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고후 2:15)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향기다. 하나님은 바울과 그 동역자들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각처에서 나타내셨고(고후 2:14), 지금도 그리스도인을 통하여 각처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내신다. 바울의 말처럼 어떤 이에게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가 될 것이고, 또 어떤 이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가 되겠지만(고후 2:16),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내는 일을 감당하는 그리스도인은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그 향기를 나타내야 한다. 바울은 수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한다고 말한다(2:17). 실로 많은 그리스도인이 혼잡한 향기를 나타낸다. 특히 정치를 말할 때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순전함을 가지고 말하는 사람이 드물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혼잡하게 나타내는 대표적인 경우를 살펴보자.

1. 무관심: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아무 관심이 없다

어떤 사람은 지나치게 정치에 관심을 두느니 차라리 무관심한 것이 낮다고 생각한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신 예수님도 그 생각에 동의하실 것 같다(요 18:36). 하지만 정치에 무관심한 것은 적어도 세 가지 이유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잘못 나타낸다.

첫째,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신다. 하나님은 자기 독생자를 주실 정도로 세상을 사랑하셨다(요 3:16). 여기서 세상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영적 세력이나 세상의 체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을 가리킨다. 당신은 타락한 세상 제도에 관심을 덜 가질 수 있지만, 그 제도 아래 고통받는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에 순종하는 그리스도인은 자기 이웃이 속하여 살아가는 세상의 체계에 철저한 무관심을 보일 수 없다. 정치에 무관심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가 세상 사람이 처한 상황에서 어떤 고통을 받든 상관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다.

둘째, 하나님은 세상을 다스리신다. 하나님은 참새 하나가 땅에 떨어지는 것까지 모두 관여하신다(마 10:29). 그런 하나님께서 위에 있는 권세, 제도 등에 관여하지 않으실까? “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라”고 명령한 베드로(벧전 2:13), 권세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사역자”라고 말한 바울(롬 13:4), 구약의 여러 정치적 상황을 통해 이스라엘의 구속사를 빚으신 하나님의 섭리…성경은 일관성 있게 이 세상을 하나님이 통치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이 세상에 선포할 메시지는 ‘어차피 불타버릴 세상에 하나님은 아무 관심이 없다’가 아니라 ‘죄로 인해 타락한 세상이지만 여전히 하나님은 이 세상을 통해 당신의 뜻을 이루고 계신다’가 아닐까? 하지만 정치에 관한 무관심은 전자의 향기를 내기 마련이다.

셋째,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을 통하여 지금도 일하고 계신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이 사회 구성원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관해 침묵하지 않는다. 가족 관계뿐만 아니라(엡 5:22-6:4) 종과 상전의 관계(엡 6:5-9; 벧전 2:18-20), 정치 지도자와 시민의 관계(벧전 2:11-17)까지 그리스도의 향기를 어떻게 나타내야 할지 분명하게 말한다. 특히 베드로는 이것을 그리스도의 본과 연결하는데, 악을 악으로 갚지 않으시고 아버지의 뜻을 신뢰함으로 선으로 악을 이기신 그리스도의 본이 그리스도인이 좇아야 할 본이라고 주장한다.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사랑할 때 나타나고, 세상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통치력은 그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가장 강력하게 드러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정치에 무관심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통해 사회 각처에서 당신의 사랑과 통치를 나타내기 원하시기 때문이다.

물론 관심도에 따라 남들보다 정치를 잘 모를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이기에 이 땅의 세상에 무관심한 것이 당연하다고 착각하면 안 된다. 하나님의 뜻을 신뢰함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에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이 땅에서 감당해야 할 사명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이 땅의 정치에 절대 무관심하지 않으시다.

2. 이념론: 그리스도는 좌파 혹은 우파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무조건 우파를 지지해야 하거나 좌파를 지지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각자 성향의 차이가 있고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이 다를 수 있다. 전통과 미덕을 중요시한다면 진보보다는 보수를 지지할 가능성이 크고, 약자를 보호하려는 생각이 크다면 진보를 지지할 가능성이 크다.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본다면 자유 진영을 지지할 것이다. 좌파라고 해서 전통과 미덕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고, 우파라고 해서 약자를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다(물론 서로를 그렇게 오판할 때가 많지만).

마이클 샌델이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성향이 다르다는 것은 공동체가 끊임없이 논의해야 할 여지가 많다는 것이지, 누가 틀리고 맞고의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 가운데는 이런 열린 논의에 합당한 자세를 갖추지 못한, 무조건 자기가 지지하는 진영이 바르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그가 나타내는 그리스도의 향기는 그리스도가 좌파 혹은 우파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를 보호하고 특히 하나님의 존재와 그분이 제정하신 원칙에 입각하여 정치적 사안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을 말할 때 하나님이 마치 내가 지지하는 진영에 서 계신 것처럼 주장해서는 안 된다.

가령 낙태에 대한 정치적 의견을 제시할 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생명의 중요성을 강조할 필요가 있지만, 반대쪽에서 제기하는 산모의 권리문제 역시 하나님이 간과하지 않는 중요한 도덕적 가치를 가지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무조건 낙태를 허용하는 정치집단은 마귀의 집단, 낙태를 반대하는 집단을 하나님의 편에 선 집단으로 구분하여 내 생각을 관철하려는 태도는 혼잡한 그리스도의 냄새를 피울 뿐이다. 산모의 권리를 고려하는 입장에 선 자에게 마치 하나님이 강간당한 여성이 아이를 낳고 키울 때 받을 상처와 고통은 상관도 안 하시는 것처럼 인상을 주면 안 된다.

