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은 서로 많은 것을 나누고 교제하며 덕을 끼치고 유익을 줄 수 있는데(빌 2:1), 유독 정치 이야기는 유익보다는 도리어 상처를 입히거나 분노를 일으키는 경우가 허다하다. 오죽하면 ‘교회에서 정치 이야기를 하지 말라’는 말을 한다. SNS에서 기독교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노골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정치 이야기를 하면 잘 들어보고 건전한 토론을 하기보다는 일단 싫고 심지어 차단하고 싶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왜 그럴까? 왜 정치 이야기는 듣기 싫은 것일까?

”정치”라는 주제 자체의 문제일까?
성경은 이 땅에 세워진 권세에 관하여 그리스도인이 무관심하거나 무시하며 살라고 권면하지 않는다. “위에 있는 권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모든 권세에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두려워함으로 복종해야 한다(롬 13:1-3). 조세를 바치는 등 시민으로서 마땅한 의무를 다할 뿐 아니라 정부가 권장하는 선을 행하고 하나님의 사역자인 그들을 존경하며(롬 13:4-7),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기 위해 그들을 위해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해야 한다(딤전 2:1-2).

그러므로 성경이 권장하는 방식대로 정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서로에게 자극이 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가령 ‘하나님이 세우신 권세를 위해 함께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자로서 정부가 선을 권장하고 악을 징벌하는 기능을 잘 수행하도록 간구합시다. 그들이 하나님의 뜻에 거스르는 일을 행하지 않도록 기도합시다’라는 표현은 듣기 싫지 않다. 하나님 세우신 권세를 인정하는 것, 그들의 순기능에 감사하는 것, 하나님의 사역자로서 제 역할을 하도록 기도하는 것, 우리의 마땅한 의무를 강조하며 결단하는 것 등은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는 이 땅의 권세, 하나님 정하신 질서를 제대로 인정하는 올바른 태도이다. 이런 태도가 충분히 담겨 있는 정치 이야기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정치적 판단의 문제일까?
정치적 판단이 들어간 이야기는 어떤가? 정부의 새로운 부동산 대책, 세금 정책, 낙태나 동성애 관련 방침 등에 옳고 그름,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나누는 것도 문제가 될까? 가령, ‘이번에 나온 새 부동산 법 때문에 집을 마련하기 더 힘들어졌어요. 어려운 사람이 집을 잘 구할 수 있도록 해주면 좋겠는데’ ‘동성애 관련 정책이 갈수록 성경과 멀어지고 있습니다. 자녀를 양육하는 부모에게 더 큰 도전입니다. 많은 기도와 실질적인 노력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등의 이야기가 너무 불편하고 자극적인가?

그렇지 않다. 이 땅에 함께 살아가는 성도가 같은 권세 아래 영향을 받으면서 서로가 느끼고 겪는 문제를 나누는 것, 그리고 그 교제를 통해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며 때로는 불필요한 오해를 바로잡고 바른 관점을 갖도록 서로 돕는 것은 유익하고도 필요한 일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정치적 판단 기준이 하나님 말씀에 근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같은 본향인 하나님 나라에 속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이라는 더 높은 차원의 목표를 바라보며 살고 있다는 것에 동의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도 정치적 판단이 들어간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하지만 그 정치적 판단의 밑바닥에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고 계시고 지금 세워진 권세를 통해 그분의 뜻을 이루고 계시며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이란 믿음과 확신이 깔려 있어야 한다.

