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고 변희수 전 육군 하사가 자택서 숨진 채 발견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목숨이 이 땅에서 끊어진 것은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들 그리고 지인들에게 큰 슬픔이고 비통한 일입니다. 이번 죽음이 더 큰 충격을 가져온 것은 그가 성전환하고 군대와 대학 그리고 사회에 자기 바람대로 정체성을 인정해주기를 간절히 요구하다가 결국 죽음을 선택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이 다음 생에는 있는 그대로의 그를 받아줄 수 있는 곳에서 태어나기를 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저는 직접적으로 고인에게 해를 가하거나 제가 믿는 바를 원하든 원치 않든 고인에게 쏟아낸 적은 없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성경이 하나님이 결정하신 생물학적 성 정체성을 자기 정체성으로 받아들일 것을 요구한다는 것 그래서 그것을 자기 마음대로 변경하거나 무시하고 같은 성별끼리 연애하는 것이 순리가 아니라 역리에 해당하는 죄라는 것을 확실히 믿기 때문에(롬 1장) 기독교의 진리가 개인의 행복을 억압하여 죽음까지 몰고 가는 데 한 몫 담당한다고 오해를 받을까 우려가 됩니다. 남들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 개인이 자기 행복을 최대한 추구하는 것을 기독교가 무슨 근거로 정죄하고 판단한단 말이냐는 비난을 기독교 안팎에서 이번 비극을 두고 충분히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 연구위원 김근주 교수는 동성애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설명하면서 ‘기독교의 도덕 기준을 사회에 요구하지 말자’라고 부르짖었습니다. 동성애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은 교회라는 종교 영역에서나 실천할 일이지 사회에 그것도 법률(차별금지법 등과 같은)에 적용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퀴어축제 등에 기독교의 이름으로 동성애를 인정하고 수용하려는 이들도 적잖이 발견됩니다. 하나님은 개인의 행복을 해치지 않는 사랑 많은 분이라고 외치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 특별히 기독교의 진리를 믿는(동성애에 관해 다른 관점을 가졌을지라도) 분들께 우리의 인생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씀드리기 원합니다.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 계시다는 진리는(창 1:1) 그분을 제외한 모든 만물이 그분의 손에 의해 창조되었고 결국 창조하신 분의 소유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말해줍니다. 예수님은 지은 것이 하나도 그분 없이 된 것이 없는 창조주 하나님이신데(요 1:3), 비유로 가르치실 때, 자기 자신만 생각하며 부를 쌓는 이에게 하나님께서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을 소개합니다(눅 12:20). 하나님은 빌려주신 인생을 언젠가 도로 찾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창조하신 이를 부인하고 그분의 소유인 인생을 자기 것이라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인생의 참 주인을 영화롭게 하지도 않고 마땅한 감사도 돌리지 않았을 때 하나님은 빌려 간 인생을 가지고 마음대로 살도록 내버려 두셨습니다(롬 1장). 그 결과 사람들은 인생을 자기를 기쁘게 하는 일, 자기 육체가 원하는 일로 가득 채웠습니다. 빌려온 인생이지만 마치 자기가 주인인 것처럼 자기 행복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 것처럼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정말 주인이 원하는 그리고 빌려 간 이에게 유익이 되는 일일까요?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당신이 소유한 가장 귀한 물건이 있는데 사랑하는 누군가에게 빌려주었습니다. 당신은 그 사람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빌려준 물건이 그에게 최대한 유익과 만족과 기쁨이 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만일 그 사람이 빌려 간 물건을 용도에 맞지 않게 사용하여 그 가치를 떨어뜨리고 망가뜨리면서 그 물건이 줄 수 있는 최고의 유익과 만족을 얻지 못하고 도리어 해를 입고 있다면 자기 소유의 물건을 함부로 대하고 훼손한 것에 분노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사랑하는 사람의 어리석은 행동에 얼마나 가슴이 아프겠습니까?
