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랫 글은 예전에 유평교회 자유게시판에 제가 올렸던 글입니다.
미국에서 처음으로 설교했던 마태복음 18장 설교이기도 합니다.
이번 주 주일 설교가 빌립보서 4:1-3절로 "우리가 품어야 할 같은 마음"이고
청년회 말씀도
"자기를 부인하고 서로 용서하고 관계를 회복하라"는 것이어서
이 칼럼을 같이 올려봅니다.

 

하루는 베드로가 예수님께 나와 "형제를 몇 번이나 용서해줘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전에 범죄한 형제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셨기 때문이었다.

누가 나에게 범죄를 했다면 내가 그와 가서 먼저 이야기하고
그가 돌이키지 않을 때 두세 증인과 함께 가서 대면하고
그래도 회개치 아니하면 교회를 통하여 하고
그래도 하지 않는 경우 이방인처럼 여기라는 것이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교회 치리의 법칙이라 생각한다.
어떤 면에서 그렇게 볼 수 도 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주신 원래 이유는
범죄한 그 형제를 어떻게 회복시킬 것인가이다.

당시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이혼 법을 오해하여
누구든지 이혼하고 싶으면 이렇게 이렇게 해라! 라고
마치 이혼을 하고 싶을 때 이용하는 법처럼 오용한 것처럼

교회 치리에 대한 이 구절 역시
형제를 교회에서 내치려면, 치리 하려면 이렇게 해라!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그 형제를 회복시킬 것인가? 용서할 것인가? 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나에게 범죄한 그 형제를 내가 찾아가 회복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회개치 아니할 때 두 세 증인과 더불어 찾아가 권면하고
그 후에는 교회 전체가 그 형제의 회개와 그 후 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그래도 돌이키지 아니할 때는
아픔을 감수하고 교제를 끊음으로
그가 교제를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죄를 회개하고 돌이킬 수 있도록
끝까지 도우라는 말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다.
몇 번 용서할 수 있냐고 되물은 것을 보면 말이다.
그것도 자신이 꼽을 수 있는 최대의 수, 유대인의 완벽한 숫자 일곱을 대면서…

예수님은 70번씩 7번이라도 하라고 하셨다.
다시 말하자면 무한대로 하라는 것이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는가?
예수님의 눈에 우리 모두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귀한 영혼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양에 대하여 이야기 하시면서
하나님은 한 영혼도 잃지 않기를 원하신다고 하셨다 (18:14).

지극히 작은 한 영혼
그 영혼이 고집이 세고, 화를 자주 내고, 부족하고, 거칠고
자기 주장이 강하고, 아무리 연약한 영혼이라도
주님은 그 영혼을 너무도 사랑하시고 아끼시며
그 영혼을 위해 목숨을 버리시고 그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그 영혼을 돌보는 천사들과 함께 하시며 그 영혼을 돌보신다.

왜 우리가 형제를 용서하고 사랑해야 하는가?
예수님께서 내가 용서치 못하는 그 형제도 죽을 만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그 영혼에게 대하는 것을 예수님 당신에게 대하는 것으로 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 이후 달란트 비유를 말씀하신다.
이 비유를 시작하실 때 "이러므로"라고 시작하시며
왜 형제를 용서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비유를 통해 말씀하신다.

하루는 주인이 종들을 불러 회계를 하는데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나와 갚을 수가 없어 주인에게 자비를 구한다.
일만 달란트는 수백만 달러, 우리나라 돈으로 1조 8천억 정도 된다고 한다.
주인은 처와 자식과 그 종의 몸까지 팔아서라도 갚으라 하였지만
사실 그 모든 것을 판들 갚을 수 있었을까?

헤아릴 수 없는 빚을 진 것이다.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을 진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 영혼이 진 빚은 얼마인가?
’하나님을 모른다’하고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왔던 것과
거룩하신 하나님이 절대 가까이할 수 없는 더러운 죄악으로 가득한 삶과
이 더러운 죄 때문에 예수님께서 목숨을 버리셔야 했다는 것을 알고도
구원받고 내가 계속해서 반복하여 지은 죄들을 기억해보라.

헤아릴 수 없는 빚이다.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을 진 것이다.

그런데 주인은 그를 불쌍히 여긴다.
마치 예수님께서 날 때부터 빛을 보지 못한 병자들을 바라보실 때처럼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 남겨질 제자들을 위해 땀을 핏방울처럼 흘리셨을 때처럼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이들을 향해
그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그들을 불쌍히 여겨달라 하셨을 때처럼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 눈물을 흘리시며
불쌍히 여기셨던 것처럼
그분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다.

그래서 우리의 헤아릴 수 없는 죄가
그분의 더 헤아릴 수 없는 은혜로 값없이 탕감되었다.

7번씩 70번 이상 죄를 지은 우리를
7번씩 70번 이상 무제한으로 용서하셨다.

왜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고 용서해야 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용서를 받았기 때문이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은혜를 받았기 때문이다.

용서함을 받고 밖으로 나가는 종의 마음은 어땠을까?
1조 8천억의 빚을 완전히 탕감 받고 뛸 듯이 기쁜 맘으로 나갔을 것이다.

