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에 타임머신이 있어서 아담을 2020년 7월을 살아가는 우리 시대에 데리고 올 수 있다면, 그는 무엇을 우리에게 말해줄 수 있을까?
왜 하필 아담이냐고 물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아담과 하와는 지금 우리가 겪는 모든 수고와 슬픔을 겪지 않았던 때를 아는 유일한 사람이다. 부부간의 갈등도 없고, 아이 낳는 고통도 없고, 노동이 힘들고 고되지 않았던 때, 죽음도 없고, 전 세계적으로 퍼지는 전염병도 없던 그때를 살았던 사람이다. 지상낙원이라 부를 수 있는 세상에서 하나님과 날마다 동행하며 그분 뜻대로 ‘내 뼈요 내 살이라’고 고백한 아내와 함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한 삶, 천국 같은 삶을 살았다.
그뿐만 아니라 아담은 왜 코로나 같은 질병이 세상에 창궐하는지 그 이유를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다. 질병이 없던 세상에서 질병이 발생한 세상으로의 전환점에 그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 전환점 이후 하나님의 동산에서 쫓겨나 집 안에서는 가족 간의 살인과 죽음(창 4), 밖에서는 세상에 가득한 죄악을 경험하는 삶(창 6), 한마디로 전과 비교할 때 지상 지옥 같은 삶을 살았다.
지상 천국과 지상 지옥의 삶을 동시에 누려본 아담이 오늘날 우리에게 해줄 수 있는 한마디는 그래서 다음과 같다.
”죄의 심각성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라”
아담이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인생에 불어닥친 고난과 슬픔, 재앙과 질병이 무엇 때문인지 똑똑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에서 하나님 밖으로 쫓겨난 삶으로 전환된 이유는 창세기 3장에 기록된 아담의 죄 때문이다. 아담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을 무시하고(창 2:17), 뱀의 간교한 꾀에 넘어간 하와와 함께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그 열매를 먹었다(창 3:6).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을 거부하고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고 한 죄를 범한 것이다.
죄의 결과 땅이 저주를 받고, 사람이 저주를 받았다.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어 사람이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수 있게 만들었고(창 3:18), 사람은 남은 연수 동안 모든 수고와 슬픔을 당한 뒤 흙으로 돌아가는 죽음을 맛보게 되었다(창 3:19). 가장 아름답고 고귀한 하나님의 소명, 생육하고 번성하는 일에 고통이 수반되고(임신하는 고통), 하나님이 설계하신 가장 친밀하고 사랑 가득한 부부 관계가 상대방을 다스리기 위해 싸우는 전쟁터로 변했다(창 3:16).
죄가 만들어낸 이 전환점이 2020년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모든 종류의 수고와 슬픔을 겪는 계기를 마련했다. 우리가 세상에서 당하는 모든 나쁜 일들은 아담의 죄가 불러온 일이다. 코로나와 같은 질병도 아담의 범죄 이전에 찾아볼 수 없는, 하지만 이후로 인류가 늘 겪어왔던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세상에서 여러 가지 고난을 받을 때, 죄의 심각성을 깨닫기보다는 하나님의 은혜를 의심하고 원망하기 쉽다. 억울하다고 부르짖고, 공평하지 않다고 악을 쓴다.
그때 아담이 우리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 있다면 “하나님을 원망하지 말라. 모든 것은 죄 때문이다”라는 말이다. 나아가 그는 “하나님은 은혜로우신 분이다”라는 말을 덧붙일 것이다. 실제로 그가 하나님의 은혜를 옷 입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선악과를 먹는 그 날에 네가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하지만 선악과를 먹는 그 날에 아담과 하와는 죽지 않았다(무려 930년 동안이나 하나님은 그들을 살려주셨다!). 하나님은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셔서 그를 계속해서 살려두셨다(출 34:6). 그뿐만 아니라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창 3:21). 죄의 결과로 그들이 두려워하며 느꼈던 벌거벗은 수치심을 하나님께서 은혜로 가려주신 것이다.
아담은 알고 있다. 자신의 죄에 대한 가장 공평한 처벌은 죽음이라는 것을. 그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에 숨어 있던 그를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찾으시고 죄에 합당한 징계 아래 계속해서 살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온전한 은혜라는 것을. 하와가 계속해서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되어 아담과 더불어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한 삶을 살게 하신 것은 정말이지 하나님의 은혜다. 나아가 하나님은 그들을 대신하여 짐승을 죽이시고 그 가죽으로 옷을 입히심으로 그분의 은혜를 그들로 옷 입게 하셨다.
한 가지 흥미로운 죄인의 습성은 죄로 인해 겪는 고통 중에 하나님을 원망한다는 것이다. 마치 자신이 그런 일들을 겪어서는 안 될 것처럼,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은 것처럼 하나님께 따지듯 묻는다. “하나님, 도대체 왜 저에게 이런 일을 허락하시나요?” 하지만 아담은 오늘날 우리에게 사망 그 위에 옷 입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 말할 것이다.
물론 코로나 질병에 걸린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과 달리 하나님 앞에 특별히 더 중한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우리는 절대로 지금 겪는 고통과 죄를 구체적으로 연결 지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그런 올바른 분별이 지나쳐서 우리가 겪는 고통과 죄의 연관성을 전면부정 하는 실수를 낳아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죄를 창조하지 않으셨고, 사람이 죄를 범했으며, 그 결과 고통의 문제가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 아담이 그 증인이다.
