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성향에 따라 같은 사건을 두고 보도하는 것이 180도 다르다.
최근에 세월호가 침몰하는 동안 박근혜 전 대통령이 무엇을 했는지 검찰 수사 결과가 나왔는데, 한림대 국제대학원대학교 정관용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경향신문이 6건, 한국일보 4건, 한겨레와 동아일보가 각각 3건 이 사건을 보도했지만, 조선일보와 중앙일보는 각각 2건과 1건을 보도했다. 타사는 모두 1면에서 다뤘고, 조선일보는 10면, 중앙일보는 14면에 다뤘다. 보도 비중에 차이가 있다는 말이다(보도기사: http://www.nocutnews.co.kr/news/4947045).
보도 내용에도 차이가 있다. 경향신문에서는 “진실 드러나는 ‘세월호 7시간”이라는 제목으로 “박근혜 전 대통령의 행적에 대한 당시 청와대의 해명은 상당 부분 ‘거짓말’인 것으로 드러난다”고 보도했다. 제목에는 “각본 짜놓고 입 맞췄다”, “조작”이라는 자극적인 표현이 들어 있었다(보도기사: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03282149005&code=940301).
조선일보는 “밀회, 보톡스, 굿…’세월호 7시간’ 괴담에 문 정부 검찰도 ‘실체 없다’”라는 제목으로 “세월호 침몰 사고가 일어난 날 박근혜 대통령의 행적을 둘러싼 이른바 ‘세월호 7시간’ 의혹은 결국 실체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라고 보도했다(보도기사: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3/28/2018032802648.html).
정치적 성향에 따라 입장도 달라진다. 민주당은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은폐하려는 목적이 이제야 드러났다고 말하며 분노했고, 심지어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지 못한 “부작위에 의한 살인행위”라고 말했다. 한국당은 세월호 7시간에 대한 각종 의혹이 거짓으로 드러난 것이라며, 전 대통령이 불쌍하다고 말했다(참고기사: http://www.newsis.com/view/?id=NISX20180328\_0000265978&cID=10301&pID=10300).
아놀드 클링은 그의 책 “The Three Languages of Politics”에서 유명한 신문사, 칼럼니스트, 라디오 토크쇼 호스트, 블로거, 케이블 TV, 소셜미디어에서 정치를 다루는 방법이 이와 같다고 지적한다. 그들은 자기가 지지하지 않는 혹은 자기와 의견이 다른 쪽에 가능한 최대의 불공정한 관점으로 사건을 보도한다. 그들을 지지하는 계층으로부터 전폭적인 지지와 신뢰를 얻지만, 정치적 이슈를 공정하게 다루고 모두와 소통하는 일에는 취약하다. 이런 편향된 보도 성향은 지지자들까지 같은 방식으로 정치적 이슈를 판단하고 말하게 한다.
이런 보도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상대방의 의견 중 가장 취약하다고 여겨지는 부분을 집중적으로 공략한다. 그 부분을 맹렬히 공격한 뒤 상대편의 모든 논점이 그 취약한 부분에 달린 것처럼 만들어 버린다. 결국, 그 취약점 하나로 모든 논점이 비이성적으로 들리게 만드는 것이다. 상대방이 말한 것 중 일리 있거나 칭찬할 만한 점은 거의 다루지 않는다.
문제는 정치에 관심이 있는 크리스천 역시 이렇게 편향된 보도를 들을 뿐만 아니라, 자기가 선호하는 쪽에서만 듣는다는 것이다. 혹 다른 쪽의 관점을 듣는다 해도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지 들어보기 위함이 아니라 약한 점을 찾아 공격하기 위함이다. 이러니 정치적 이슈를 논의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내가 이미 내리고 있는 결론을 가지고 그 결론을 지지하는 보도만 선별적으로 듣고,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과 대화할 생각을 하지 않고 논의를 시작하니, 좋은 결론을 맺을 가능성이 희박한 것이다.
예를 들어, 박근혜 전 대통령의 ‘세월호 7시간’을 다룬 기사를 보면서 중앙일보와 조선일보가 말한 대로 여러 의혹의 부당함을 깊이 생각한 사람은 두 신문 기사를 보면서 자기 생각이 옳다고 여긴다. 다른 신문을 읽어도 그들은 논점에서 벗어났다고 본다. 청와대에서 보고한 내용과 사실이 약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 시간에 굿을 하거나, 밀회하거나, 성형수술 같은 일을 한 것이 아니다. 반대편에서 들고나온 여러 의혹이 다 거짓임이 밝혀졌으니, 의혹을 제기한 쪽에서 정중한 사과를 해야 한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 사람은 한겨레와 다른 신문을 보면서 세월호 7시간에 대한 청와대의 보고가 사실과 다르다는 점에 집중한다. 여러 의혹이 거짓으로 밝혀진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그러니 조선일보와 중앙일보는 박근혜 전 대통령을 옹호하기 위해 본질을 흐린 보도를 하고 있다고 본다. 중요한 것은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다. 그 중요한 골든타임에 자기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여러 의혹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드러났지만 자기 책임을 다하지 못한 책임을 져야 한다.
