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그리스도인이 불교 신자와 구원의 길을 논한다면, 논의에 필요한 예를 갖추는 것은 당연하지만 자기 세계관을 버리면서까지 상대방의 논점을 수용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가령 불교에서 인간의 문제는 욕심이며 그 욕심에서 벗어나 해탈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 구원이라고 말할 때 그리스도인은 그 말에 어느 정도 동의할 수 있다. 죄가 인간의 문제며, 죄에서 해방되는 것이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의 한 측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이 그렇게 말할 때는 불교가 범신론 혹은 실질적 무신론의 토대 위에 해탈을 논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기독교가 말하는 해방은 철처히 유신론의 토대 위에 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기 때문이다(롬 8:1-2).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기는 그리스도인의 세계관은 그리스도인이 속한 모든 실재에 관한 논의를 할 때 항상 그 근본 토대로 작용해야 한다. 프란시스 쉐퍼는 그의 책 “기독교 선언”에서 이를 분명하게 지적한다.

참된 영성은 실재의 모든 것을 포괄한다…참된 영성은 삶의 모든 부분을 포괄할 뿐만 아니라 삶의 다양한 모든 부분을 동등하게 포괄한다. 이런 의미에서 실재와 관련하여 영적이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프란시스 쉐퍼, “기독교 선언”, 생명의 말씀사, 1995, 17p).

하지만, 그리스도인이 정치를 논할 때 하나님은 마치 계시지 않는 존재로 취급되기 쉽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정치라는 실재는 하나님을 논외로 두고 이야기할 수 있다고 착각한다. 국가와 종교는 철저히 분리되어야 한다는 가정이 강하게 작용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특정 종교가 그 종교를 수용할지에 대한 개인의 자유를 통제해서는 안 된다. 그런 면에서 종교는 국가와 거리를 둬야 한다. 하지만 국가, 사회, 정치가 종교와 별개의 것이라고 극단적인 구분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성경이 이런 구분을 거부한다.

여호와 하나님은 애굽을 “내 백성”이라고 부르시고, 앗수르를 “내 손으로 지으셨다”고 말씀하셨다(사 19:25). 바울은 “모든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셨다고 선포했다(롬 13:1). 이 땅이 불타 없어지고 새롭게 창조된 세상에서 민족과 나라 개념이 완전히 사라진다고 생각하지 말라. 새 예루살렘에서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리라”(계 21:24).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간다(계 21:26).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 흐르는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 강 좌우에 생명 나무 잎사귀는 “만국을(the nations) 치료하기 위하여 있”다(계 22:2).

성경은 정치를 하나님과 억지로 구분하지 않는다. 오히려 모든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요, 모든 권세는 하나님의 권세며, 그렇기 때문에 정치에 관한 모든 논의는 반드시 하나님을 인정하는 토대 위에 해야 한다.

프란시스 쉐퍼는 이 개념을 미국 독립선언문에서 찾았다. 거기에는 이와 같은 문구가 들어 있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고, 창조주는 몇 개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했으며, 그 권리 중에는 생명과 자유와 행복의 추구가 있다. 이 권리를 확보하기 위하여 인류는 정부를 조직했으며, 이 정부의 정당한 권력은 인민의 동의로부터 유래하고 있는 것이다. 또 어떤 형태의 정부이든 이러한 목적을 파괴할 때에는 언제든지 정부를 개혁하거나 폐지하여 인민의 안전과 행복을 가장 효과적으로 가져올 수 있는, 그러한 원칙에 기초를 두고 그러한 형태로 기구를 갖춘 새로운 정부를 조직하는 것은 인민의 권리인 것이다…(제2장)

쉐퍼는 “양도할 수 없는 권리”의 근거가 어디에 있는지 묻는다. 그 근거는 바로 “창조주”에게 있다. 생명을 창조하는 분, 자유를 주시는 분, 행복을 정의하는 분이 계시기 때문에 이와 같은 권리를 절대로 양도할 수 없다. 창조주가 부여한 권리이기 때문이다. 만일 창조주가 없다면, 누가 무엇을 근거로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주장할 수 있을까?