코로나와 같은 질병이 죄의 결과라는 걸 아는 것이 왜 중요할까? 우리의 마음을 겸손하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현실을 바로 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죄인인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일반적으로 베푸신 은혜가 우리에게 마땅한 것이 아니라 오직 그분이 베푸신 은혜였음을 기억하게 한다. 평소에 누렸던 것을 잃었을 때, 잃은 것에 분노하기보다는 누리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인정하게 한다. 죄의 결과 마땅히 받아야 하는 저주 위에 하나님께서 참으로 많은 것을 옷 입혀 주셨다는 걸 깨닫게 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악수하고 포옹할 수 있는 건 우리에게 마땅히 주셔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다. 마스크 없이 호흡하고 자유롭게 식사할 수 있는 건 오직 하나님이 덧 입혀주신 은혜다. 죄인으로서 우리에게 “마땅한 것”은 “반드시 죽으리라”는 심판과 저주뿐이지만, 하나님은 아담에게 입혀준 가죽옷처럼 우리에게 참 많은 것을 입혀주고 먹여주고 공급하고 계신다.
그래서 다윗은 은혜로우신 하나님께 이렇게 물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시 8:4). “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알아주시며 인생이 무엇이기에 그를 생각하시나이까”(시 144:3). 자기의 죄와 하나님의 은혜를 바르게 이해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고백이다. 다윗이 다른 시편에서 말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신다는 건 진정으로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다(시 103:14).
그리고 여기 더 큰 은혜가 있다. 먼지뿐인 우리를 먼지도 돌아가지 않게 하시는 은혜. 아담이 범죄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신 약속이다.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 3:15)
이것은 하나님께서 뱀에게 하신 저주이자 아담과 하와에게 주신 구원의 약속이다. 그들에게 내리신 죄의 저주가 “여자의 후손”을 통해 사라질 것이다. 흙으로 돌아가는 허무한 인생, 하나님 밖으로 쫓겨난 인생이 하나님께 돌아가는 인생, 다시 영원히 그분과 동행하는 인생으로 바뀔 것이라는 약속. 바로 이 원시 복음에 하나님의 은혜의 절정이 담겨 있다.
아담이 오늘날 우리에게 찾아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라”고 말할 때, 그는 수천 년 전 자신에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음이 우리 때에 이미 이뤄진 하나님의 역사임을 알고 전율할 것이다. 여자의 후손이 이천 년 전 예루살렘에서 그 발꿈치를 상하면서까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셨다는 것, 그를 믿는 자의 죄에 내려진 하나님의 저주를 그가 십자가에서 온전히 받으셨다는 것을. 희생제물로 죽으신 그분의 거룩함으로 죄인의 부끄러움을 영원히 가리셨다는 것을(갈 3:27; 4:4). 그래서 우리 인생은 수고와 슬픔만 겪다가 흙으로 돌아가는 비참한 인생이 아니다. 여자의 후손으로 오셔서 뱀의 권세를 꺾으신 예수님, 그분을 아는 자, 믿는 자는 이제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아는 삶, 영생의 삶을 산다(요 17:3).
톰 라이트는 코로나 시대에 대한 기독교적 성찰의 일환으로 “하나님과 팬데믹”이라는 책을 썼다(비아토르, 2020). 그는 예수께서 나사로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리신 장면을 언급하며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오늘날 코로나로 고통 중인 사람들과 함께 울어야 한다고 말했다(요 11:35).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나사로를 살리신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본을 따라 복음에 합당한 구제와 섬김을 고통 중에 있는 이들에게 베풀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단지 나사로의 죽음이 슬퍼서 우신 것이 아니다. 유대인들이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라고 말했을 때 예수님은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셨다(요 11:38). 그분은 울고 있는 마리아와 많은 유대인들이 죄의 결과로 맞이한 죽음 앞에 철저히 무능력하다는 사실을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셔서 우신 것이다(요 11:33).
오늘날 아담이 코로나로 고통받는 이들을 보며 눈물을 흘린다면, 그는 단지 질병과 죽음이라는 고통에 공감하기 위해 울지 않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이 죄인에게 내려진 저주임을 알고 그 비참함을 비통해하며 불쌍히 여기며 울 것이다. 둘째 아담 예수님께서 그 이유로 우신 것처럼 말이다.
또한 아담이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소망을 주고 도움을 줄 수 있다면, 단지 구호 물품이나 응원과 격려의 메시지만 전달하지 않을 것이다(물론 가치 있고 필요한 일이지만).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약속하신 저주의 종식에 대한 약속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할 것이다. 그 복음의 주인공, 여자의 후손이신 둘째 아담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무덤에서 부활하게 하신 것처럼,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죄의 저주가 사라지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로 영원히 옷 입혀진다는 것, 흙으로 돌아간 몸을 언젠가 반드시 그분이 일으켜 새로운 몸으로 부활하게 하실 것이라는 것. 범죄한 날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들려준 원시 복음이 마침내 이루어졌음을 죄의 저주 아래 고통받는 이들에게 선포할 것이다.
만일 아담이 신약성경 중 가장 마음에 와닿는 말씀이 뭐냐고 묻는다면 이 말씀을 읽어주리라.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롬 5:17-18)
코로나 19로 전 세계가 고통과 슬픔을 맛보고 있는 이때, 우리에겐 시대와 현실을 뛰어넘는 위로와 격려가 필요하다.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왕 노릇 하고 있다는 올바른 현실 파악과 더불어 그보다 훨씬 더 큰 은혜와 의의 선물이 둘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메시지보다 우리에게 평안과 기쁨과 만족과 소망을 주는 이야기는 없다. 아담이 우리에게 찾아온다면 바로 그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