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에 대한 여론이 갈수록 좋지 않다. 인터넷 기사가 모여 있는 포털 사이트를 보면 매일 한두 개씩 교회 관련 뉴스가 올라온다. 코로나 확진자 발생, 목회자 확진., 교회 발 감염. 꼭 질병과 관련이 없어도 사기, 부정, 비리, 성범죄 등에 연루된 목회자 뉴스도 계속 등장한다. 그러다 보니 교회인 것이 부끄럽고 세상 사람에게 교회가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일이 힘들어졌다. 또 한 가지 최근에 두드러진 특징은 교회가 선을 긋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문제가 되는 교회나 성도, 목사들과 ‘우리는 완전히 다르다’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페이스북에서 몇몇 교회는 “교회가 진심으로 미안합니다”라는 문구를 가지고 사과 운동을 한다. 국민들에게 걱정을 끼친 점에 대한 사과이지만 선이 조금 모호하다. 무엇에 대한 사과인지 받아들이는 사람 마음대로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교회가 정치 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것이 미안한 것인가 아니면 정기 집회를 가진 것이 미안한 것인가? 한 유명한 목사님은 페이스북에 교회가 드리는 최고의 예배는 선교라고 말했다. 세상이 주님께 돌아오는 것만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가 예배를 지킨다는 이유로 세상을 위협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이 말에 동의한다면 교회가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에는 대면 예배를 하는 것도 포함될 것이다.

누구도 겪어보지 않은 팬데믹을 반년 이상 겪으면서 무서운 질병과 그것을 십분 이용하는 정치 집단, 그와 관련된 여러 후폭풍을 일으키는 여론 속에서 우리는 선 긋기를 남발하지 말아야 한다. 때로 우리의 선 긋기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신 명령과 그 가치를 함께 배제하고 배격하는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지혜로운 선 긋기를 할 수 있을까? 개인의 생각과 여론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그 기준으로 삼고 선 바로 긋기를 해보도록 하자.

정치 운동에 앞장서는 교회와 선 긋기

성경은 교회가 세상에 일어난 일에 관여하는 것을 금지하지 않지만, 그 방식과 한계를 분명히 말한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롬 13:1)

세상 정치는 권력을 잡기 위해 투쟁한다. 정당이 지지하는 정책과 이념을 실현하려면 권력을 얻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정치 집단의 목적이다. 하지만 교회는 이 땅에서 권력을 잡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 현재 위에 있는 권세를 뒤집는 것은 교회가 할 일이 아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그분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요 18:36).

그리스도께 속한 교회는 말씀에 따라 하나님으로부터 난 지금의 권세에 복종하고 순응해야 한다.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해야 한다(롬 13:7).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해야 한다(딤전 2:1-2).

그러므로 권세를 뒤집는 일에 적극적 혹은 간접적인 목적을 두고 있는 모든 종류의 정치 활동과 선을 긋자.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에게 왜 정치 활동을 하지 않았냐고 책망하지 않으실 것이다. 주님 말씀하신 대로 권세에 복종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참는 교회를 칭찬하실 것이다(벧전 2:19).

한 가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세상 권세가 선을 악이라 가르치고 악을 선이라 주장할 때 침묵하는 것이 권세에 복종하는 것은 아니란 것이다. 교회는 체제 전복이나 정치 활동을 위한 목소리가 아니라 진리의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집인 교회는 진리의 기둥이다(딤전 3:15). 교회가 주추를 놓은 반석은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한 철저한 순종이다(마 7:24-25). 그러므로 교회는 권세에 순응하는 방식으로 계속해서 진리가 무엇인지 어두운 세상에 빛을 비출 필요가 있다. 성령 하나님께서 교회가 선포하는 진리의 말씀을 통해 죄, 의,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신다(요 16:8). 그러므로 진리를 외치는 일에 대해서는 선을 긋지 말자.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김근주 교수는 동성애가 죄라는 가르침은 기독교에만 해당하는 사항이니 국가 정책인 차별금지법에 기독교 가치관을 가지고 반대하는 것은 교회가 할 일이 아니라고 말했다. 바로 여기에 모호한 선 긋기가 반영되어 있다. 교회는 정당을 무너뜨리고 권세에 불복종하려고 정책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 가운데 진리를 말하기 위해 반대하는 것이다. 김근주 교수의 차별금지법 관련 영상을 보면 그는 동성애가 성경이 말하는 죄가 아니라고 굳게 믿을 뿐 아니라 선을 잘못 긋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대면 예배를 추구하는 교회와 선 긋기

최근에 가장 이슈가 되고 있는 문제는 교회의 대면 예배인 것 같다. 사회적 거리 두기 2단계를 실시하면서 수도권은 교회의 모든 집회(정기집회 포함)를 비대면 집회로 전환하라고 명령했다. 시설을 갖추고 자원이 충분하여 잘 대비한 교회는 온라인 예배로 전환을 빠르게 했지만, 그렇지 못한 교회는 ‘모이기를 폐하는’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그런데 이 시국에 대면 예배를 고집하는 교회가 있다. 정부 방침을 어기더라도 예배를 포기할 수 없다고 부르짖는 교회가 있다. 세상은 절대로 이해할 수 없어 비방과 조롱을 쏟아붓는 이 교회와 어떻게 선을 긋는 것이 옳은 것일까?

