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9일, 토요일 밤, 서울 이태원에서 열린 할로윈 행사에 10만여 명이 몰려들면서, 좁은 골목에 지나갈 수 있는 인원의 7배가 넘는 인파가 서로 밀고 당기다가 내리막길에 넘어져 현재까지 155명의 사망자와 149명의 부상자를 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을까? 많은 사람이 황망한 죽음에 충격을 받고, 또 많은 이들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에 아파하면서 ‘PRAY FOR 이태원’이란 문구 아래 기도를 요청했고, 국경을 넘어 기도와 위로로 많은 이들이 재앙을 함께 이겨내는 일에 동참하고 있다.
지금은 말할 때가 아니라 조용히 함께 있어 줄 때라고 말하는 이들의 말에 공감한다. 아무리 좋은 표현과 분명한 위로의 목적을 가진 말도 섣부른 판단과 정죄로 들리기 쉬운 때임에 틀림이 없다. 하지만, 조용히 함께 기도로 동참하기 원하는 그리스도인도 재앙 앞에 어떤 기도를 드려야 할지 막막할 때가 있다. 그들이 믿고 붙들고 있는 성경의 가르침이 그들이 내는 기도를 어떻게 빚어야 하는지 잘 몰라서 그렇다. 가령 하나님은 절대적인 주권자이셔서 모든 것이 그분의 허락 없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지금 일어난 재앙에 관하여 무엇을 기도할 수 있을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죽음을 이기는 영원한 소망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희생된 이들을 위해서는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가? 또 그들을 잃은 남은 가족을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기도를 이 재앙 앞에 어떻게 드릴 수 있을까?
예수님께서 재앙 앞에 어떤 마음을 품고 어떤 위로와 소망을 말씀하셨는지, 또 어떻게 기도하셨는지 살펴보고 그리스도인이 재앙 앞에 어떤 기도를 드려야 할지 바른길을 찾기 원한다.
1. 우는 자를 불쌍히 여기는 기도를 드리라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께 주권이 있어 모든 것이 그분의 뜻대로 이루어진다는 걸 알고 계셨지만, 죽은 독자를 묻으러 가던 과부를 만났을 때 그녀를 불쌍히 여기셨다. 당시 사회에서 특히 유대인 문화 가운데 금기되었던 관에 손을 대면서까지 그녀의 슬픔에 공감하기 원하셨다. 또 예수님은 사랑하는 오빠를 잃은 마리아와 마르다 자매의 슬픔을 헤아리셨다. ‘불쌍히 여기다’를 뜻하는 헬라어 단어는 우리가 실제로 누군가의 슬픔을 헤아릴 때 우리 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잘 묘사한다: ‘요동치다’, ‘마음이 애타다.’ 슬픈 소식을 들으면 우리 마음은 요동친다. 그리고 감각기관(예수님의 때엔 창자, 내장)이 자극을 받는 것 같은(찌르고, 쑤시는) 고통을 겪는다.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눅 7:13-14)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요 11:33)
성경은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말한다(롬 12:15). 그래서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 우는 자들과 함께 울기 위해 기도한다. 하나님께서 왜 이런 일들을 허락하시는지 정확한 이유와 목적을 알지 못하지만, 예수님처럼 그들의 슬픔과 아픔을 깊이 헤아리며 요동치고 애타는 마음으로 “모든 위로의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로해 주시기를 간절히 구한다.
그런데, 여기서 그리스도인이 헤아리는 슬픔의 깊이는 다른 사람보다 더 깊다. 육신의 슬픔을 넘어 영적인 차원까지 미친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슬퍼하며 우는 자들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을 뿐만 아니라 심령에 비통히 여기셨다. ‘비통히 여기다’에 내포된 의미는 분노와 책망이다. 어떤 분노와 책망의 마음이 예수님께 있었던 것일까? 그것은 죄인의 심각한 상태와 운명에 관하여 깊이 애통히 여기는 마음이다. 사람은 죽음 앞에서 한없이 무력하다. 그러면서도 그 죽음을 이기시고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을 끝내 거부한다. 죄인의 불신과 무지는 이토록 강력하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이 눈앞에 있어도 그분을 보지 못하고 믿지 않는 지독한 반항심과 불신이 죄인의 DNA에 새겨져 있다. 바로 이 죄의 본질이 사람에게 죽음과 진노를 가져왔다.
히브리서 기자는 죽음 앞에 무력한 사람들을 가리켜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이라고 했다(히 2:15). 하나님은 죽음을 창조하지 않으셨다. 죽음은 마귀의 유혹에 넘어간 사람의 죄가 가져온 결과다. 죄는 곧바로 영적 죽음을(하나님과의 관계 단절) 그리고 그 결과 언젠가 반드시 임할 육신의 죽음을 가져왔다(창 3장).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떠난 대가로 모든 사람은 영적으로 죽어 죄와 허물 가운데 살다가, 언젠가 육신의 죽음을 통해 영원한 진노의 장소인 불못에 이르고, 그곳에서 심판받으며 슬피 울게 될 것이다(마 24:51).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함께 울어야 할 이유는 단순히 육신의 슬픔만이 아니다. 그들에게 임할 영적 슬픔 때문에 더 크게 안타까워하며 함께 운다. 영원히 울게 된 이들을 위해 함께 우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우리의 기도는 이미 영원한 운명을 맞이한 자들의 운명을 바꿀 수는 없다. 하지만 음부에 빠진 부자가 남겨진 형제들을 위해 간구했던 것을 우리는 기도로 구할 수 있다. 남겨진 자에게 영원한 위로가 되는 유의미한 기도를 드릴 수 있다(눅 16:19-31).
