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서 가장 많은 재앙을 가장 짧은 시간에 한꺼번에 경험한 사람이 욥이라면, 아브라함은 가장 이해할 수 없고 끔찍한 명령을 하나님께 직접 받은 사람이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게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 22:2)

자식이 먼저 죽는 환경을 만나는 것도 참 비극적인 일인데, 직접 자기 손으로 죽여 제물로 바치는 건 아버지가 자식에게 할 수 있는 최악의 범죄가 아닌가. 왜 하나님은 그런 일을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신 것일까?

이삭이 어떤 아들인가? 25년간 아브라함은 자식이 없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고 명령하시면서(창 12:1), 아브라함이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실 것이라고 분명히 약속하셨다(창 12:2). 하지만 큰 민족은 고사하고 25년간 그에게 자식이 생기지 않는 것이 그가 마주한 현실이었다. 아내 사라의 여종 하갈을 통해 얻은 아들 이스마엘은 오히려 가정 내 불화를 가져왔고 아이를 낳지 못하는 아내의 고통을 가중했다.

하나님은 종종 아브라함을 찾아와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라고 약속하셨다(창 17:4-6).

하지만 25년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매번 실망과 좌절을 경험한 노부부가 하나님이 직접 찾아오셔서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라고 말씀하셨을 때 믿지 못하고 코웃음을 친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하다(창 18:10-15). 여성의 생리가 끊어진 사라와 늙은 아브라함 사이에 어떻게 아들이 생기겠는가?

하지만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말씀하신 하나님은 실제로 노부부에게 아들을 안겨주셨다. 아브라함이 백 세 때 마침내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아들이었다. 그런데, 그 사랑하는 독자를 지금 하나님은 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때로 하나님은 이해할 수 없는 상황, 도저히 순종할 수 없는 명령을 주신다”

창세기 21장은 아브라함의 모든 문제가 말끔히 해결되는 장이다. 아들이 태어났고(1-7), 가족에 불화를 가져온 하갈과 이스마엘을 정리했다(8-21). 아비멜렉과 아브라함 사이에 언약을 세워 처음으로 하나님 명하신 땅에 아브라함 소유의 우물이 생겼다(22-34). 정착지가 생겼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그를 처음 불러내실 때 약속하셨던 땅과 자손과 복이 아브라함에게 마침내 성취되는 시점이다. 이제는 ‘그 후로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로 끝나면 좋을 텐데, 22장이 시작되자마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도저히 순종할 수 없는 명령을 주셨다. 도대체 왜?

하나님은 자식을 제물로 바치는 것을 미워하신다(레 18:21). 그런 자가 있다면 반드시 돌로 쳐서 죽이라고 명령하셨다(레 20:2-5).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은 하나님의 속성과 뜻에도 맞지 않는 요구였다는 말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명령은 아주 명확했다. “네 아들”, 이스마엘이 아니라 “독자 이삭”을 데리고 하나님이 정하신 장소 “모리아 땅”, “내게 네게 일러 준 한 산”(더 구체적인 장소) 거기서 “번제로 드리라”고 바칠 대상과 정확한 장소, 바치는 방법을 절대 오해할 수 없도록 분명히 말씀해주셨다.

코로나 19로 많은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겪고 있다. 대다수의 사람이 일상에 제한을 받고 경제적인 압박을 받고 있다. 더 심각한 상황을 경험하는 이들도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질병에 걸리거나 세상을 떠나 슬픔과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이 있다. 하나님은 왜 이런 상황을 주시는가? 물론 질병과 죽음은 아담의 죄가 불러들인 결과이지 하나님의 창조물이 아니다. 하지만 모든 상황을 통제하고 계신 하나님의 허락 없이 우리에게 주어질 수 없는 일임이 틀림없다. 그래서 의문이 생긴다. 하나님은 왜 이해할 수 없는 이 상황을 우리에게 허락하시는가? 이런 상황 속에서도 우리에게 하나님과 이웃을 전심으로 사랑할 것을 명령하고 계시지 않는가?

아브라함이 코로나를 겪는 우리에게 한마디 한다면 그는 “때로 하나님은 이해할 수 없는 상황, 도저히 순종할 수 없는 명령을 주신다”고 말할 것이다. 그가 직접 경험해봤으니 말이다.

”먼저 하나님의 명령에 전심으로 순종하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명령을 잘 살펴보면 ‘때’에 대한 내용이 없다. 하나님은 언제 이삭을 바쳐야 할지 말씀하지 않으셨다. 적어도 성경엔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새벽부터 부지런히 움직인다. 솔직히 이해되지 않는다. 아들을 바치는 일이 기쁘고 즐거운 일인가? 늑장을 부리고 최대한 미뤄야 할 것 같은데, 그는 동틀 때부터(“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철저한 준비를 한다.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갔다(창 22:3).

오래 타고 갈 나귀의 등에 지운 안장, 길의 위험, 강의 위험, 도적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종들, 제물 이삭, 제물 바칠 때 필요한 장작은 직접 쪼개어 준비하는 등 일사천리로 척척 준비를 마친 아브라함은 지체하지 않고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 모리아 땅을 향해 길을 떠났다. 순종하는 데 방해가 되는 요소를(다른 말로 순종할 수 없었다고 핑계 댈만한 것들을) 모두 제거하고 전심으로 순종하는 데 나아갔다.

