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지인에게 <페이버>의 저자 하형록 회장의 간증과 신앙이 적힌 제법 긴 글을 메신저로 전달받았다. 그는 2015년 <P31 성경대로 비즈니스하기>라는 책에 이어(두란노, 2015), 2017년 <페이버: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이란 책을 저술했다(청림출판사). 이 책에서 저자는 심장 이식 수술을 간절히 기다리다가 마침내 딱 맞는 심장을 찾았는데, 그 심장을 옆에 있는 환자를 위해 양보하는 놀라운 간증을 말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선한 일을 어떻게 새로운 심장과 사업의 확장으로 보상하셨는지 이야기한다. 세계적인 건축설계 회사 팀하스의 회장이 된 하형록은 자신이 경험한 “주님의 특별하고도 비밀스러운 축복의 기적”이 우리의 것이 될 수 있다고 이 책을 통해 약속한다. 필자는 하형록 회장의 놀라운 간증과 신앙인으로서 본이 되는 회사 경영을 높이 평가한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페이버’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페이버(favor)”가 뭘까? 지인이 보낸 글엔 이런 설명이 있었다.
기독교에서는 페이버를 ‘은혜, ‘자비’ 등과 혼용해서 써요. 그런데 은혜(grace)는 우리가 받을 수 없는 은총을 받는 것이고, 자비(mercy)는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을 받지 않는 것이에요. 페이버는 달라요. 우리 말의 ‘정’이나 ‘호의’와 비슷한데, 정확히는 자신을 희생해서 이웃을 돕는 거에요…
<구약성경>의 <시편>에 보면 페이버에 관한 구절이 자주 등장합니다. 핵심은 예전에 내가 한 희생을 낱낱이 아뢰고 내 희생이 주님 보시기에 좋았으면, 이제는 나를 불쌍히 여겨 나에게도 당신의 ‘페이버’를 보여 달라고 요청하는 거죠. 그런데 예기서 예수의 공식이 있어요. 희생이 있어야 부활이 있는 것처럼, 반드시 나의 마음, 노력, 시간, 돈 등의 분명한 희생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실제로 구약 성경엔 이런 개념이 종종 나온다. 여호와 하나님은 언약을 맺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되셨고, 그들에게 율법을 주시면서 자기 백성이 되어 따를 것을 요구하셨다. 예수님께서 요약하신 것처럼 모든 율법은 첫째,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하는 것, 둘째,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에는 하형록 회장이 말한 것처럼 ‘희생’이 따른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 이웃을 희생적으로 사랑할 때(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페이버’ 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복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신 28:1-19). 단지 영적인 복이 아니라 물질적인 복 가령 몸의 소생, 가축의 새끼, 토지의 소산 등도 주신다고 하셨다.
신약 성경에도 예수님의 유사한 가르침이 나온다. 큰 부자이면서도 하나님께 가난했던 부자가 물질을 가난한 자에게 희생적으로 주지 못해서 예수님이 주시는 하나님 나라를 거절하고 근심하며 돌아갔을 때, 베드로는 자기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따른 자신이 받을 복이 무엇이냐고 물었다(눅 18:28).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눅 18:29-30).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주를 위한 희생(페이버)에 주님이 ‘페이버’로 갚아주신다는 것이다. 내세뿐만 아니라 현세에서도.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자녀 된 우리에게 이렇게 설명한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2). “모든 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능력, 부, 지혜, 힘, 존귀, 영광, 찬송을 포함할 것이다(계 5:12).
요컨대 하형록 회장이 말한 ‘페이버’의 개념은 성경의 가르침 가운데 발견된다. 하지만 저자가 말한 ‘은혜’와 ‘자비’의 개념과 ‘페이버’를 분리하는 것은 심각한 오류다. 왜 그런지 생각해보자.
페이버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에 기초한다. 흥미롭게도 영어 성경(ESV)에서 페이버(favor)로 번역된 단어는 개역 개정에 ‘은혜’, ‘은총’, ‘사랑’, ‘호의’ 등으로 번역됐다. 은혜와 페이버의 구분을 잘 못해서 그런 게 아니다. 페이버가 하나님 은혜와 자비 안에서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구속사의 네 가지 흐름을 통해 살펴보자.
(1) 창조: 우리는 피조물로서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지음받았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존재한다. 우리의 지혜, 선한 욕구(소원), 무엇이든 행할 능력 등은 모두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이웃을 희생적으로 사랑한다면, 하나님은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나타내실 것이다. 이는 페이버의 교환처럼 보이지만, 사실 은혜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예배를 받으실 권리가 있으시다. 그리고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인 우리는 지극히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면서도 하나님이 은혜로 주시는 ‘페이버’를 받는다.
(2) 타락: 우리는 피조물이면서 감히 창조주를 배반했다. 하나님의 영광을 피조물과 썩어질 것으로 대체했다.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고 전적으로 타락하여 그 어떤 ‘선한 일’도 할 수 없는 자가 됐다. 그 어떤 ‘선한 일’도 하고 싶어 하지 않는 자가 됐다. 다시 말해 우리는 하나님을 위한 그 어떤 ‘페이버’도 원하거나 행하고 싶어 하지 않는 상태가 됐고, 하나님은 그런 우리에게 그 어떤 ‘페이버’도 주실 의무가 없으셨다.
(3) 구원: 우리는 받을 자격이 없는 자였고, 하나님은 그런 우리에게 ‘호의’(favor)를 베푸셨다. 그것이 곧 은혜의 구원이다. 영원한 심판 아래 놓인 우리 인생을 불쌍히 보신 하나님의 긍휼 곧 자비가 구원의 시작이다(“그러나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엡 2:4). 하나님은 우리가 받을 형벌을 아들 예수님이 받게 하셨고(자비), 우리가 믿음으로 예수님과 연합할 때 그분께 속한 모든 것을(페이버) 우리에게 은혜로 주셨다. 이 놀라운 자비와 은혜로 인해 우리가 받은 구원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크고 놀라운 ‘페이버’다.