오늘날 많은 정치적 사고의 바탕이 된 인본주의 사상에서 “양도할 수 없는 권리”는 다른 근거로 주장되고 있다. 인본주의란 사람을 중심에 두는 사상이다. 특성상 신본주의와 대립한다. 창조주를 중심에 두고 말하는 것이 신본주의라면 인본주의는 사람을 중심에 두고 말하는 사상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인본주의는 과학적, 합리적, 객관적 사실이 아니다. 인본주의는 신이 없다고 말하는 혹은 있어도 실질적으로 큰 상관이 없다고 말하는 하나의 신앙이다. 인본주의 사상을 가지고 주장하는 “양도할 수 없는 권리”는 철저히 인간이 부여하는 권리다. 더 높은 권위로부터 부여받은 권리가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주장하는 권리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낙태는 죄인가?

신본주의를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창조주에게서 찾는다. 하나님은 태아를 어떻게 보시는가? 모든 생명의 수여자, 공급자, 주권자이신 하나님은 무엇을 자유와 행복이라고 정의하시는가? 국가와 사회가 그 권리를 파괴하려고 하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창조주가 부여한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하는 국가로부터 되찾을 수 있을 것인가?

인본주의를 가진 사람은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사람에게 묻는다. 산모는 무엇을 가장 큰 자유와 행복으로 보는가? 태아에게 자유와 행복의 추구권이 있는가?(안타깝게도 태아는 대답할 수 없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산모와 태아의 행복과 자유 추구권에 같은 생각을 가지고 지지하고 있는가? 만일 이런 권리를 대항하여 목소리를 높이는 소수단체가 있다면(가령 기독교) 그 위협세력을 어떻게 압박할 것인가?

한 가지 더 예를 들어보자.

동성애는 죄인가?

그리스도인은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창조주에게서 찾는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어떻게 창조하셨는가? 하나님이 설계하신 가정의 원리는 무엇인가? 하나님이 허락하신 자유와 행복은 어떤 기준 안에서 주어졌는가? 만일 국가와 사회가 그 권리를 해체하려 한다면, 어떻게 그것에 반응할 것인가?

인본주의적 관점에서 동성애는 개인의 선택이다. 동성애 자체에 대한 가치 평가는 이루어질 수 없다. 그것을 결정하는 창조주의 존재를 무시하기 때문이다. 다만 사회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 여부를 사람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결정할 뿐이다. 더 많은 사람이 자유로워지고 행복해진다고 여겨지는 대로 국가가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주장한다.

 

신본주의와 인본주의의 관점은 정치적 성향을 초월한다. 당신은 진보적 성향을 갖고 있으면서 신본주의를 가지고 말할 수 있고, 보수적 성향을 가지고 있으면서 인본주의적 관점으로 말할 수 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그리스도인은 보수, 진보, 자유 등 다양한 정치적 선호도를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어떤 그리스도인도 인본주의를 정치적 관점으로 채택해서는 안 된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겠다고 선언한 하나님 나라 시민은 그 하나님이 부여하신 권세를 가지고 운영되는 이 땅의 정치를 논할 때 하나님을 바깥으로 몰아내고 사람을 중심으로 끌어올 수 없는 것이다.

종종 낙태와 동성애 이슈를 다룰 때, 개인의 행복과 자유를 사랑의 하나님이 보장한 가장 큰 권리로 보고 신본주의 관점을 비판하거나 소극적으로 수용하는 그리스도인을 본다. 낙태와 동성애를 죄로 규정하는 그리스도인을 무자비하고 편협한 사람으로 몰아세운다. 물론 태도와 전달의 문제가 있다. 앞서 말한 논의할 때 필요한 예의에 못 미치는 주장의 문제가 있다.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 인본주의 관점으로 이 실재를 바라보는 것의 문제가 훨씬 더 심각한 것이라는 것을 그들은 알아야 한다.

쉐퍼는 말한다.

