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존 목사에 대한 국내 시선이 곱지 않다. 많은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몇몇 목회자나 신학자, 그리고 미국 목회자의 발언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오랜 세월 존경과 신뢰를 얻어온 존 맥아더, 존 파이퍼 목사에 대한 실망감을 찾아볼 수 있다. 코로나 그리고 정치적 발언 때문이다. 필자는 두 목사를 무조건 지지하지는 않는다. 특히 코로나를 대처하는 방법에 대한 견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하지만 동의할 수 있는 선까지 이 칼럼을 통해 변호하려고 한다. 아전인수격으로 편을 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두 목사에 대한 비판 중 공정하지 못한 부분이 확실히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존 파이퍼 목사님 변호하기

먼저 존 파이퍼 목사를 변호해 보자. 파이퍼 목사에 대한 비판 혹은 실망은 주로 코로나를 겪는 고통받는 이들에 대한 공감, 동정심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코로나 확산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무렵, 가장 먼저 기독교에서 이 사태에 대한 공식적인 메시지를 선포한 사람이 존 파이퍼 목사인 것 같다. <코로나 바이러스와 그리스도>(개혁된 실천사, 2020. 4월) 책자는 국내뿐만 아니라 다양한 언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에 시국에 꼭 필요한 기독교 메시지를 전달했다.

문제는 메시지의 핵심이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이라는 데 있다. 상대적으로 6월에 출간된 톰 라이트의 책, <하나님과 팬데믹>에서 라이트는 그리스도인이 고통받는 자를 위해 울고 실질적 사랑을 베푸는 것이 시국에 먼저 필요한 기독교 메시지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섭리와 구속에 관한 메시지는 그다음이라고 말한 것이다.

존 파이퍼 목사에 대한 비판 혹은 실망은 바로 여기서 생긴다. 왜 그리스도인은 재앙 앞에 고통받은 이들에게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을 말하는가? 우는 자와 함께 우는 것이 더 시급한 기독교 메시지가 아닌가? 그러고 나서야 복음이 들어갈 틈이 생기지 않겠는가?

아이러니하게도 존 파이퍼 목사는 개혁주의 목사 중에 고통에 관하여 가장 많은 가르침을 준 사람 중 하나다. 그 자신도 암과 싸우며 <암을 낭비하지 마세요>라는 책을 썼다(아가페북스, 2018). 현대찬송가를 만들고 부르는 게티 부부가 SING 2020 컨퍼런스에 존 파이퍼 목사를 초청했는데, 그는 거기에서도 “고난이 노래가 되게 하라”는 말씀을 전했다.

사람들이 존 파이퍼 목사를 오해하는 건 고난을 통과하는 참된 비결, 능력을 파이퍼 목사가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에서 찾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존 파이퍼 목사는 고통받는 이들에게 무관심한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꼭 필요한 소망의 메시지가 하나님의 영광과 그 주권적인 섭리에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많은 고통을 겪는 욥에게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과 주권을 계시하셨을 때, 욥이 잠잠히 위로받고 회개하여 하나님을 신뢰하게 된 것처럼 말이다.

지금은 은퇴했지만 존 파이퍼 목사는 목회할 때 임종을 앞둔 성도를 찾아가 ‘지금 세상 그 어떤 곳보다 자신이 있고 싶은 곳이 이 병실이다’라는 위로의 말을 건네고 기도해 주었다. 그리고 그 병실에서 선포한 메시지는 죽음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죽은 자를 일으켜 그분의 나라에 인도하실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라는 메시지였다.

몰론 라이트의 말처럼 그리스도인이 코로나로 고통받는 이들에게 실질적인 사랑을 전달하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다. 존 파이퍼 목사도 그것을 반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하나님의 영광과 그분의 주권을 일단 옆으로 젖혀두고 사랑을 전달하는 것이 가능한가? 교회는 단지 구호 단체나 사회봉사 기관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을 행할 때 그리스도인은 왜 하나님께서 이런 고통을 허락하시는지, 그리스도가 어떻게 이 고통을 뛰어넘는 평안과 소망을 주시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설명을 할 때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은 필수적이다(만일 섭리와 구속에 대한 설명 없이 섬김과 구제만 있다면 원인 제공을 한 하나님은 참 외식적이지 않은가? 코로나를 허용하시고는 사람들을 시켜 구호 물품이나 후원금을 보내는 것이니 말이다.)