위와 같은 사고를 하는 양쪽의 사람이 나와 논의를 한다면, 서로 자기가 옳고 다른 사람의 주장은 지극히 비이성적이라고 말할 것이 뻔하다. 아무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볼 생각을 하지 않고, 자기 생각만 상대방에게 주입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사실상 우리가 정치를 논할 때, 우리는 상대방이 내가 가진 생각을 이해하고 수용하기를 기대한다. 클링은 하지만, 그러려면 먼저 다음과 같은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Seek first to understand, then to be understood
먼저 이해하려고 하라, 그리고 나서 이해받기를 기대하라
우리는 상대방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열린 마음(open mind)으로 들어야 한다. 세월호 침몰이 사고라는 것이 지금까지 드러난 객관적 사실이라면, 그 사고에 합당한 대응을 하지 못한 점을 아쉬워하고 그것을 문제로 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여러 의혹이 거짓으로 드러난 결과에 대해 상대방이 왜 억울해하는지 이해해야 한다. 무조건 전 대통령 감싸기나 광신도적인 지지라고 몰아세워서는 안 된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 7:12)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다.
자기 관점을 지지하는 정보만 선별적으로 듣고 자기 관점에서만 말하는 사람을 누가 좋아하겠는가? 다른 사람의 생각을 충분히 들어보지도 않고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 다른 사람의 의견을 무조건 비이성적인 것으로 판단하는 사람과 무슨 논의가 가능하겠는가?
내 생각에 완전히 동의하진 않더라도 적어도 내가 무슨 근거와 논점으로 판단을 내리고 의견을 제시하는지 객관적으로 들어주기를 우리는 기대한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렇게 상대방의 의견을 들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상대방이 말하는 것의 가장 취약한 점만 꼬집어 상대방의 의견 전체를 묵살하고, 또 그렇게 보도하는 매체만 선택적으로 듣고, 상대방이 말하는 것의 일리있는 부분을 전혀 듣지 아니하려고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특히 그리스도인이 정치를 논할 때 꼭 기억해야 할 부분이다.
첫째, 다양한 보도를 접하라. 내가 선호하는 매체만 선별해서 듣지 말라. 대중매체가 내 생각을 장악하여 유연한 사고를 할 수 없도록 만드는 일을 허용하지 말라.
송사에서는 먼저 온 사람의 말이 바른 것 같으나 그의 상대자가 와서 밝히느니라(잠 18:17)
둘째, 무분별하게 수용하지 말라. 분석적으로 들어라. 보도가 양 진영을 객관적으로 공정하게 다루고 있는가? 사실의 전부를 균형 있게 전달하는가? 의도적인 목적을 가지고 편향된 태도로 말하고 있지 않은가? 생각보다 많은 매체가 편향된 보도를 한다.
속이는 저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 공평한 추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잠 11:1)
셋째, 내 관점과 판단을 잠시 내려두고 철저히 상대방 입장에서 들으라. 상대방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는 무엇인가? 상대방의 논점 중 일리가 있고 생각해볼 만한 부분은 무엇인가? 내 관점으로 봤을 때 보지 못했던 점은 무엇인가?
사연을 듣기 전에 대답하는 자는 미련하여 욕을 당하느니라(잠 18:13)
넷째, 논의의 목적을 잊지 말라. 정치를 논할 때도 우리는 서로의 유익을 구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높은 곳에 둔다. 정부를 위해 기도하고 성도를 세워주는 일이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궁극적인 목적이다. 내 관점으로 상대방을 논리적으로 눌러 이기는 것이 최종 목적이 아니다.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상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잠 22:4)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세상 매체가 정치를 논할 때와 그리스도인이 정치를 논할 때는 달라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겸손과 온유로 옷 입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다. 섬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러 오신 예수님의 제자들이다. 이 땅이 아니라 하늘나라의 왕이신 하나님의 백성이다.
그렇다면 그와 같은 정체성 안에서 많은 공통점을 가진 우리가 지금 현재 살고 있는 세상의 정치를 논할 때 우리 왕의 온유와 겸손을 가지고 우리 왕이 섬기신 모습대로 서로를 이해하고 들어야 하지 않을까? 이 나라와 이 나라 백성이 말하는 의를 좇는 것이 아니라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그의 나라 백성으로서 정치를 논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