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엡 5:18)
“술 취하지 말라”는 명령을 보는 순간, 어떤 그리스도인은 ‘나는 술을 입에 한 방울도 대지 않으니, 이 명령만큼은 완벽하게 지키고 있지. 하지만, 내가 아는 어떤 그리스도인은 이 말씀을 좀 귀 기울여 들을 필요가 있어 보여’라는 판단을 할 테고, 또 어떤 그리스도인은 ‘나는 술을 가끔 마시긴 하지만, 취할 정도로는 마시지는 않고 있어. 그러니 나는 이 명령을 거역하고 있다고 볼 순 없어. 예수님도 포도주를 종종 드셨으니까’라는 변명을 할 것이다.
그런데, 이 명령은 단일 명령이 아니다. 영어 구문에 not A but B가 있는 것처럼(‘A가 아니라 B’), “오직”이란 단어는(헬라어: ‘알라’, ‘but’) 본문에서 두 개의 명령이 한 쌍으로 주어졌다는 사실을 명백히 알려준다. 본문을 둘러싼 문맥에서(15, 17절) 이런 복합 명령의 패턴을 발견한다: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라”,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요컨대 “술 취하지 말라”는 명령은 ‘어느 정도까지 마시는 것이 취하는 것일까’의 방향이 아니라 뒤따르는 명령인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를 성취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술 취하는 것은 믿지 않는 자의 방탕을 따르는 것이다
‘취하지 않는 정도’까지 술을 마시고자 하는 이들은 이 명령이 술 자체가 아니라 방탕함을 경고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돈 자체는 악하지 않아도, 돈을 사랑하는 것은 일만 악의 뿌리가 되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게 만드는 것처럼(딤전 6:10), 술 자체는 악하지 않아도, 술을 사랑하는 것은 사람을 방탕하게 하고 믿음에서 떠나게 만든다. 본문에 사용된 ‘술 취하다’의 뜻을 가진 헬라어 ‘메뚜스코’는 신약성경에 다섯 번 사용 됐는데, 본문을 포함하여 네 번 모두 하나님의 심판을 멸시하며 자기 원대로 살아가는 이들의 삶을 묘사할 때 사용됐다:
- 주인의 소유를 맡은 악한 종이 주인이 더디 올 것이라 생각하며 남녀 종들을 때리고 먹고 마시고 취하는 장면을 묘사(눅 12:45)
- 방탕한 삶을 조장하는 술 취함을 멀리하고 대신 성령 충만을 받으라는 명령(엡 5:18)
- 빛의 아들인 그리스도인이 어둠에 속한 자처럼 자고 취하지 말고 깨어 정신을 차릴 것을 요구(살전 5:7)
- 종말의 심판을 받을 땅의 임금들이 음행의 죄에 깊이 빠져있는 것을 가리킬 때, 음행의 포도주에 취한 것이라고 말함(계 17:2)
심지어 성경은 술 취하는 것을 믿음이 없는 자의 전형적인 특징으로 보고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불의한 자”의 목록에 “술 취하는 자”와 그 행위인 “술 취함”을 포함한다(고전 6:9-11, 갈 5:21). 이 얼마나 무서운 경고인가! 구약시대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진 나실인의 경우 금주가 요구됐고(민 6:3, 삿 13:7), 신약시대 하나님의 일꾼으로 성도의 본이 되어야 할 장로와 집사 모두에게 “술을 즐기지 아니”할 것(딤전 3:3), “술에 인박히지 아니”할 것”(딤전 3:8)이 요구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오늘날 모든 그리스도인은 구약의 나실인처럼 하나님께 자기 몸을 구별하여 드린 자가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그 몸을 사셨기 때문에 “하나님께 드리라”는 요구 아래 있다(롬 6:13).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당신이 참 그리스도인이라면 추구해야 할 삶의 방향은 분명하다. ‘어떻게 하면 취하지 않을 정도로 술을 마실 수 있을까’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주를 위하여 술을 즐기지 않을 수 있을까’ 다시 말해, ‘어떻게 하면 주를 위하여 술을 절제할 수 있을까’이다.