복음은 단지 사랑과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다. 복음은 고통의 원인이 죄라는 것을 인정하고 죄와 그 결과물인 고통 그리고 영원한 멸망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영광을 그리스도 예수의 얼굴을 통해 보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외치는 구원은 단지 코로나를 잘 이겨낼 거란 소식이 아니라 코로나가 밥줄과 목숨을 빼앗아도 하나님의 주권 아래 우리 영혼이 영원히 안전할 수 있다는 소식이다.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 없이 하나님의 사랑은 세상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

한 유명한 목사는 ‘최고의 예배는 선교’라는 말을 했다. 하지만 존 파이퍼 목사는 ‘예배가 없기 때문에 선교가 필요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첫째 되는 계명과 둘째 되는 계명을 뒤바꾸는 것의 문제다. 우리는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하기 때문에(예배)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한다(선교). 이웃을 사랑하고 그들을 돕는 일은 좋은 일이지만 그것은 첫째 계명인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을 높이며 그분을 사랑하는 것보다 우선이 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이 이웃에게 사랑을 전하고 고통을 겪는 이들의 삶에 가까이 다가가는 이유는 궁극적으로 그들이 하나님을 우리처럼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하고 예배하게 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이것이 선교가 예배라고 말하는 유일한 근거다). 단지 이 땅에서 먹고 사는 문제가 개선되는 게 아니라 영원의 문제를 해결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존 파이퍼 목사가 코로나를 겪는 이들에게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큰 목소리로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적 섭리를 말한 것은 문제가 될 수 없다.

존 맥아더 목사님 변호하기

존 맥아더 목사가 비판을 받는 건 조금 더 복잡하다. ‘지금 우리가 겪는 건 팬데믹이 아니다’, ‘코로나 확진자 수치를 완전히 믿을 수 없다’, ‘참 그리스도인은 민주당을 지지할 수 없다’ 등 대한민국 공공의 적이 된 전광훈 목사와 유사한 말을 실제로 했기 때문이다. 그레이스 커뮤니티 교회는 존 맥아더 목사님의 리더십에 따라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고 대면 예배를 진행하고 있고(조심스러운 성도를 위한 배려도 물론 제공하지만) 정부가 방침에 따르지 않는 교회를 고소하여 소송을 진행하고 있다.

먼저, 필자는 존 맥아더 목사와 견해가 다른 것을 분명히 밝히고 싶다. 코로나 예방을 위한 철저한 수칙 가령 마스크를 착용하거나 손 세정제를 사용하는 것, 서로 일정 거리를 두어 감염을 예방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예배 후 방역을 하고 예배 참여자를 파악하여 혹시나 확진자가 생길 경우 빠르게 검사를 받아 지역 사회를 감염시키지 않을 수 있도록 조치를 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계속해서 그렇게 실천하고 있다.

존 맥아더 목사가 코로나로 인해 사망한 사람의 숫자에 의문을 품는 부분은 아마도 고령에 기저질환이 있는 상태에서 코로나에 감염되어 사망한 경우를 모두 포함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에 생긴 것으로 보인다. 인류 역사 가운데 더 많은 사망자를 낸 질병이 많기 때문에(코로나로 인한 사망자는 사실 상대적으로 매우 적은 편이다. 또한 코로나는 치료가 가능하다) 그리고 실제로 코로나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고 있는 나라도 있기 때문에 팬데믹이라는 아주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고 보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결론적으로 존 맥아더 목사는 그리스도인이(또 사회가) 지금의 코로나 사태를 실제 위험성보다 더 위험한 것으로 보고 두려워하며 살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어떤 선교지에서는 하루 확진자가 3,000명으로 줄어들어 금지되었던 대면 예배가 허용되었다고 한다. 하루 확진자가 세 자리만 되어도 교회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를 일시 정지시킬 만큼 코로나가 치사율이 높고 치명적인 질병인가에 대해서는 생각하는 게 다르기 때문에 맥아더 목사가 두려움과 공포에 빠진 이들에게 너무 무서워하지 말고 평안한 마음을 갖자고 말한 부분은 생각의 차이이지 무지의 발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필자가 알기론 국내에서도 하루 확진자 수가 네 자릿수가 되는 등 아주 심각한 지경이 아니라면 방역 수칙을 지키면서 기본적인 생활을 하게 하는 것이 더 현명한 선택이라고 믿는 사람이 있다.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권력을 잡기 위해 무엇이든 하는 정치 집단이 좌우와 상관없이 지금의 코로나를 최대한 이용한다는 것이다. 야당은 코로나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대통령을 끌어내리려 하고, 여당은 그 공격을 방어할 수 있는 목소리를 최대한 끌어모아 권력을 지키려 한다. 트럼프 대통령이 존 맥아더 목사에게(또한 많은 보수 기독교 리더에게) 개인적으로 연락을 하고 맥아더 목사의 발언이 시사, 정치 뉴스에 오르는 건 아마도 이 때문인 것 같다. 정치적으로 이용당하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하지만, 그만큼 영향력 있는 목소리를 정치 집단이 그냥 내버려 두지는 않을 것이다.

