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ST시리즈 주석 가운데 골로새서와 빌레몬서를 쓴 딕 루카스는 이렇게 말했다.

바울이 행한 사역의 목적은 사람들을 그리스도 안에 지금 자유케 하는 것이었으며, 그가 노예제가 폐지될 때가 다가오고 있다고 꿈꾸고 있었는지는 의심스럽다. 하지만 실제로 노예제 폐지라는 일이 일어났을 때, 승리를 거둔 것은 그가 만든 무기였다. 그는 얼마나 대단한 은인이었는지!(224페이지)

루카스는 바울이 만든 “무기”가 노예제 폐지를 만들어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바울이 그것을 기대하거나 의도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이것이 무슨 의미일까? 성경은 노예제도 폐지를 요구하는가 아니면 노예제도를 지지하는가?

1. 성경이 말하는 평등: “주 안에서”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네가 자유롭게 될 수 있거든 그것을 이용하라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요 또 그와 같이 자유인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형제들아 너희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고전 7:20-24)

사도 바울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고린도 교회에 편지하면서,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고 명령했다. 이 “부르심”은 곧이어 나오는 “자유인”과 “종”의 신분을 가리킨다. 이 편지를 듣고 있는 성도가 “종”이라면 그는 염려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그의 신분이 “종”이라도 주님 안에서는 “자유인”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바울은 “주께 속한 자유인”이라고 했다.

만일 “자유인”이라면 그는 종에 대하여 우월감을 가지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도 그리스도 안에서는 “종”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를 “그리스도의 종”이라 불렀다. 바울이 의도적으로 “종”에게는 “자유인”이라는 명칭을, “자유인”에게는 “종”이란 명칭을 붙이는 데는 분명한 목적이 있다. 둘 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평등하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바울은 더욱 명확하게 갈라디아서 3장 28절에 “종이나 자유인이나…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라고 말했다.

골로새에 쓴 편지에서 바울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종들에게 이렇게 명령한다.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골 3:22). 이 명령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골 3:24).

주인에게 준 명령은 다음과 같다. “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지니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지어다”(골 4:1). 종과 주인이 각각 자기의 부르심에 충성을 다하며 동시에 상대방에게 선을 베풀어야 하는 이유는 둘 다 그리스도 예수를 주인 혹은 상전으로 삼고 그분을 섬기고 있기 때문이다. “주 안에서” 그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종이다.

성경에는 주 안에서 한 형제가 된 빌레몬(주인)과 오네시모(종)가 기록되어 있다. 바울은 주인에게서 도망친 무익한 종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몬 1:16).

그리스도 안에서 주인과 종의 관계가 사라진다. 둘 다 그리스도의 종이며, 둘 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인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종이 아니라 종 이상이다. 이제는 주 안에서 사랑하는 형제다.

그런데, 왜 바울은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보내면서 자유롭게 해달라고 요청해야만 했을까? 처음에 인용한 고린도전서 말씀에서 바울이 “네가 자유롭게 될 수 있거든 그것을 이용하라”고 말한 것을 기억하라. 이 말씀은 종이 스스로 자유를 쟁취하고 그것을 위해 투쟁하라는 의미로 볼 수 없는 것인가? 성경은 노예가 자유를 얻는 것에 대해 무엇을 말하는가?

2. 성경이 말하는 자유: “주 안에서”

바울은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자유롭게 해달라고 요구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 것도 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 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라(몬 1:14)

오 형제여 나로 주 안에서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게 하고 내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하게 하라(몬 1:20)

바울은 사도로서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특별히 빌레몬은 바울에게 많은 빚을 진 상태였다(아마도 복음의 빚, “네 자신이 내게 빚진 것은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라”, 몬 1:19).

그런데도 바울은 “오네시모에게 자유를 줘라”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오히려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 것도 하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노예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 “선한 일”이지만 억지가 아니라 자의로 되게 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바울은 빌레몬이 그렇게 한다면 “주 안에서” 기뻐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을 얻을 것이라고 말한다.

바로 이것이 노예가 자유를 얻는 가장 아름답고 합당한 방법이다. 바로 이런 의미로 바울은 “자유롭게 될 수 있거든 그것을 이용하라”고 말한 것이다. 노예가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무력투쟁하거나 주인을 해치라고 말한 것이 아니다. 주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노예에게 자유를 준다면 그것을 이용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노예제도를 폐지하는 데 영향을 준 것이 있다면, 앞에서 딕 루카스가 말한 “무기”가 있다면 그것은 체제의 전복이나 투쟁이 아니라 지배계급에게 만물의 주인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무엇이 합당한지 지속적으로 가르치고 그들의 양심에 피지배 계급으로 일하는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라는 사실을 계속해서 주지시키는 것이다. 진리의 말씀이 강조하는 평등과 자유가 현실의 불평등과 구속 안에서 실천되도록 하는 것이다.

