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에게 예수님은 희생적이고 헌신적이며 이타적인 사랑의 대명사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지금 코로나를 겪는 우리에게 오셔서 한마디 하신다면, 말보다 먼저 눈물을 흘리며 우는 자와 함께 울어주실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어떤 사람에게 예수님은 부활하여 아버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만물을 다스리시는 권세를 가진 분이다. 예수님도 직접 말씀하지 않으셨는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 28:18). 그래서 만일 그분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가 겪고 있는 환경을 바라보신다면 아무런 능력이 없는 자처럼 울고만 계시진 않으리라 생각한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사랑과 능력을 양팔 저울 양쪽 끝에 두고 고통의 문제를 균형 있게 이해하려 한다. 우주에서 가장 사랑이 풍성한 분이 예수님이라면 왜 지금의 고통을 두고 보시는가? 혹시 능력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닌가? 반대로 능력이 무궁하여 못 하는 일이 없으시다면 왜 지금의 고통에 즉시 개입하지 않으시는가? 혹시 사랑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닌가? 예수님의 능력과 사랑을 동시에 인정하려면, 지금의 고통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이 칼럼 시리즈를 통해 우리는 아담에서 시작하여 노아, 아브라함, 모세, 다윗 그리고 마지막 예수 그리스도까지 하나님께서 언약을 맺으신 언약의 당사자들이 각각 자기 시대에 경험한 하나님과 하나님의 큰 은혜를 오늘날 그리스도를 통해 새 언약을 맺은 성도에게 어떤 관점으로 전달해줄 수 있을지 상상해보고 있다. 특별히 하나님이 아담부터 다윗까지 맺으신 언약은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온전히 성취되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정확히 말하면 언약의 당사자가 아니라 히브리서 기자가 말한 것처럼 “새 언약의 중보자”이시다(히 7:22; 8:6; 9:15; 12:24). 그리스도의 영원한 언약의 피로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은혜로 백성을 삼으신 이들 사이에 그동안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체결하신 은혜 언약의 최종본, 완성본이 영원히 주어진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왜 이렇게 고통스러운 것인가?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행 1:7)

고통이 완전히 사라지는 때가 있다. 새 언약의 중보자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이다. 그때 우리는 언약의 은혜를 온전히 그리고 영원히 누릴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already) 새 언약의 백성이 되었지만, “아직”(“but not yet”) 새 언약의 온전한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주의 날이 오기 전까지 모두가 고통을 겪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땅의 고통에 눈 감고 계시지 않는다. 다만 고통이 모두 사라지는 그날이 아직 오지 않은 것뿐이다.

부활하신 예수님 곁에서 제자들은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을 꿈꿨다. 예수님이 왕으로 다스리시는 온전한 나라가 속히 도래할 것이라 기대했다. 그래서 그때가 바로 지금이냐고 물었다(행 1:6). 하지만 예수님은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제자들은 그때를 기다리며 땅에서 고통받는 것을 기쁨으로 감당했다. 그냥 버티고 기다리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라고 말씀하신 주님은 바로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주의 날을 기다리는 동안 제자들이 해야 할 일이 분명했다.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의 증인이 되는 것이다(눅 24:47).

우리는 “왜” 지금 겪고 있는 질병과 여러 가지 어려움을 받게 하시는지 그 이유를 다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왜” 이 모든 고통의 문제가 해결되는 주의 날이 아직인지는 알 수 있다. 아버지는 지금 아들을 통해 영원한 멸망에 처한 이들을 구원하기 원하신다. 새 언약의 백성인 당신을 통해서.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

예수님은 빌라도의 손에 죽은 유대인 희생자에 대한 소식과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명의 사고 소식을 어떻게 생각하시냐는 질문에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라고 말씀하셨다(눅 13:1-5). 억울하게 죽은 사람을 위해 먼저 우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죽은 자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당하는 악에 의한 고통 혹은 사고에 의한 고통을 통해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아버지의 뜻을 선포하셨다는 것이다.

이 땅에서 당하는 고통은 죄인이 당할 영원한 고통을 알리는 경고음과 같다. 이 땅에서 우리는 몸을 죽이고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를 끊는 고통을 받지만, 장차 올 고통은 몸을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고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를 영원히 끊는 고통이다. 이 땅에 아무런 고통이 없다면 누가 영원한 고통을 두려워하고 피하려 하겠는가? 죄의 결과 인류에게 일어난 질병과 갈등과 죽음은 죄의 마지막 열매인 사망(멸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새 언약의 백성은 영원한 고통으로부터 해방된 은혜의 약속을 받은 자로서 아직 아버지가 정하신 때와 시기가 이르지 않은 이때 새 언약의 중보자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것처럼 그리고 직접 명령하신 것처럼 이 땅에서 고통받는 이들에게 회개하여 멸망에 이르지 말라고 권면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마음 그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을 입고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메시지를 전파해야 한다. 아담부터 그리스도까지 하나님이 참으로 오랜 세월 인내하사 하늘과 땅,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을 보호하시고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이유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직” 기회가 있을 때, 천국이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라고 선포하자.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그분의 마음을 품고 그분의 일을 하라고 권하신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코로나 시대 고통받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말을 어려워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나님과 팬데믹”을 쓴 톰 라이트(비아토르, 2020)는 지금 교회가 해야 할 일은 복음 전도보다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능력을 말과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 즉 고통 가운데 들어가 그들에게 실질적인 도움과 위로를 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보통 말하는 ‘전도’는 울리는 꽹과리가 될 수 있고 ‘전도자’는 복음을 끼워파는 기회주의자처럼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하루는 공원을 걷고 있는데, 교회에서 단체로 나와 찬양을 부르고 있었다. 그러다가 한 여성이 큰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열심히 운동해도 영생을 준비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영원한 심판을 맛볼 것입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마음에 잘 와닿는 말도 아니었다.