황망한 죽음은 분노를 일으키고 또 원망의 대상을 찾게 한다. 우리는 간절히 기도한다. 그 분노와 원망이 엉뚱하게도 하나님을 향하지 않기를. 그래서 더 완고하고 딱딱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게 되기를. 죽음을 가져온 원수인 마귀를 향하여 올바른 분노가 일어나고, 죽음의 참된 원인인 죄 문제의 심각성을 직시하게 되기를. 그래서 그 죄에서 해방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선한 갈망이 일어나기를 간구한다. 먼저 떠난 사랑하는 이들이 간절히 바라고 구하는 바대로, 남겨진 이들만큼은 죄의 삯인 사망을 결국 맛보기 전에, 영원히 울게 될 불못에 이르기 전에, 부활과 생명이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음으로 영접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2. 우는 자를 마침내 즐거워하게 하는 부활 소망을 위해 기도하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기 위해서이다(히 2:14-15). 최초의 사람이 하나님께 반역의 깃발을 들었을 때, 하나님은 그를 즉각 처형하지 않으셨다. 수백 년을 살면서 계속해서 자손을 낳게 하셨다. 세상에 죄가 만연하여 도저히 못 봐줄 지경이 되었을 때도, 하나님은 전멸시키기보다는 노아와 가족들을 통해 계속 인류가 지속되게 하셨다. 죄의 결과로 수많은 재앙이 인류를 덮치고 많은 사상자를 냈지만, 하나님은 지금까지도 계속 인류를 보전하고 계신다. 왜 그러시는 것일까?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벧후 3:7-10)
여기 두 가지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이 나타난다. 하나님은 우리가 보고 딛고 있는 하늘과 땅을 심판하실 것이다. 뜨거운 불로 땅과 물질을 태우고 하늘을 떠나가게 하실 것이다. 그때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도 함께 멸망 받을 것이다. 지금은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보호하고 계신다. 여기서 또 하나의 주권적인 뜻을 발견한다: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멸망을 바라지 않으신다. 만일 그러셨다면 첫 사람의 죄를 그 자리에서 심판하셨을 것이고 지금 하늘과 땅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분은 자비를 원하신다. 모든 사람이 회개하여 하나님께 돌아와 심판을 면하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불사를 하늘과 땅을 오늘도 보호하고 계신 것이다. 심판을 면하는 하나님의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은 재앙 앞에 울고 있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마귀를 마침내 밟고 영원히 처단하실 분은 예수님이시다. 죽기를 무서워하는 이들 그래서 죽은 자를 앞에 두고 슬피 우는 자들에게 참된 소망을 주실 분, 그냥 슬픔을 견뎌낼 만한 위로가 아니라 슬픔을 기쁨으로 완전히 반전시킬 부활의 소망도 예수님이 주신다. 그분이 부활하신 것처럼 그를 믿는 자에게 생명을 주어 부활하게 하신다. 안개같이 짧은 인생, 험악한 삶을 살수도 있지만 부활 소망은 완벽한 반전을 가져온다.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이는 잠잠하지 아니하고 내 영광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심이니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영원히 감사하리이다”(시 30:11-12).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위해 기도할 수 있는가? 우리는 함께 우는 기도를 넘어 함께 즐거워할 소망을 위해 기도할 수 있다. 그들이 흘린 모든 눈물을 주님께서 닦아 주실 것이다. 그들이 겪은 모든 고생과 슬픔을 주님께서 보상해주실 것이다. 그들이 해 아래 삶에 매여 해 위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한다면, 아무리 화려한 인생을 살아도 헛되고 헛될 뿐이란 것을 알게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아무리 초라한 인생을 살아도 해 같이 빛나는 영광스러운 삶으로 반전될 것을 알게 되기를. 부활 소망을 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하나뿐인 아들을 잃어버리는 슬픔을 자발적으로 당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그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진심을 알게 되기를 간구한다.
이러한 기도는 ‘먼저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기도’가 된다. 하나님 나라는 모든 죄의 세력을 멸하고 이 땅에 도래할 것이고, 하나님의 의는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자의 심판과 그분을 믿는 자의 구원을 통해 온전히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는 재앙 앞에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구하면서 동시에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회개하여 영생에 이르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의를 구한다. 또한 이 땅에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로서 하나님이 죄인을 불쌍히 바라보시고 비통히 여기시는 마음으로 함께 우는 기도를 드리고,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 의를 ‘이미’ 받은 자로서 부활 소망에 관하여 묻는 자에게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는 마음으로 마침내 그들과 함께 즐거워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크다(약 5:16). 하나님은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신다(눅 18:7). 그러므로 재앙 앞에 이렇게 하나님께 기도하자. 참된 위로를 위해 그리고 참된 소망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