빌레몬과 같은 주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무엇이 선한 것인지 계속해서 생각해야 한다. 무엇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가 된 사랑하는 종에게 가장 필요한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자유”라면 당시 사회에서 자기의 소유물과 자산과 같은 종일지라도 기쁨으로 자유를 선사해야 한다. 억지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말이다.

실제로 노예제 폐지라는 일이 일어났을 때, 승리를 거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평등과 자유 그리고 사랑의 힘 때문이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지배계급 사람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가 평등하다는 사실을 밝히 깨닫게 해주었고, 결국엔 피지배계급 사람들에게 자유를 선사했다.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보라. 노예가 투쟁하고 무력으로 자유를 쟁취하려 했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아마도 더 큰 권력과 힘을 가지고 있는 지배계급으로부터 무차별적인 학살을 당했을 것이다. 혹시 체제가 뒤바꾸는 데 성공했다 하더라도 노예 제도가 사라지기는커녕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으로, 피지배계급이 지배계급으로 뒤바뀔 뿐 평등과 자유는 주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도리어 더 큰 보복만 낳았을 것이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명령한 것을 기억하라. “믿는 상전이 있는 자들은 그 상전을 형제라고 가볍게 여기지 말고 더 잘 섬기게 하라”(딤전 6:2).

3. 성경이 말하는 원리: “주 안에서”

그런 면에서 바울이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형제들아 너희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라고 말한 것의 의미가 분명해진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값으로 사셨다고 말한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 관한 이야기다. 그들은 ‘자유인’이든 ‘종’이든 모두 그리스도의 것이 되었다. 그러므로 사람의 종이 되지 말아야 한다. 이 말은 오네시모처럼 주인에게서 도망쳐 나오라는 말이 아니다. 바로 이어지는 말씀, “너희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고 말한 것을 보면, 사람의 종으로 일하고 있지만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그리스도를 위해 일하라는 말이다.

바울이 골로새 성도들에게 명령한 것처럼 그들은 “주 그리스도를 섬기”고 있다.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것이다(골 3:24). 그러므로 그들은 육신의 상전을 대할 때 “그리스도께 하듯” 해야 한다(엡 6:5).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아야 한다(엡 6:6-7). “종이나 자유인이나 주께로부터 그대로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엡 6:8).

주인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하늘에 계신 상전을 생각하며 종에게 선을 행해야 한다.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어야 한다(골 4:1). 만일 그 “의와 공평” 그리고 “선”이 종에게 자유를 허락하는 것이라면 그것까지 하늘에 계신 상전을 생각하며 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바울 당시에는 주인의 집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물질의 필요를 공급받는 종들도 많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 경우 주인이 종에게 주는 자유는 노동에서의 자유라기보다는 주인에게 예속되고 구속되는 삶에서의 자유이었을 것이다. 여러 가지 불평등이나 불합리한 처사로부터의 자유였을 것이다.

결국 성령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 자유인이든 종이든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그리스도 앞에서 서로에게 선을 행할 것을 명령하셨다. 각각의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삶을 살라고 요구하셨다.

주인에게 있어서 이는 종에게 의와 공평으로 대하는 것이며 나아가 자유를 허락하는 것이 될 수도 있고, 종에게 있어서는 주인이 선사하는 자유를 이용하거나 그렇지 않은 경우엔 주인에게(까다로운 주인이라도, 그리스도를 두려워함으로, 벧전 2:18) 선을 행하는 것이다. 종이 행하는 선은 주인에게 충성을 다하는 것이다. 주인이 볼 때만 그리하는 것이 아니라 참 주인이신 하나님 앞에서 언제든지 충성하는 것이다.

결론

다시 어려운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성경은 노예제도를 폐지하라고 요청하는가? 혹은 반대로 노에제도를 지지하는가?

대답은 이렇다. 성경은 노예제도를 지지하지 않는다. 또한 성경은 노예제도를 폐지하라고 명령하지도 않는다. 성경은 더 깊은 차원에서 주인과 종에게 요구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과 종 위에 계신 ‘머리’이자 ‘왕’으로 두라고 명령한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요구하시는 선을 각자에게 행하라고 명령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풍성히 누리는 자유와 평등을 서로에게 베풀라고 요구한다. 각각 자기의 부르심 안에서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충성을 다하라고 요구한다. 모든 심판과 보상은 ‘머리’ 되신 예수께서 하실 것이라고 분명하게 선포한다. 바로 이 깊은 차원의 ‘무기’가 억압과 불평등으로 점철된 노예제도를 무너뜨린 것이다. 결국 그리스도께서 정의와 공의를 세우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