구원받은 우리가 하나님과 이웃을 희생적으로 사랑하고 싶은 새 마음을 가진 것도 은혜고, 그렇게 살 수 있는 능력을 주신 것도 은혜다. 우리가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무언가 희생한다면, 그것은 받은 은혜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이지, ‘페이버’를 돌려받기 위한 선행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선을 갚아주신다고 약속하셨다. 이 또한 하나님의 은헤며, 결국 하나님께 모든 영광과 찬송과 감사가 돌려진다.
(4) 완성: 구원의 완성은 하나님의 원수인 마귀와 타락한 천사들, 그들을 쫓던 불순종의 아들들의 영원한 심판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영원한 화목을 이룬 성도들의 영원한 예배다. 죄는 완전히 제거되고 온전한 선만 남는다. 천국은 예배 그리고 섬김의 연속이다. 은혜를 입은 성도가 지극히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를 영원히 높이고 그 은헤에 보답하기 위해 하나님을 자발적으로 또한 기쁨으로 섬기는 예배가 영원히 계속된다. 요컨대 영원히 하나님께 드리는 우리의 ‘페이버’는 그 자체가 은혜의 결과물이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와 자비로 베푸신 ‘페이버’의 마땅한 반응이란 것이다.
이처럼 페이버는 은혜와 자비 없이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은혜와 자비 없는 페이버는 하나님과의 ‘거래’에 불과하다. 내가 행한 페이버에 관하여 나는 하나님의 페이버를 요구할 권리가 있고, 하나님은 좋으신 아버지라면 반드시 우리에게 ‘페이버’를 주셔야 한다(말로만 그분께 달려있다고 하지, 결국 그분이 주신다고 확신한다). 혹시 하나님께서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도 나의 페이버를 눈에 보이는 무언가로 갚아주지 않으신다면, 하나님은 은혜롭거나 자비로운 분이 아니다. 삶에서 내가 희생한 것의 배로 보상하시는 하나님을 입증하는 것만이 그분이 참으로 은혜롭고 자비롭다는 것을 보여주는 유일한 길이다.
이것이 하형록 회장이 말한 페이버가 가진 치명적인 문제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호의(favor)가 하나님의 크고 풍성한 은혜와 긍휼(자비)에 단단히 뿌리박혀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넘치도록 풍성한 하나님 은혜에 압도되어 그분께 우리 ‘페이버’를 아무런 대가성 없이 바치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극히 풍성한 은혜에 따라 우리에게 호의(페이버)를 베푸실 것을 믿는다. 하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다. 무엇으로 어떻게 베푸시든지 하나님은 가장 좋은 것을 주신다. 하나님은 지금 당장 혹은 많은 세월이 지나도록 삶 속에서 눈에 보이는 페이버로 우리에게 갚지 않으신다 해도 여전히 은혜와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이시다(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세어보라). 우리에게 필요한 그리고 간절히 기도하며 구하는 건,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하는 ‘믿음’, 하늘에 쌓은 영원한 하나님의 ‘페이버’를 바라보는 눈이 아니던가? 많은 초대교회 성도와 종교개혁자, 선교사와 신실한 믿음의 선배들의 험악한 인생을 반짝반짝 빛나게 한 것은 그들이 돌려받을 보이는 ‘페이버’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는 ‘믿음’이 아니던가?
찾아보니 지인이 공유한 글은 김지수 인터뷰집 <자기 인생의 철학자들>에서 발췌한 내용이었다(어떤책, 2018). 필자가 하형록 회장의 페이버를 오해한 것이고 극단적으로 비판한 거라고 생각한다면, 인터뷰 후 그녀가 남긴 이 소감을 들어보라.
자본주의 사회의 소시민인 나는, 대가 없이 치르는 희생은 ‘바보짓’이라고 배웠다. 실제로 손해보다 더 두려운 건, 셈 빠르고 영악한 사람들의 ‘호구’가 되는 것이었다. 다행히 목사이자 기업가인 하형록은 페이버는 반드시 더 큰 돈과 기회, 심지어 생명값으로 보상한다는 것을 삶으로 정확히 증거했다. 은혜와 자비가 너무 멀리 있다고 느끼는 당신, 가까운 이웃에게 ‘복리의 마법’으로 돌아오는 페이버를 실험해 보는 건 어떨까?
‘복리의 마법’으로 돌아오는 페이버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실험하는 인생, 이것이 정확히 하형록 회장이 말하는 ‘페이버’ 라이프다. 이미 솔로몬이 실험해 봤고, 수많은 ‘페이버’를 복리가 아니라 뻥튀기로 받았지만, 우리 모두가 아는 것처럼 그 인생은 해 위의 하나님 은혜에서 멀어진 ‘헛되고 헛된’ 인생이었다. 자비가 필요한 우리에겐 하나님의 은혜의 강에서 흘러나오는 페이버가 필요하다!
순종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마음으로”(롬 6:17)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 그러니까 그분을 사랑하고 흠모하고 즐기는 것, 불이 산소를 연료로 타오르는 것처럼 그분으로 인해 사는 것 자체가 목적이다. 이것 자체가 보상이다. 더 깊은 순종으로 들어갈수록 하나님과 더 깊이 교제하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이라는 연료로 움직이게 되어 있기 때문에 그분과의 깊은 교제는 우리에게 가장 깊고도 순전한 기쁨을 준다 – 데인 오틀런드 <우리가 몰랐던 예수> (두란노, 2022), 51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