인간의 존엄성 문제는 인격적이며 무한하신 하나님의 존재와 떨어질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 인격적이며 무한하신 하나님께서 자기의 형상에 따라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으므로, 그들은 인간으로서 독특한 생명의 존엄성을 갖고 있다. 인간의 생명은 존엄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국가나 인본주의에 근거한 법이, 현재 나타나고 있는 방식대로 인간의 생명을 자의적으로 빼앗을 어떤 권리나 권위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낙태와 같은 핵심 문제에서, 문제의 참된 본질이 이해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실제로 낙태가 훨씬 더 큰 문제의 한 징후이지, 단순히 지엽적이고 사소한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였다.

이 문제를 넘어서면, 물질-에너지-우연 이라는 인본주의적 세계관이 점점 더 미국을 장악함에 따라, 인간 생명의 고유한 가치에 관한 견해는 점점 더 왜소해질 것이고, 어느 정도 미국의 이미지로 알려졌던 자비라는 개념도 더욱 사라져갈 것이다(64-5pp).

쉐퍼가 걱정하는 것은 단지 낙태율이나 동성연애 현상이 아니다. 인간의 기본적인 자유와 행복 추구권을 보장한다는 선한 동기로 위장한 무신론적 인본주의 관점으로 정치적 의사결정을 하는 것의 문제다. 창조주의 절대 권위를 부정하고 인간이 중심이 되어 모든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스스로 결정하는 오만한 태도다. 그리고 죄악 된 인간이 주장하는 “권리”는 심각한 위험을 초래한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슴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 1:21-23)

바울의 분석은 단지 우상숭배를 하던 고대사회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언제 어디서든 하나님을 그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며(혹은 있으나 마나 한 존재로 여기며) 그 절대 권위를 다른 피조물의 것(인간의 권리, 자유, 행복)과 바꾼 결과는 참혹하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신다(롬 12:24). 인본주의의 기본 사상이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사람)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다(롬 12:25). 마땅히 영원히 찬송할 분은 오직 주 하나님 한 분뿐이다.

생각보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신본주의적 관점으로 정치를 논하지 않는다. 인본주의적 사상으로 가득 찬 사람과 이야기를 나눌 때 그들의 관점을 가지고 대화를 하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 그것이 종교를 걷어내고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사실을 두고 나누는 대화라고 생각한다.

가령 동성연애에 관한 정부의 정책을 논의할 때, 진보적 성향을 가진 그리스도인은 사회적 약자로 억압과 고통을 당하는 동성애자를 불쌍히 여기는 경향이 있다(물론 보수 성향의 그리스도인도 그들을 불쌍히 여긴다). 그들이 행하는 일이 죄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죄로 인해 그들이 겪는 아픔을 이해하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랑과 위로와 소망을 주고 싶어 한다. 따뜻하고 아름다운 마음이 담겨있다.

그런데 이런 마음을 가진 자 중에 하나님이 동성연애 자체를 어떻게 평가하시는지 말하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 개인이 선택한 삶의 방식이나 실수 정도로 평가하고 싶어 한다. 말씀을 근거로 하나님이 이렇게 생명과 자유와 행복을 규정하셨다고 말하면 극단적으로 치우친 종교적 발언처럼 여긴다. 언론이나 방송 매체에서 보도하는 내용을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분석이라고 생각한다(하지만 그들이 인본주의 종교에 근거하여 말하고 있다는 것은 모른다). 최대한 하나님을 빼고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보호하려고 한다. 그러다 보니 결국 하나님이 부여하신 모습이 아닌 인간이 결정하고 주장하는 “권리”를 보호하는 모습으로 정치를 논한다.

이것을 겸손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은 겸손이 아니다. 인본주의는 종교다. 하나님이 없다고 굳세게 믿는 신앙 위에 세워진 사상체계다.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에 대한 굳건한 신념을 가지고 정치를 논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얼마든지 우리가 속한 모든 실재에서 하나님을 똑똑히 인정하고 그것을 예의 있고 겸손하게 설명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이 정치를 논할 때, 어떻게 하나님을 인정할 수 있을까?
다음 칼럼에서 살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