토지와 재산을 고르게 분배하려는 노력이 무조건 공산주의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아니다. 평등을 강조한다고 해서 반기독교적 색깔을 띠는 것도 아니다. 반대로 자유를 주창한다고 기독교에 친화적인 것이 아니다. 낙태와 동성애만큼 하나님은 탐욕과 비리를 미워하신다.

그리스도인이 개인적으로 더 선호하는 진영이 있을 수 있다. 정치적 사안마다 자기 기준을 가지고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가 무조건 내 편으로 내가 지지하는 편에 서 계신다고 주장할 수 없다. 좌파를 지지하든 우파를 지지하든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지음 받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점에서 하나님의 백성이다. 자녀들이 싸우면서 아빠를 자기편에 넣으려고 애쓰는 것처럼 하나님을 이념론에 맞춰 제한하지 말라. 그렇게 할 때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가 한쪽 편만 드는 극단적인 분이라고 세상에 외치는 꼴이 된다.

아무리 내가 선호하는 진영이 있고, 내가 바라보는 정치적 관점이 있을지라도, 바울의 말처럼 그리스도인이 드러내야 할 냄새는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은,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는 것 같은, 그런 순전한 냄새다. 내 주장은 내 주장인 것처럼 그 선에서 외치고, 하나님의 말씀은 혼잡하지 않게 순전함으로 드러낼 줄 알아야 한다. 절대로 그리스도인은 정치적 의견을 하나님의 계시처럼 선동하며 주장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사람의 말은 주의해서 들으라.

3. 혐오주의: 그리스도는 너를 더 미워하신다

국민 청원 및 제안을 하는 청와대 홈페이지에 들어가보면 그리스도인이 올린 동성애 반대 청원의 글이 적지 않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관련 글을 읽어보면 “가장 더럽고 구역질이 난다”, “토나온다”, “짜증난다” 등 자극적인 표현이 포함되어 있다. 구토반사라고 불리는 남자들의 성행위를 묘사하는 표현도 자주 등장한다. 그리고 낯부끄러운 문구로 마무리 한다. “기독교인들이여 일어나자!”, “기독교를 지키기 위해서 동성애를 반대한다!”

동성애를 반대하는 비기독교인이 봐도 그렇게 좋게 들리지 않는다. 기독교와 기독교가 섬기는 그리스도에 대해 역으로 혐오감이 생긴다.

하나님은 동성연애를 가증한 일로 보신다(레 18:22). 동시에 하나님은 동성애자가 돌이켜 하나님을 따르는 자가 되기를 원하신다(딤전 2:4). 이 두 가지가 골고루 담긴 발언이 하나님의 마음을 바르게 전달한 발언이다. 하지만 구토반사 등 자극적인 표현으로 동성연애를 반대하고 그런 태도로 관련된 정치 사안을 논할 때 마치 기독교는 동성연애를 더 심각한 죄인 것처럼, 그래서 하나님은 동성연애자를 더 미워하시고 증오하시는 것처럼 나타낼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죄 때문에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가 피 흘려 죽으신 사실을 믿고 영원히 그 은혜에 감사하기로 작정한 사람이다. 그런 자로서 정치를 논할 때 특정 범죄나 도덕적 의견에 대해 혐오하는 발언을 하는 것은 큰 문제가 있다. 마치 바리새인이 “저는 저 세리와 같지 않음에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문제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교만을 더 큰 죄로 보셨다.

바울은 로마서 13장에서 다스리는 자들이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에 백성에게 선을 베풀고, 악을 행할 때 하나님의 사역자로서 진노하심을 따라 보응한다고 말했다(4절).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사역자인 권세들에게 하나님이 무엇을 선으로 보시는지, 악으로 보시는지 말해줄 의무가 있다.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실천하여 보여줄 수 있고, 사회 정치 구조 속에서 보장된 방식에 따라 직접 권세들에게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말할 때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입법자나 심판자가 아님을 인정하는 겸손한 태도를 갖춰야 한다. 그리스도인도 율법의 준행자다(약 4:11). 그리고 편중되지 않은 분명한 하나님의 기준을 성경을 통해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같은 맥락에서 탈권위주의 성격을 가진 그리스도인 역시 주의해야 한다. 성경은 바른 정부를 지향하지 무정부를 지향하지 않는다. 세워진 권세의 잘잘못을 합리적으로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비꼬고, 놀리고, 조롱하고, 우습게 여기는 태도는 하나님이 세우신 권세에 복종하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거스르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정부를 그렇게 모욕할 때 세상은 이렇게 물을 수 있다. “네가 비방하는 그런 정부를 하나님이 세우신 거라며? 정부를 믿으면 정신병자라고 말한다면 그 정부를 세운 하나님을 믿어도 정신병자인 건가?”

결론

그리스도인의 말과 행동은 영원한 중요성을 가진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을 이 땅에 두신 목적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이 세상에 드러내신 것처럼, 지금은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그리스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세상에 나타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스스로 진지하게 물어야 한다.

정치를 논할 때 나는 어떻게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내는가?

내가 정치를 말할 때 그리스도는 어떤 분으로 세상에 선포되는가?

그리스도는 이 세상을 사랑하시고, 세상을 다스리시며, 그리스도인을 통해 일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세상 체제와 그 속에 살아가는 사람에게 무관심할 수 없다.

그리스도는 온전한 공의와 정의를 선포하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이념에 치우친 그리스도를 세상에 소개할 수 없다.

그리스도는 모든 죄를 미워하셔서 그 죄로부터 모든 사람이 돌이키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특정 범죄를 혐오하는 태도로 그리스도를 왜곡할 수 없다. 하나님이 세우신 사역자로서 정부의 권세를 무시하거나 조롱할 수 없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라(엡 5:15)