그런데 나가다가 자신에게 빚진 친구 하나를 만나게 된다.
그는 보자마자 기분이 나빴다. 그래서 가자마자 목을 붙들고
돈을 내놓으라고 소리를 지른다.
주인은 자기의 멱살을 잡은 적도 없고 화를 내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친구는 갚을 테니 제발 이번 한 번만 봐달라고 빌었다.
성경에서 이 친구의 간청이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다"라고 표현된다.

어디서 많이 들은 이야기가 아닌가?
바로 자신이 주인 앞에서 간청했던 그 얘기이다.

종은 자기 친구의 심정을 온전히 이해했을 것이다.
갈급하고 애처로운 심정으로, 미안하고 절박한 마음으로 빌고 있다는 것을
조금 전 자신의 경험을 통해 더욱더 잘 이해할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그 종은 친구를 용서해주지 않았다.
빚을 다 갚을 때까지 친구를 옥에 가두었다.

그것을 지켜본 다른 친구들이 너무너무 보기 안쓰럽고 서글퍼서
주인에게 이야기하게 된다.

왜 우리가 형제를 용서하고 사랑해야 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형제를 용서치 않을 때 다른 형제, 자매가 실족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그 이전의 말씀에서 누구든지 지극히 작은 영혼이라도
실족게 한다면 차라리 연자맷돌을 목에 달고 바다에 빠뜨리는 것이 낫다고 하셨다.
다른 이를 실족게 하려면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것이다.
실족게 하는 이에게 화가 있다고 하셨다 (18:6-7).

영어 성경에 실족은 실망한다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짓게 하는 것이라 하고 있다.
(whoever causes one of these little ones who believe in me to sin)
옥으로 끌려간 친구는 자신을 용서치 아니한 종에 대해 죄를 짓지 않았을까?
미워하고 원망하지 않았을까?
그것을 지켜보던 친구들은 그 종을 판단하고 마음으로 정죄치 아니하였을까?

죄가 얼마나 무서운가?
주님은 죄를 짓게 하는 손과 발을 찍어버리고
눈을 빼버리고 천국에 가는 것이 낫다고 하셨다.

이 무서운 죄를 짓게 하는 것이 바로
나의 용서치 아니함 때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내가 형제를 용서치 아니함으로 그 형제뿐만 아니라
그것을 보는 형제 자매가 이 무서운 죄를 짓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떻게 몇 년 동안 서로 용서하고 화해치 아니하고 등돌리고 살수 있단 말인가.

주인은 일만 달란트 빚진 종을 다시 불러다 이야기를 하였다.

내가 너의 엄청난 빚을 너를 불쌍히 여김으로 탕감하여주었는데
네가 받은 그 불쌍히 여김으로 너의 친구를 용서하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시며 그 종을 옥에 가두신다.

분명한 것은 이 말씀이 믿는 자들에 대한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구절에 분명하게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마 18:35)

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왜 우리가 형제를 용서하고 사랑해야 하는가?
주님께서 용서치 아니하는 우리를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목숨을 바쳐 사랑하시고 돌보시는 영혼들이다.
나의 용서치 아니함으로 그들이 실족하고
내가 하나님의 엄청난 용서를 받았음에도 형제를 용서치 아니한다면
절대로 그 죄를 그냥 넘어가지 아니하신다는 말씀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 말씀은 믿는 자들에 대한 경고이다.

하늘나라에서 혹은 이 땅에서라도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우리의 용서치 아니함을 심판하실 것이다.

서로 사이가 좋지 않은 사람들은 용서에 대한 말씀을 들으면 이렇게 말한다.

"넌 그 사람이 나한테 어떤 짓을 했는지 잘 몰라서 하는 말이야."
하지만 그 말은 우리가 하나님께 어떤 짓을 했는지 잘 몰라서 하는 말이다.

또 이렇게 말한다.
"한두 번이면 용서해 주지 얼마나 많이 그러면 그러겠니"
그러나 그 말 역시 우리가 하나님께 얼마나 많이 죄를 짓는지 몰라서 하는 말이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내가 아무리 용서해주고 싶어도 용서가 잘 안 된다"
그 말 역시도 우리가 하나님께 얼마나 큰 용서를 받았는지 잘 몰라서 하는 말이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 사람이 용서를 빌 때까지는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

에베소서 4장 32절은 이렇게 말씀한다.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하라

하나님이 우리를 언제 용서하셨나?

하나님은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하나님의 원수로 하나님을 대적하며 죄악 가운데 있을 때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심으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

잘못한 형제가 죄를 뉘우치는 것은 관계 회복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그러나 죄를 용서해주어야 하는 형제, 자매가
’잘못한 형제의 회개 없이는 절대 용서할 수 없다!’라고
생각하는 자세는
에베소서 4:32 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하라
는 말씀과는 거리가 멀다.

잘못한 형제, 자매는 반드시 회개해야 한다.
그것은 그들이 순종해야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용서해야 하는 형제, 자매는
회개를 요구하고 그것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
그들에게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하심과 같이
형제를 용서하라는 것이다.

 

용서해야 한다.
하나가 돼야 한다.

용서하지 않기에는
내가 받은 용서와 은혜가 너무 크지 아니한가?

용서하지 않기에는
그 영혼의 가치가 너무 귀하지 아니한가?

용서하지 않기에는
그 형제 혹은 자매와
나의 용서치 아니함으로 실족하고 하나님 앞에 죄를 짓고 넘어지는
형제들과 자매들에게 너무 죄송하지 아니한가?

용서하지 아니하기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무섭지 아니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