불특정 다수에게 모르는 사람이 그들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무작정 선포하는 전도가 효과가 거의 없다는 말은 일리가 있다. 그런 측면에서 라이트의 말처럼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돌보고 사랑하고 필요를 공급하는 것은 그들과 어느 정도 관계를 맺고 그리스도의 사랑과 하나님의 선을 경험하게 하며 복음을 들을 준비를 하도록 하는 데 도움이 된다.

하지만 동시에 구제 활동은 전도 활동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걸 알아야 한다. 교회의 구제 활동은 전도 활동과 별개가 아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를 먹이시고 병든 자를 고쳐주셨지만, 그때마다 모든 표적이 가리키는 것은 그들을 아버지 하나님께로 인도할 자 그리스도 자신이셨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은 그들이 먹을 양식에 관심을 두고 먹이셨지만, 영원한 생명의 양식인 자신을 먹이기 위해 그 일을 하셨다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정말로 많은 사람들)이 먹는 빵에만 관심이 있고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께 관심이 없었다(요 6).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버지 하나님께서 자기 권한에 두신 그때가 이르기 전까지 맡겨진 사명 곧 그리스도의 증인 되는 일을 새 언약의 백성은 어떻게 감당해야 할까?

우리에겐 자신을 아는 지혜와 청중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아니다.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은사가 모두에게 있는 건 아니다. 우리는 예수님도 아니다. 수많은 무리가 우리에게 몰려들지도 않고 그들에게 초자연적인 기사와 표적을 보여줄 능력도 우리에게 없다.

예수님 당시 청중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믿고 그분이 주신 율법을 따르며 선자자의 예언대로 오실 메시아를 기다리던 유대인이었다. 사도들의 전도사역 역시 먼저는 유대인을 향했다. 우리의 청중은 다르다.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고 성경은 오래된 경전이라고 보며 메시아에 관하여 궁금해하거나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허락하신 은사와 능력을 가지고 먼저 내가 맺고 있는 관계 속에서 그리스도를 나타내야 한다. 복음의 공식을 외워 전달하는 데 주안점을 두지 말고, 전도의 대상이 겪는 고통과 슬픔의 문제 곧 하나님 없는 그들 인생의 공허함을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언제나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를 베풀면서 상대방이 물을 때 혹은 그와 같은 기회를 얻었을 때 준비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잘 설명해 줘야 한다. 어떤 질문이든지 성경으로 답할 준비를 해야 한다.

죽은 나사로 앞에서 울고 있는 누이들에게 예수님께서 그들의 고통을 분히 여기시고 눈물로 공감하시면서 동시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라고 선포하셨던 것처럼, 코로나 시대 건강과 경제와 여러 가지 어려움으로 고통받는 이웃, 가족, 친척을 불쌍히 여기고 죄의 저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인생의 유약함을 분히 여기며, 최악의 저주인 사망에서 벗어나 아버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계속해서 그들에게 소개해야 한다.

가장 강력한 복음 선포의 삶은 그리스도로 인하여 최고의 만족과 기쁨을 누리는 삶이다.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맺은 새 언약의 백성이 그리스도 안에서 얼마나 큰 기쁨을 누리는지. 유일한 길인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로 온 자, 하나님의 백성이 된 자, 하나님과 화목을 누리며 영원한 생명을 얻은 자가 얼마나 만족스러운 삶을 사는지. 세상에서 어떤 환난을 당해도 그 만족과 기쁨을 빼앗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삶으로 그리스도를 증언하라. 예수님이 오늘날 우리에게 한마디 하신다면,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 너희가 우리 안에 있는 그 기쁨을 서로 하나가 되어 세상에 나타내라고 말씀하실 것이다(요 17:1).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누가 코로나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누가 코로나로 인해 겪는 해고나 경제적인 어려움을 염려하지 않을 수 있을까? 바로 새 언약의 백성이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우리가 환난을 당할 것이라고 예고하셨다. 그리스도께 속한 자는 세상의 미움을 받는다(요 15:19). 땅에 내려진 죄의 저주는 우리를 피하여 믿지 않는 자에게만 내려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두렵지 않다. 담대하다. 그리스도께서 최종 승리를 외치시고 사망과 음부까지 불못에 던져 넣으신 후 영원히 다스리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 땅에서 당하는 고난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함께 받을 우리가 기쁨으로 참여하는 것이며, 때론 사랑 많은 아버지께서 우리를 연단하사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게 하시려고 사랑으로 주는 징계이기도 하다(롬 8:17; 히 12).

예수님이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실제로 그분은 함께 하신다!),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실 것이다. 염려하지 말라고 하실 것이다. 담대하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그러니 질병을 예방하고 두려워하는 이웃에게 위협이 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은 좋지만, 지나치게 두려워하지 말라. 마치 병에 걸리면 모든 것이 끝나버릴 것처럼, 경제적인 타격을 받으면, 관계적인 어려움을 겪으면 패배하는 것처럼 움츠러들고 낙심하고 주눅들지 말라. 오히려 담대하라! 누군가가 말한 것처럼 코로나는 하나님의 책에 기록된 당신의 날을 하루도 줄일 수 없을 것이며, 수고와 슬픔이 가득한 이 세상도 당신을 이길 수 없다. 그 무엇도 당신을 하나님의 사랑에서 결코 끊을 수 없다. 새 언약의 중보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