기독교가 말하는 인생에 관한 진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빌려주신 고귀한 인생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어떻게 사용해야 우리에게 가장 큰 기쁨과 만족과 유익을 가져다주는지 설명해주는 하나님의 인생 사용법입니다. 자기 행복을 추구하는 것, 남들에게 피해 주지 않는 선에서 자기 육체가 원하는 것을 하는 것 모두 빌려주신 분의 인생 사용법에 따라 조절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소유권을 가진 분에 대한 마땅한 도리이고 동시에 빌려온 인생을 사는 우리에게 가장 큰 유익이 되는 법입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것을 가리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 확증된 놀라운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많은 사람 심지어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하는 이들 가운데서도 그리스도의 헤아릴 수 없이 크고 넓은 이 사랑이 우리가 개인의 행복을 최대한 추구하는 근거가 된다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보라, 하나님의 사랑이 이처럼 크지 않은가?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행복을 위해 어떤 인생을 살든지 하나님은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신다.’ 이렇게 말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은 우리 스스로 결단코 바로잡을 수 없는 자기중심적이고 육신이 원하는 욕구대로 삶을 망치는 인생을 완전히 새롭게 변화시켜주는 획기적인 결과를 가져옵니다. 빌려온 인생을 망가뜨리는 사람에게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은 그 아들의 희생적인 사랑을 통해 그를 믿는 모든 자가 자기 영혼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분의 사용법대로 인생을 살도록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결코 하나님이 뭘 원하시든 상관하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빌려온 인생을 낭비하는 것을 지지하고 인정하기 위해 십자가에 오르신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삶에서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 사랑을 보이셨습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이들의 고백은 한결같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이제 우리 마음대로, 원하는 대로 살자’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7-8). 삶의 주인이 누구인지 확실히 알고 그렇게 사는 것이 옳다는 것을 분명히 믿는 자들의 모습 아닙니까?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이렇게 변화시키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기독교의 도덕 원리를 세상에 요구하지 말자는 그리스도인의 말에는 참으로 사랑이 없다고 생각합니다(의도가 어떻든 상관없이). 고귀한 인생을 낭비하거나 훼손하지 않고 참으로 가치 있게 사용할 수 있는 원리를 말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인생은 내 것’이라는 치명적인 거짓에 찬사를 보내며 개인이 무엇을 원하든지 육체가 원하는 대로 뭐든 하도록 지지하는 것이 어떻게 그 인생의 주인이 결산할 날이 있다는 걸 아는 자들이 할 수 있는 사랑의 표현이 되겠습니까? 창조주이신 그리스도께서 피조물을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여 은혜로 선물하신 구원은 도대체 무엇으로부터 구원이란 말입니까? 만일 우리가 계속해서 빌려온 인생을 자기 것으로 주장하면서 자기 뜻대로 살기를 고집해도 된다면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 사람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그 독생자 예수님을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고 그리하신 것입니다(요 3:16). 당신이 어떤 사람이든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든 현재 자기 행복을 위해 어떤 삶을 살든지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은 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내버려두는 사랑이 아니라 영생을 주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당신이 얻을 수 있는 영생은 바로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 17:3). 하나님도 모르고 예수님도 모른 채 자기 인생을 자기 것처럼 여기며 사는 사람은 주인이 그 인생을 찾을 때 멸망을 맛보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님을 통해 인생의 참 주인이신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과 함께 그 하나님의 뜻대로 빌려온 인생을 가치 있고 유익하게 사는 이들이 영생을 맛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보여주신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당신에게 나타난 바 되었습니다.
기독교인이 때로 진리를 말하면서 사랑으로 말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로 인해 사랑 가득한 진리가 사랑 없는 비수처럼 듣는 이들에게 상처를 입히기도 합니다. 옳고 그른 것을 말하는 것은 정말 중요하지만, 그것이 상대방의 유익과 기쁨을 위한 것임을 분명하게 말해줄 책임도 우리에게 있습니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은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대로 지으신 고귀한 영혼입니다. 당신의 삶은 천하보다 귀한 가치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의 인격을 존중하고 당신의 삶의 형통을 간절히 바랍니다. 이 세상 그 누구보다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삶의 행복을 추구하는 분은 바로 당신의 삶의 주인이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당신에게 삶을 빌려주신 것은 당신이 그 삶을 가장 만족스럽고 유익하게 누리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하나뿐인 아들을 당신을 위해 내어주실 만큼 당신이 그 삶을 아름답게 영위하길 원하십니다. 그 아들을 믿고 당신 삶의 주인을 영화롭게 하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분의 인생 사용법에 따라 사는 것이 당신이 가장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입니다.
세상은 계속해서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부정하면서 인생은 당신의 것이고 당신이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이 행복이라고 외칠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게 막거나 반대하는 의견이 개인이 겪는 불행의 원인이라고 탓할 것입니다. 하지만 속지 마십시오. 당신이 이 땅을 떠나는 그 순간 당신은 인생의 주인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평생 그 거짓에 속아 인생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만일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러한 세상의 거짓을 지지하는 악을 행하지 마십시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최고의 길은 이웃이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를 만나고 그들의 복을 위해 설계하신 인생의 방식대로 형통한 삶을 누리게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리스도인 형제자매여, 우리는 진심으로 이웃의 고통에 공감하고 친절하게 그들의 삶을 포용한다는 이유로 멸망의 길로 그들을 인도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인도하신 좁은 길 그 생명의 길로 이웃을 인도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