정치 이야기에 죄가 섞여 있다면?
정치 이야기에 죄가 섞여 있을 수 있는가? 그렇다. 사도 베드로는 주의 인자하심을 맛본 그리스도인에게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라고 강력하게 촉구했다(벧전 2:1). 흥미롭게도 그리스도인 중에는 유독 정치 이야기를 꺼낼 때 성령이 금한 죄를 아주 쉽게 범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거친 언어와 욕설을 섞어 정치적 판단과 정죄를 하는 경우(악독), 하나님 세우신 권세 곧 하나님의 사역자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존중과 존경도 담겨 있지 않은 표현(시기), 진실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판단하기보다 이런저런 ‘카더라’ 통신을 굳게 믿고 함부로 비난하는 것(기만), 판단의 잣대에 자신은 절대 해당 사항이 없는 것처럼 자기 의를 내세우며 하는 말들(외식), 권세에 감사하고 간구하지 않으면서 일방적으로 비방을 쏟아내는 것(비방하는 말).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쏟아내는 정치 이야기에서 이와 같은 죄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 닮아야 하는 대상인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입에 “거짓”이 없으셨다(벧전 2:22). 항상 진실을 말씀하셨을뿐만 아니라 입술로 죄를 범하지 않으셨다는 말이다. 성경은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고 명령한다(엡 4:29).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 그분의 입에서는 한 마디의 더러운 말도 나오지 않았고 오직 덕을 세우는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진리와 은혜를 충만하게 베푸셨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도 원망과 비난의 말을 쏟아내지 않으셨다. 그분은 오히려 용서의 말을 내셨다. 예수님은 타락하고 부패한 종교지도자나 로마 기득권을 가리켜 책망과 판단의 말씀을 하실 때도 비아냥거리거나 우쭐대거나 빈정대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들은 고개를 흔들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십자가에서 너를 건져내지 않으시겠느냐? 어디 한번 내려와 봐라. 그럼 우리가 믿어주지’라는 식으로 비꼬는 말을 쏟아냈다. 하지만 예수님은 강력하게 그들을 꾸짖으실 때도 언제나 진리를 가지고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자하신 뜻에 따라 말씀하셨다.

갈수록 정치 이야기에 심취하고 정치 이야기를 많이 하는 그리스도인이 늘어가고 있지만, 정말 예수님의 입술을 닮아 원망과 비난 없이, 비아냥거리거나 우쭐대거나 빈정대지 않고, 오직 진리로 듣는 이에게 덕을 끼치고 이야기의 대상에게도 구원의 은혜가 임하기를 바라며 하나님 뜻대로 말하는 그리스도인을 찾기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겸손과 온유, 은혜와 진리를 옷 입은 정치 이야기를 언제쯤 들어볼 수 있을까?

내가 아니라 정치 이야기에만 관심 있는 사람이 하는 말은 듣기 싫다
대화가 추구하는 목표는 상대방의 유익이다. 우리는 생각을 나누기 위해 또는 감정을 공유하기 위해, 때로는 의지를 함께 불태우기 위해 대화를 나눈다. 하지만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이타적인 사랑의 언어로 대화한다. 단지 자기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해서, 내가 느낀 감정을 공감해달라고, 내가 강력한 의지를 표명한 것에 지지해달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기적인 대화가 아니라 이타적인 대화는 자신이 아니라 상대방의 유익을 대화의 목적으로 삼는다. 안타깝게도 정치 이야기를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에게서 이타적인 대화법을 기대하기 힘들다.

물론 상대방이 이것을 꼭 알고 제대로 대응하길 바라는 마음은 진심일 것이다. 하지만 듣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이 분명해도 일방적으로 쏟아내고, 조금이라도 다른 관점이나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막무가내로 자기주장을 밀어붙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자매가 된 이들의 안녕이나 유익은 평소에 거의 묻지 않으면서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을 추구하는 것에는 핏대를 올리며 말한다면 누가 그 사람의 말이 나의 유익을 위한 사랑의 언어라고 생각하겠는가?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공적인 자리에서 정치적 견해를 성경을 근거로 변호할 때도 마찬가지이고, 사적인 자리에서 정치 이야기를 나눌 때는 더더욱 주의가 필요하다.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는 것은 이웃 사랑의 구체적 실천이다. 진리와 사랑은 함께 기뻐한다.