필자가 섬기고 있는 유평교회는 여태껏 정부의 방침에 철저하게 따르면서 예배를 드렸고 지금도 온라인 예배로 전환하여 비대면 예배를 실시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국민의 건강을 위협하면서 대면 예배를 고집하는 저 몰지각한 교회와 다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입장이다. 그렇게 선을 그으면 그들과 달리 유평교회는 이웃과 국가를 사랑하는 교회로 보일 수 있다. “교회가 진심으로 미안합니다”라고 말하면서 우리의 무고함을 은근히 밝히고 모든 책임을 진짜 사과해야 할 교회에게 덮어씌울 수 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자. 초대교회는 유대교의 견제와 비방, 로마 정부의 핍박을 이겨내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었다(행 2:46).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라”는 명령에 따라 서로 돌아보고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고 모이는 일에 힘썼다(히 10:24-5).

만일 어떤 교회가 매일 돈을 벌기 위해 일하러 회사에 가는 것만큼(혹은 그보다 더)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 가치 있고 귀한 일이기 때문에 방역 수칙을 철저히 지키면서 대면 예배를 추구한다면, 세상 사람들이야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욕할 수밖에 없는 일이라고 말하겠지만, 그리스도께 속한 교회도 그렇게 봐야 할까? 우리와 다른 교회 혹은 거짓 교회라고 선을 긋는 것이 옳을까?

최근에 그리스도인이 SNS에 공유하는 생각을 지켜보면 이 부분에 있어서 선 긋기가 바르게 되고 있지 않은 것 같다. 대면 예배를 추구하는 교회는 이웃 사랑에 실패한 것처럼, 예배만 중요하게 생각하고 선교에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헌금에 집착하는 사업장으로 변질된 거짓 교회처럼 몰아세우는 극단적인 표현을 가감 없이 사용한다. 반대로 비대면 예배를 하고 있다고 해서 그 교회가 사명을 저버리거나 예배의 중요성을 먹고 사는 문제보다 낮게 여기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 타협하고 마귀에게 항복한 교회가 아니다.

각자의 선택을 존중하고(잘못된 동기가 명백히 드러나지 않는 한) 그 선택의 결과로 각자가 감당하고 책임져야 할 여러 가지 일에 하나님께서 필요한 모든 은혜를 내려주시기를 중보해주는 것이 옳지 않을까? 대면 예배를 추구하는 교회에서 확진자가 나오길 바라는 것도 죄고, 코로나 사태가 종료되는 시점까지 대면 예배를 쉬지 않고 했다고 해서 다른 교회보다 믿음이 좋은 교회라고 자랑하는 것도 죄다. 어떤 선택을 하든지 교회는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고 그분의 말씀에 따라 이웃을 사랑하기에 힘써야 한다. 이 목적에서 벗어나지 않은 교회라면 그들의 선택이 우리와 다를지라도 선을 긋고 욕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하나님께서 직접 행하시는 선 긋기

요즘 들어 대한민국의 기독교 왕국이 중세 기독교 왕국과 닮았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보이는 교회(종교인)와 보이지 않는 교회(참된 신자)의 격차가 너무 커서 죄가 교회의 이름으로 많이 자행되고 있다. 물론 참된 신자도 넘어질 수 있고 죄를 범할 수 있다. 하지만 회개 없이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죄를 즐기고 있는 교인이 너무 많고 거듭난 적 없는 직분자가 교회에 넘친다. 교회는 하나의 정치 집단, 사회 운동 기관으로 변질 되었고 성경의 권위 있는 말씀에서 멀어졌다.

마틴 루터와 존 칼빈은 썩을 대로 썩은 중세 기독교 왕국을 바라보며 어떤 소망을 가졌을까? 지나온 기독교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칠천 명의 백성’을 남기신다는 것이다(왕상 19:18).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택하심을 받은 백성, 그리스도의 말씀(오직 말씀!)에 굴복하여 죽기까지 순종할 참된 믿음을 가진 자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일하신다.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과 아버지 안에 거하리라(요일 2:24)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는 것에 막연한 죄책감을 갖지 않아도 된다. 처음부터 들은 것, 그리스도의 말씀을 성실하게 따르고 있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통하여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게 하실 것이다(행 13:48). 진리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여 아들과 아버지가 우리 교회와 함께하신다면, 세상이 쏟아붓는 비방과 조롱을 겁낼 필요가 없다. 우리의 평판이 깎이고 억울한 질책을 받아도 최후의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교회는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가 우리의 책임과 충성을 면제시키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순서를 뒤바꿔서는 안 된다. 코로나 사태가 진실로 거듭난 교회, 진리 안에 굳건하게 세워진 교회,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교회와 그렇지 않은 교회를 드러내고 있다. 지역 교회 안에서도 각각의 지체가 실제로 가지고 있는 신앙과 그 신상의 진위여부가 시험대에 올라온 것 같다. 그동안 불분명했던 선을 하나님께서 확실하게 긋고 계신 것이다. 보이는 교회 가운데 보이지 않는 교회가 누구인지 밝히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더욱더 힘써야 할 것은 마지막 때에 끝까지 이기는 자가 되는 것이다. 죽도록 충성하는 것이다(계 2:10-11).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고(고전 10:12),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야 한다(빌 3:14). 우리의 선택, 심지어 실수나 실패를 통해서도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분명히 이루신다.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않음으로 세상에서 시험을 당할 때마다 떨어져 나가는 이들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을 갖되 죄책감을 갖지 말자. 세상이 교회를 미워할 때마다 그들의 호의를 얻기 위해 모호한 선을 긋지 말자.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가 그어야할 바른 선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가르쳐 주실 것이다(히 4: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