존 맥아더 목사의 직접적인 정치 발언은 지난 미국 대선때 시작되었다. 땅에 세워진 나라는 침몰하는 배와 같으며 하나님 나라의 계획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바른 전제를 제시한 후, 그리스도인은 교회 인도자의 자격을 갖춘 정치 지도자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기 위해 덜 악한 지도자를(사회에 덜 악한 영향력을 미치고 덜 악한 곳으로 이끌 지도자들) 선택하는 것이 현명한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당과 공화당이라는 두 개의 버튼이 있고 일주일 안에 반드시 둘 중 하나를 눌러야 한다면, 존 맥아더 목사가 볼 때는 매년 120만 명 가까운 태아를 살해하는 끔찍한 미국의 현실을 임신 9개월까지 낙태를 허용하자는 민주당 정책에 따라 지금보다 두 세배 더 많이 학살하도록 만드는 것보다는 많은 부정과 부패가 있더라도 공화당을 선택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생물학적인 남성과 여성이 태어날 때부터 성 정체성을 선택하도록 강요받고 성적으로 소수인 사람들을 위해 미국 국민 전체가 성 정체성과 인식을 바꿔야 하는 것보다는 다른 종류의 악행이 덜 파괴적이라고 보는 것이다.

필자는 정치적 성향이나 선호가 다를 수 있다고 인정하지만, 그리스도인이 임신 9개월까지 낙태를 허용하는 것을 당 정책으로 삼고 있고 동성애 합법화를 추진하려는 적극적인 의지가 있는 정당을 지지하려면 상대적으로 반대 정당의 악이 얼마나 더 심한 영향을 미치는지 충분히 생각해봐야 한다고 본다. 내가 누른 버튼으로 120만 명 이상이 죽는다고 생각해보라. 그런 우려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의견을 묻는 바람에 존 맥아더 목사는 덜 악한 정당을 지지하는 것이 옳다는 취지로 담대하고 다소 노골적일 수 있는 목소리를 냈다고 생각한다. 민주당을 지지한다고 낙태나 동성애를 지지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선택의 결과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충분히 고려할 만하다.

칼럼을 마치면서 또 다른 존 목사님의 이야기로 마무리하려 한다. 성령의 감동을 받아 존 목사님(사도 요한)은 이렇게 얘기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7-8)

개인의 신학적 관심과 시대를 보는 관점의 차이 때문에 때로 강조점이 다른 그리스도인이나 목사의 말에 기분이 상할 수 있다. 실망할 수 있다. 코로나는 그리스도인이 서로의 다름에 더 집중하고 감정을 상하게 만드는 강력한 요인이 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확실하게 잘못된 동기가 드러나지 않는 한 서로의 최선을 믿어주는 것이 ‘하나님께 속한 사랑, 그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아는 자’인 우리가 더욱 힘써야 할 일이 아닐까? 동의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고 그것이 나에게 중요하더라도 하나님 말씀에 명백히 어긋난 것이 아니라면 사랑으로 내가 ‘허물’이라고 생각하는 부분도 덮어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