아무리 좋은 말, 옳은 말도 때와 장소에 따라 듣기 싫은 말이 된다
성경은 “때에 맞는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고”라고 말했다(잠 15:23). 반대로 때에 맞지 않는 말은 결코 아름답지 않다. 만일 교회에서 정치와 관련된 주제를 가지고 함께 토론하는 자리가 마련되었다면, 그때 정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갑자기 꺼내는 이야기보다 훨씬 자연스럽고 듣기 편할 것이다. 만일 어떤 성도가 정치적 견해나 입장에 관하여 묻는다면 그에 대한 답변을 하는 것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다. 상대방이 들을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일 사회자가 정치 이야기를 꺼내며 자기의 입장을 표명하거나 정치적 판단을 가지고 청중을 설득하려 했다고 해보자. 왜 이것이 불편할까? 청중이 그것에 반응하거나 건전한 토론을 할 여지를 주지 않고 일방적으로 자기 생각을 공표했기 때문이다. 공적인 공간, 서로 활발한 토론이 기대되고 요구되는 공간이 아닌 곳에서 이런 식의 선포는 대다수 듣는 이들에게 뭔가 말하고 싶은데 말할 수 없는 불편한 상황을 가져다주고, 특히 입장이 다를 수 있는 이야기이거나 진실 여부를 따져야 하는 경우 끝도 없이 오갈 공방에 질식하게 만든다. 합당한 때, 합당한 장소가 아닌 곳에서 말한 것이 큰 문제가 되는 것이다.

꼭 필요한 경우 설교에 정치적 상황이 언급되거나 마땅한 그리스도인의 자세가 설명될 필요도 있지만, 거의 대부분의 경우 말씀의 권위를 빌어 개인적인 견해를 설파하는 것에 그치게 된다. 정치 이야기가 덜 중요하거나 청중의 관심 밖 이야기라서가 아니라 설교 시간엔 정치 이야기가 때와 장소에 맞지 않은 이야기가 될 가능성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

그러면 정치 이야기는 금기해야 하는가?
아니다. 정치 이야기는 필요하다. 하나님의 사역자가 하나님 뜻대로 일하고 있는지, 선을 장려하고 악을 벌하기 위해 칼을 휘두르고 있는지 하나님의 백성이 누구보다 잘 알고 판단할 수 있지 않겠는가? 때로 하나님의 백성 중에서는 명백히 하나님 뜻에 위배된 것을 이 땅의 권세가 조장하고 추구해도 침묵하거나 심지어 지지하는 사람도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양심을 깨우고 세상이 아닌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여 옳은 것은 옳다, 틀린 것은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는 분별력과 용기를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바울이 골로새 성도들에게 말한 것처럼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고 권면하려면 우리 속에 그리스도의 말씀 그 명확한 진리가 풍성히 거해야 한다(골 3:16). 그리스도인의 정치 이야기는 확실한 목표 곧 듣는 이의 유익과 선을 위한 것이어야 하고, 절대로 그 속에 조금의 거짓 혹은 더러운 말이라도 섞여서는 안 된다. 항상 때에 맞고 상황에 맞는 말이어야 한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일에 부합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서로의 말을 잘 들어줄 수 있는 사랑의 인내도 필요하다.

결론

우리는 적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를 나눈 형제자매로 정치 이야기를 나눈다. 우리는 곧 사라질 이 땅의 백성이지만 궁극적으로 영원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이 땅의 정치 이야기를 나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역자인 땅의 권세에 소망을 두지 않고 그 권세를 정하신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정치 이야기를 나눈다. 우리는 서로를 판단하고 정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하고 세워주고 덕을 끼치기 위해 정치 이야기를 나눈다. 우리는 온갖 거짓과 죄를 섞지 않고 사랑과 진리만을 가지고 정치 이야기를 나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하는 우선순위를 가지고 정치 이야기를 나눈다.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라는 명령에 따라 정치 이야기를 나눈다. 또한 우리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에 따라 정치 이야기를 나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그리스도가 분부한 모든 것을 지켜 행하도록 하기 위해 정치 이야기를 나눈다. 당신은 왜 정치 이야기를 나누는가? 어떻게 정치 이야기를 나누는가? 당신이 나누는 정치 이야기는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아끼는 이들에게 있어 듣기 좋은 이야기인가 아니면 듣기 싫은 이야기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