을 가지고 성도를 겸손히 섬기고 사랑하는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혜와 지식이 자라갈수록 예수님의 겸손과 거룩하심 가운데 자라감으로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지는 자, 그가 바로 진짜 좋은 신학을 하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