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신 것을 성육신(incarnation)이라고 한다. 요한은 이를 가리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라고 분명하게 설명했다(요 1:14). 기독교에서 기념하는 성탄절은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임마누엘(God with us) 곧 우리와 함께하시기 위해 육신을 입으신 날이다.

그런데 왜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육신이 되셔야 했을까? 쉽게 떠올릴 수 있는 대답은 십자가의 대속이다. 혈과 육을 가진 사람을 대신하여 누군가가 그 죗값을 죽음으로 치러야 한다면, 반드시 혈과 육을 가져야만 한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표현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3-4)

율법은 죄인을 의롭다고 할 수 없다. 죄 없다고 판결할 수 없다. 육신이 연약하여 율법에 기록된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하나님의 요구를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자기 아들을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육신을 입고 우리 죄를 대신 지고 죽으심으로 우리 죄인이 결코 이룰 수 없는 율법의 요구를 우리를 위하여 이루셨다. 요한이 외친 것처럼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이 땅에 오셨고(요 1:29), 그 이름의 뜻처럼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셨다(마 1:21).

사람으로 태어나신 사랑
그러면 왜 예수님은 아기로 이 땅에 태어나신 것일까? 성육신이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그리고 특별히 그분의 죽으심에 중요한 의미를 둔다면 30세의 건장한 청년으로 이 땅에 내려오실 수 있지 않았을까? 30여 년의 무의미해 보이는 성장기가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무능력하고 철저히 의존적인 아기로 태어나실 이유가 어디에 있나?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히 2:14-16)

첫째, 우리가 여기서 발견해야 할 것은 “아브라함의 자손” 곧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을 믿음으로 함께 이어받은 자들에게 하나님이 특별히 베푸신 사랑이다. 바울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라고 말했다(갈 3:7). 히브리서 기자는 이들을 가리켜 “자녀들”이라고 했고, 거슬러 올라가면 2장 13절에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라는 이사야 말씀을 인용하면서 이를 분명히 했다.

예수님께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신 이유는 그 자녀들이 혈과 육에 속하였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하기 위해 오신 임마누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우리와 같은 모습이 되신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그 동기는 아버지와 자녀, 같은 아버지로 말미암아 한 가족이 된 형제간에 누리는 친밀하고 뜨거운 사랑이다. 당신은 특별한 제품의 한정판(Limited Edition)이 얼마나 귀하고 값진 것인지 생각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가 혈과 육을 지니시면서까지 보이신 이 특별한 사랑은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한정된 사랑이다. 천사들도 욥기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린 적이 있지만, 이 특별한 사랑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욥 38:7).

히브리서 기자는 본문에서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셨다고 말했다(14절). 단순히 자녀들과 같은 혈과 육을 가지셨다는 것이 아니라 ‘같은 모양’ 혹은 ‘같은 방식’으로 (F. F. Bruce, NICNT, “in like manner”) 육신을 입으셨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신 것 외에는 똑같은 임신, 출산, 성장 과정을 통해 이 땅에서 혈과 육을 가진 보통 사람처럼 사셨다. 그 이유는 무엇이며 특별한 아버지의 사랑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죽음을 이기신 사랑
둘째, 히브리서 기자가 14-16절에서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관련지어 강조하는 개념은 “죽음”이다.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등 죽음을 반복해서 언급한다. 모든 사람을 공포로 사로잡는 원수가 있다면 바로 ‘죽음’일 것이다. 죽음 앞에 장사 없다. 다가오는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거나 잊어버리고 사는 사람은 있어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죽음이 무서운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실제로 평생 육신의 죽음을 두려워하며 사는 자는 별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가 영적 죽음 아닌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 없이는 그 운명을 벗어날 수 없지 않은가? 그래서 사도 바울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전 상태를 “허물과 죄로 죽었던”(you were dead) 상태라고 말한다(엡 2:1). 죽음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을 배반한 천사가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된 ‘죽음’의 세력을 잡고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 없이 창조된 아담과 하와를 유혹했고, 타락한 인간은 그 이후로 계속해서 죄의 삯인 사망을 무서워하며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한다.

한평생 죄에 매여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하고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마귀의 역사에 매여 타락한 세상 풍조를 좇아 살다가 불순종의 아들들로 발견되어 영원한 저주를 받는 것을 죽음이라 한다면, 죽음에 매여 있지 않거나 죽음이 두렵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양심과 함께 율법을 받은 유대인이나 율법 없이 양심을 가진 이방인 모두 하나님의 고발 아래 심판을 두려워하며 살고, 죽음은 마음속 은밀한 곳에서 항상 두려워했던 그 심판대가 마침내 모든 죄의 대가를 요구하는 시점이다. 솔로몬이 경고한 것처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전 12:14).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혈과 육을 입으시고 또 우리와 같은 방식으로 나셔서 자라신 것은 바로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마귀를 멸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마귀 아래 영적 죽음의 고통을 평생 안고 사는 자들을 놓아주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죽음의 영역에서 권세를 쥐고 활동하는 원수 마귀를 치고 그 손아귀에 잡혀 있던 이들을 구출하기 위해서다. 예수님은 “죽음을 통하여” 이 놀라운 일을 이루셨다. 육신의 죽음을 통해 육신을 가진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시려고 육신을 입으신 것이다.