브엘세바는 해발이 낮은 평지이고 모리아 땅은 지금 예루살렘 부근으로 고지대이다. 이동하는 데 보통 3일이 걸리는데, 실제로 아브라함과 무리는 사흘을 걷다가 마침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곳 가까이 이르렀다. “제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4절).

바로 이때 아브라함은 동행했던 두 종을 멀리 떼어 놓고 오직 이삭과 함께 이동하기 원했다(5절). 왜 그랬을까? 확실한 건 두 종 앞에서 아들을 죽이려고 한다면, 결코 그 종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을 거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최종 장소까지 이동하는 길 중간에 번제 나무를 지고 가던 이삭이 아브라함에게 물었다. “내 아버지여.”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은 아버지의 마음을 찔러 눈물이 흘러나올 만큼 대답하기 힘든 질문을 했다.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광야에서 번제에 필요한 나무를 구하기 힘드니 장작을 준비해 가져온 아버지라면, 번제로 바칠 양 또한 광야에서 찾기 어렵다는 걸 아시지 않았을까?’ ‘왜 준비하지 않으셨을까?’ 이삭이 충분히 던질 수 있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그 답을 아는 아브라함으로서는 대답하기 무척 곤란스러운 질문이었다. ‘네가 바로 하나님께 드릴 어린 양이다’라고 어떻게 답하겠는가?

아브라함은 지혜로운 답변을 찾아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8절). 아브라함은 몰랐겠지만 실제로 하나님은 자기를 위하여 친히 양을 준비하고 계셨다.

아브라함은 아무것도 없던 광야에 돌단을 쌓았다. 손이 많이 가고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지만 그는 직접 아들을 바칠 제단을 만들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아들을 잡아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 자기 아들의 목에 칼을 대었다(10절).

이해할 수 없는 상황 가운데, 도저히 순종할 수 없는 명령을 받은 아브라함은 즉각적으로 철저하게 그리고 기꺼이 순종하였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일까? 그 대답을 듣기 전에, 먼저 우리는 아브라함이 우리에게 힘주어 전해줄 한마디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먼저 하나님의 명령에 전심으로 순종하라”는 말이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이런 상황 가운데 도저히 순종하기 어려운 명령을 믿음으로 순종했다면 코로나 19로 이해할 수 없는 상황 가운데 있는 우리 역시 순종할 수 있다(약 2:21-24).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곧 우리의 하나님이시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그 하나님을 신뢰했다면, 우리 역시 믿음으로 하나님을 믿고 그분이 주신 명령에 먼저 순종할 수 있다. 그러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진다. 그것이 무엇인가?

”그러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불러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실 때부터 계속해서 그에게 일방적인 축복을 약속하셨다. 많은 민족과 약속된 땅 그리고 아브라함을 통해 모든 민족에게 흘러갈 복.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약속의 의미를 생각해보면,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축복은 아브라함을 통하여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까지 흘러온다.

아브라함은 완벽한 축복의 통로는 아니었다. 두 번이나 아내를 누이라 속였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해 하갈을 부인으로 삼아 자기가 원하는 약속의 자손을 만들어냈다(그 전에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삼기도 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버리지 않으셨다. 끝까지 그에게 찾아와 변함없는 약속을 하시고 그 약속의 증표로 할례를 통해 약속을 기억하게 하셨다. 그리고 마침내 약속을 이루셨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위하여 숫양을 준비해두셨다. 이삭을 바치려는 그 순간 아브라함의 행동을 막으시고 말씀하셨다.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까지 아니하셨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 22:12). 그리고 다시 한번 선하신 약속을 확증하셨다.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창 22:17-18).

하나님은 도저히 순종할 수 없을 것 같은 하나님의 명령에 믿음으로 순종한 아브라함을 통해, 그의 씨를 통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언약대로 만민에게 복을 내려주셨다. 아브라함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마 1:1).

오늘날 예루살렘 땅, 과거 모리아 땅에 이천 년 전 아브라함이 독자의 손을 붙들고 제단을 향해 올랐던 것처럼, 한 아버지와 그의 독생자가 함께 제단을 향해 올라갔다. 이삭과 달리 이 아들은 아버지께 번제로 바칠 양이 어디 있냐고 묻지 않았다. 자신이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신 ‘하나님의 어린양’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들은 아버지께 간절히 부르짖었다. ‘아버지여, 다른 양은 없습니까? 번제로 바쳐지는 이 일을 제게서 옮기시면 안 되겠습니까?’(마 26:39; 히 5:7).

하지만 아들은 아버지를 너무나 믿고 사랑하여 아버지의 뜻대로 제단에 스스로 올라갔다. 그리고 자기 목숨을 내어줌으로 아버지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언약을 이루셨다. 아브라함의 씨,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앞에 번제로 드려짐으로 마땅히 죽어야 할 죄인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구원을 얻게 되었다. 땅에 있는 모든 민족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았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아브라함이 예수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다면(요 8:56), 그는 새 언약이 확실히 선포된 오늘날 우리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정말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

지금 우리 눈에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보이지 않을 수 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중에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 하나님의 변함없는 뜻은 도저히 순종하기 어려운 명령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믿음으로 순종하라.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2)

우리에겐 아브라함의 믿음, 그의 인생 가운데 언제나 신실하시고 변함없는 언약으로 사랑을 베푸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곧 우리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