물론 술 취함만 방탕을 조장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술은 많은 불의를 일으키는 강력한 촉매제가 된다. 술을 시작으로 음행을 하고, 술로 인해 간음을 한다. 모욕, 탐욕, 분냄, 비방, 다툼 등은 술이 정신을 통제할 때 훨씬 더 쉽고 강력하게 일어난다. 방탕한 삶으로 인도하는 술의 문제를 상대적으로 덜 겪고 있다고 해서 술 문제가 가벼워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본문이 연결 짓는 두 번째 명령,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는 것’이 ‘술 취함’과 긴장 관계를 이루고 있는 게 가장 큰 문제다. 요컨대 당신은 술을 즐기면서 성령 충만한 삶을 살 수 없다. 돈을 사랑하면서 하나님을 동시에 사랑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눅 16:13), 당신은 하나님과 술을 겸하여 사랑할 수 없다.
술 취하는 것은 지혜 없고 어리석은 자의 삶을 본받는 것이다
앞선 명령과 대칭 구조를 이루는 본문의 명령을 깊이 생각해 보면, “술 취하지 말라”는 명령은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라(15절),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라와 연결되고(17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는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라(15절),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와(17절) 연결된다는 걸 알 수 있다. 종합하면, 술 취하는 문제는 지혜 없고 어리석은 자와 같은 삶을 조장하고, 성령 충만한 삶은 지혜 있는 자가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할 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술 취함’과 관련된 신약성경의 문맥은 소유를 맡긴 주인의 귀환(눅 12:45), 그 날이 도둑 같이 임할 것에 대한 경고(살전 5:1-7), 죄에 취해 사는 자들에게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계 17:2)이다. 모두 “때”와 관련되어 있고 에베소서 5장 16절을 보면 본문의 문맥도 크게 다르지 않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엡 5:16).
“지혜 없는 자”는 단순히 무지하고 이해가 느린 자가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때의 악함을 모르는 자다. 주께서 곧 오셔서 행한 대로 심판하신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세월을(다른 말로 ‘기회’) 낭비하는 자다. 그는 “어리석은 자”다(17절). 부정적인 명령을 어기는 측면에서 자기 육체가 원하는 것을 방탕하게 행하기 때문이고(대표적으로 술 취함), 긍정적인 명령을 멸시하는 측면에서 주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이해하고 순종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은 자의 삶을 어떻게 묘사하는가?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 5:19-21)
당신은 성령이 주시는 강력한 소원과 능력으로 위와 같은 삶의 방향으로 힘 있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방탕함 쪽을 향하여 나아가는 삶을 동시에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럴 수 없다. 방향 자체가 다르다. 방탕한 삶에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가 서로를 향해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 나온다(갈 5:20-21). 피차 복종하는 데 분명 방해가 되는 육체의 일이다. 결과적으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데 실패한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의 열매를 맺는다. 그리고 “절제”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산다. 그래서 ‘절제 없는 술’과 ‘성령 충만의 삶’은 함께 갈 수 없다.
결론
“술이 원수”라는 말이 있다. 성경적으로 말하면 하나님보다 높아진 모든 생각, 예수님보다 귀하게 여기는 모든 대상이 원수다. 당신은 술을 입에 조금도 대고 있지 않지만, 다른 우상이 원수가 되어 성령 충만을 방해하고 있을지 모른다(그러니 교만을 버리라). 당신은 술을 잘 통제하고 있다고 믿지만, 사실 방탕함에 조금씩 삶을 내어주면서 성령 충만의 삶과 점점 더 거리가 멀어지고 있을 수 있다(그러니 방종하지 말라). 술을 입에 대는 것 자체를 범죄로 여겨 함부로 누군가를 정죄하는 것은 어리석다. 하지만 분명히 술은 ‘절제’할 대상이고 그 목적 혹은 방향성은 술이 아니라 성령께서 나를 통제하고 나를 통해 역사하도록 내 몸을 산 제물로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다. 무엇을 마시든지 마시지 않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 땅에 계실 때 포도주를 종종 드셨던 예수님은 마지막 만찬을 제자들과 나누시면서 매우 흥미로운 말씀을 하셨다.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마 26:29). 주님께서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는 그날에 우리와 함께 마실 때까지 기다리고 사모하며 금주하신다면, 먼저 하나님의 이름과 나라와 뜻을 이루는 것을 구하기 위하여 나도 술을 절제하고(또한 모든 방탕함을 멀리하고)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은 삶을 힘 있게 살아가는 것이 마땅하고 아름답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필자는 술을 좋아하지 않고 마시지도 않지만, 주님과 함께 마시게 될 그 첫 잔을 사모하며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