마귀는 더 이상 죽음의 세력으로 우리를 유혹하거나 겁줄 수 없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롬 8:1).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죽음으로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셨다. 마귀도 곧 최종 판결을 받을 것이다. 바울과 요한은 이렇게 확신했다.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 아래에서 상하게 하시리라”(롬 16:20). “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계 20:10, 14).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이제 사망과 죄의 권능에 대하여 담대하게 외칠 수 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 15:55-57)

자, 이제 마지막 해결되지 않은 문제를 풀어보자.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으신 것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복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받은 자녀에게만 특별히 베푸신 하나님의 한정판 사랑이다.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으신 것은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되어 죄에 매여 종살이하는 이들을 해방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기 위함이다. 혈과 육을 입은 자녀를 위하여 예수님은 혈과 육을 입고 하나님의 사랑을 자기의 죽음을 통해 이루신 죄 사함과 영생을 주심으로 확증하셨다. 마지막 질문은 왜 예수님께서 아기로 태어나 평범한 사람의 과정을 거치셨냐는 것이다.

범사에 사람이 되신 사랑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단언한다.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히 2:17)

“범사”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의 모든 시간을 포함한다. 왜 그분이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한가?(여기서도 우리를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는 그 사랑은 참 놀랍다, 11절). 본문은 바로 그 이유를 설명한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히 2:17-18)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에 중보자인 대제사장이 되시기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화목을 이루기 위해 중보자를 세운다고 생각해보라. 당신의 입장과 처지를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을 세우지 않겠는가? 예수님이 그런 분이시다. 그분은 자비하신 대제사장이다. 철저히 부모에게 의존해야 하는 무능력한 아기에서 시작하여 지혜와 키가 자라는 과정을 겪으셨고 하나님이 주관하신 시험을 통과하시기 위해 마귀의 유혹을 받으셨다. 그분은 죄는 없으시지만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시다(히 4:15).

만일 당신이 화목을 반드시 이뤄야 하는 상태라면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그 일을 이루어 반드시 성사시키는 중보자를 세울 것이다. 예수님이 그런 분이시다. 그분은 신실하신 대제사장이다. 사람이 얼마나 하나님과의 화목을 필요로 하는지 아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가 잃어버린 자녀를 어떤 마음으로 부르고 찾고 계시는지 아신다. “아버지께서…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신다(요 18:9).

우리는 “단번에 드리신 바 되”신 그리스도께서 많은 죄를 이미 해결하셨기 때문에 지금 대제사장으로서 하고 계신 일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라고 말씀하지만, 롬 8:34), 예수께서 아기로 범사에 혈과 육을 가진 형제들과 같이 되신 것의 의미를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무덤에서 한시적으로 베풀어진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범사에 우리와 같이 되셨다는 사실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중보하고 대언하고 간구하시는 대제사장이 어떤 분이신지 우리에게 더 깊은 이해를 가져다 준다.

우리를 완벽하게 공감하시는 분으로서 반드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목을 이루시는 예수님을 생각할 때 우리는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다(히 4:16). 예수님은 ‘나 때는’이라고 거드름을 피우며 면박을 주거나 공감과 소통이 꽉막힌 분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계시지 않는다. 그분은 우리를 동정하신다. 공감하신다. 이해하신다. 우리의 처지와 상황을 똑같은 인생 경험으로 모두 아신다. 예수님은 그렇다고 우리의 옛 자아를 내버려 두시거나 죄에 종노릇 하는 것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여기고 포기하지 않으신다. 계속해서 성화의 은혜를 베푸셔서 모든 자녀를 한 사람도 빠짐없이 흠 없고 아름다운 하나님 자녀로 세우실 때까지 신실하게 일하신다. 갓난아기부터 십자가 죽음까지 아버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철저히 순종하며 완벽하게 사신 분께서 우리의 성화를 책임지고 돌보시니 이보다 더 믿음직하고 든든한 은혜가 어디 있겠는가?

천국에서 예수님이 말씀해주시는 30여 년의 삶 이야기를 듣고 싶다. 그분이 가지고 계신 찬란한 영광과 두 손에 난 못 자국을 보면서, 그토록 존엄하고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께서 이 땅에 혈과 육을 입고 오셔서 하루 24시간, 일주일 7일, 일 년 365일, 30여 년 우리에게 어떤 사랑과 은혜를 베푸셨는지 듣고 싶다. 우리와 범사에 같은 모습이 되신 사랑을 더 깊이 헤아리고 싶고 더 많이 알고 싶다. 그러면 그럴수록 오늘, 내일 그리고 주께서 부르시는 그날까지 우리는 그리스도를 더 많이 알고 사랑하고 믿고 그 안에 소망을 두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우리를 위해 사람이 되신 사랑, 예수님, 그분만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